주기도 (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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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tle-Aland Greek New Testament, 28th Edition (Chapter 6)
9 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 ὑμεῖς·*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10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 γῆς·
p 15 11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12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13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
9절

οὕτως (houtōs), 부사., 접속사. 이렇게, 이와같이, 그렇게.

προσεύχομαι (proseuchomai), 동사. 기도하다, 간구하다

현중수직2복
-> 이와같이 그러므로 너희는 기도하라.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

ἁγιάζω (hagiazō), 동사.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부과수명3단
->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10절

ἔρχομαι (erchomai), 동사. 가다, 오다, 이르다

부과능명3단

βασιλεία -ας, ἡ; (basileia), 명사. 나라, 왕권, 왕위.

왕국(영역), 왕국(국가), 하나님의 나라, 주권
->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

γίνομαι (ginomai), 동사. ~이다, 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부과수명3단

ὡς (hōs), 접속사., 전치사., 부사. ~같이, 처럼, ~로서.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 안에 같이 또한 땅 위에서도.
-> 이방인과 같이 자신이 필요한 것을 기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경건한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다.
11절

ἄρτος -ου, ὁ; (artos), 명사. 빵, 떡, 덩어리.

음식

ἐγώ -οῦ, ὁ; (egō), 대명사., 형용사. 나, 우리(복수)

대명1속복

ἐπιούσιος (epiousios), 형용사. 생존을 위한, 일용할.

이어지는, 생계 유지를 위해
형용사 남단대

δίδωμι (didōmi), 동사. 주다, 선사하다, 바치다

부과능명2단

σήμερον (sēmeron), 부사. 오늘

-> 우리가 일용할 음식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한다고 하면 바로 실질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그럼 우리의 문제는? 이것 또한 구해야 한다. 다만 이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필요한 오늘의 양식이다.
12절

ἀφίημι (aphiēmi), 동사. 떠나다, 용서하다, 허락하다

남다, 두고 가다, 혼자 떠나다, 출발하다, 해산시키다, 이혼하다, 멀리 보내다, 허용하다, 재정적으로 용서하다
부과능명2단

ὀφείλημα (opheilēma), 명사. 빚, 의무.

중복목
-> 우리들의 죄들을 용서해주소서.(우리들의 빚을 탕감해주소서)

ὀφειλέτης -ου, ὁ; (opheiletēs), 명사. 채무자, 의무를 가진 자, 죄지은 자.

-> 우리들이 우리들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해준 것과 같이 (우리들의 채무자들에게 탕감해준 것 같이)
13절

εἰσφέρω (eispherō), 동사. 가지고 들어오다, 가져 오다.

(어떤 상황으로) 가져오다. 어떤 (상태)가 되다.
부과능가2단

πειρασμός -οῦ, ὁ; (peirasmos), 명사. 유혹, 시험, 시도.

-> 우리를 유혹(시험)의 상황으로 가져가지 마시고,
-> 왜 가정법으로?

ἀλλά (alla), 접속사., 소사(불변화사). 그러나, 오직, 도리어.

ῥύομαι (rhyomai), 동사. 구원하다,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되다(상태)
부과중직2단
-> 도리어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소서.
14절

ἀφίημι (aphiēmi), 동사. 떠나다, 용서하다, 허락하다

부과능가2복 (에안과 쓰여서 미래조건)

ἄνθρωπος -ου, ὁ; (anthrōpos), 명사. 사람, 남, 인간

παράπτωμα -ατος, τό; (paraptōma), 명사. 잘못, 침해, 범죄

-> 왜냐하면 만약 너희가 그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οὐράνιος -ου, ὁ; (ouranios), 형용사. 하늘의, 천국의.

->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5절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아버지도 우리들의 잘못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12~14절까지 구절은 이어지는 듯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용서한 행동을 가지고 아버지께 같은 용서를 구한다. 어떤 악의 유혹과 시험의 상황일까? 아마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하는 시험과 유혹일 것 같다. 왜냐하면 14절에서는 그들이 끝내 용서한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미래에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용서할 수 있기 위하여, 또한 용서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상황이 (그렇게 되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하게 될 그 상황)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시험이고 유혹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사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NICNT 마태복음] -R.T.프란스
5. 진정한 경건과 거짓된 경건 : 세 가지 대조(6:1-18)
이 강화 (5:20–48) 의 마지막 주요 단원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소개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5:20). 지금 이 강화는 잘못된 “의”(6:1) 에 대한 경고를 시작한다. 잘못된 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함을 모방하지 않으며 인간의 인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를 수행하는 사람은 “위선자”(개역개정, “외식하는 자”) 로 묘사되는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는 국가 종교를 대표하는 관리 (혹은 자칭) 를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3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데 여섯 번 사용되었다. 23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고발하는 이유가 되는 문제점은 비슷하게 외면에만 관심을 두고 내적 깊이가 없다는 점에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5장 20–48절의 바닥에 깔린 것으로 본문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제자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초점은 윤리적 독특성에서 종교 관습으로 옮겨 가고, 6장 1절의 “의”는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경건만큼 도덕적인 방향성은 없다.
본문의 기초 뼈대는 서론적 훈계 (1절) 가 대응하는 세 가지 대조로 묘사되고 (2–4, 5–6, 16–18절), 세 가지 주요 종교 의무인 구제, 기도, 금식을 수행하는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정리해 준다. 이 세 가지 의무는 대부분의 종교 전통이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 무슬림은 구체적으로 교리 암송과 메카 순례의 두 가지 조건을 추가하여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한다. 세 가지를 기술하는 어법은 표준 양식 (“너희[단수]로 말할 것 같으면, 너희가……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하는 것같이 하지 말라”) 을 따르면서 결론부에 구두의 동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가 추가된다. 매번 잘못된 길은 겉으로 보이는 일이며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올바른 길은 비밀의 문제로서 하나님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뜻밖에도 “은밀한 중에 계신다”고 묘사되는 하나님이 보상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의”뿐이다. 과시하며 드러내는 위선자의 경건은 얻게 될 (그리고 이것을 구하는 중이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보상만 받을 뿐이다. 은밀한 경건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갖는 성격은 진술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1절)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하늘의 보상”을 생각할 수 있고, 이는 5장 12절에서 박해받는 자에게 약속된 것이었다 (마태복음의 보상에 대해서는 해당 부분의 주석을 보라). 아래 19–20절의 “하늘의 보물”도 참고하라. “은밀한” 종교의 우월함에 대해서는 바울이 “외관상”(개역개정, “표면적”) 유대인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인 “은밀한”(개역개정, “이면적”) 유대인을 대조시킨 것을 참고하라 (롬 2:28–29).
-> 우리가 기도를 하는 기본 원리도 1절의 가르침을 따른다. 즉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신중하게 균형을 이룬 세 단위 구조의 가르침은 7–15절의 긴 기도 논의로 중단되고 있는데, 이 기도 논의는 (a) 잘못된 길/올바른 길의 대조 계속 (7–8절), (b) 모범 기도문 (9–13절), (c) 모범 기도문의 한 구절에 대한 목회적 주석 (14–15절) 으로 구성된다. 마태는 분명히 진정한 기도라는 주제는 너무도 중요해서 구제나 금식처럼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이 주제에 다른 말씀 자료도 넣었는데, 그중 (b) 와 (c) 는 누가복음 11장 2–4절과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부정확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중심이 되며 중요한 전통이 이 강화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이고 (앞으로 54개 절, 뒤로 48개 절이 배치됨), 그럼에도 이는 실제로 문학적인 탈선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 오늘 설교(기도)의 주변 문맥 및 구조다!
a. 일반 원리: 경건 생활의 겉치레를 피하라 (6:1)
이 절은 복수로 표현되고 이어지는 사례가 단수에 초점을 둔 것과 대비된다 (288쪽, 각주 249를 보라).그래서 이는 일반적 훈계로 6장 2–18절을 시작하는 부분으로서 5장 21–48절을 시작하는 5장 20절과 상당히 비슷하고, 두 경우 모두 핵심 용어가 ‘디카이오쉬네’(“의로움”) 다. 여기서는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가 아니라 종교 규율에 관련되지만, 이는 무언가 “행해야”266) 할 것으로 남는다. 마태복음에서 ‘디카이오쉬네’가 본질적으로 행위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3장 15절 주석을 보라. 이는 바울이 이 용어를 더 신학적이고 구원론적으로 사용한 것과 반대된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세 가지 모범은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는 행동으로 범주화된다. 예수의 다툼은 이를 행하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는 제자들이 이를 행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 방식과 동기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가 반대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즉 공개적으로 행하는 것이고, 예수가 반대하는 동기는 “그래서 그들이 너희를 주목하도록”,268) 즉 사람의 인정을 목표로 삼는 것을 말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비슷한 비판은 23장 5–7절을 참고하라. 23장 5절에서는 같은 동사 ‘데아오마이’를 사용한다.
5장 16절에서는 제자들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타인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6장 1–6, 16–18절의 은밀한 “의”는 이런 기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5장 16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성품과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지만, 현 본문의 주제는 구체적으로 종교적 의무다. 종교적 의무에서 내세의 “거룩함”에 대한 명성으로 이어지는 거짓 경건이 발전할 만한 근거가 많이 나온다. 거짓을 통해 전반적으로 선량하다는 명성을 얻는 것보다 종교적 위선자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이다. 1세기 유대교가 그랬듯이 경건을 높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종교적 과시에 더 쉽게 기만당한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본문이 의도적으로 공공의 인정을 구하는 것을 다루는 반면, 5장 16절은 본질적인 성품에 초점을 둔 진정한 제자에 대한 인물 연구를 개관하여 이렇게 사는 사람은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처럼 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적 과시의 결과는 바라던 “보상”인 사람의 갈채가 되지만, 제자들의 삶의 방식이 빛을 낸 결과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보상”이 있는데, 이는 위선자가 이미 받은 보상 (2, 5, 16절) 과 같지 않고, 미래에 남겨 두어 4, 6, 18절에서 미래 시제로 “갚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5장 4–9절의 지복에 나오는 “때문에” 어절의 미래시제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와 미래 성취 사이의 긴장에 대해 해당 주석을 보라). 이 “하늘의 보상”(5:12) 은 위선자의 공적 인정이나 자기만족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25장 21, 23절에 나오는 승인 형식에 가장 적절하게 정리된 것 같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보상은 제자들이 하늘에 있는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로 충성의 방향을 바꾸기를 허용했다면 상실했을 위험 가운데 있었다.
-> 우리들의 보상은 나중에 미래에, 하늘에 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b. 은밀한 구제 (6:2–4)
1절에서 복수로 표현된 일반 원리는 지금 더 구체적으로 개별 제자의 행동에 적용된다 (288쪽, 각주 249를 보라).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은 유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이를 예수는 이미 5장 42절에서 지지하고 19장 21절에서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25장 35절과 26장 9절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신명기 15장 7–11절 같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과하고, 예컨대 시편 112편 9절, 토비트서 1장 3절, 4장 7–11절, 12장 8–10절에서는 지지하는 종교적 의무였다. 일부 구체적인 가난 구제 수단은 레위기 19장 9–10절, 신명기 14장 28–29절, 24장 19–21절, 26장 12–13절에 정리되어 있다. 1세기 무렵에는 회당을 기초로 가난한 자의 구제 제도가 제대로 조직되어 있어서, 현대라면 국가 재정으로 수행하는 복지 제도에서나 내놓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제도의 기금은 공동체 구성원의 기여에 의존했고, 그중 일부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십일조”272) 로 규정되었으면서도 막대한 분량의 민간 지원도 수반되었다. 랍비 규정에 보면 그 한계도 나오는데 본인과 가족을 빈곤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 수입의 20퍼센트를 초과하여 자선에 소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도 있었다.274)
2절 여기서 “갈채를 받다”(개역개정, “영광을 받다”) 는 5장 16절에서 제자들의 선한 삶의 결과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행동을 묘사하는 데 쓰였던 것과 같은 동사 (‘독사조’) 다. 이사를 반복하다가 이제 그 목적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구제로 쓴 것 (마태가 이 동사를 사용한 다른 두 본문 9:8; 15:31에서 하나님이 목적어가 된다) 은 두 본문에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구제와 관련하여 나팔 을 불었다는 증거는 없고, 이 어구는 여기서 순수하게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일 수 있지만, 이렇게 예수가 자기를 선전할 정도로 우둔한 행동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 이례적인 경우는 아니었을 것이다.276) 어쨌든 중요한 기부는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선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과시가 주는 효과가 커진 것은 구제를 회당에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도 떠들었기 때문이다. 회당에서는 구제를 말하는 일이 예측되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수혜자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분배 체계로 넘어갔을 것이고, 거리에서는 걸인에게 직접 줄 수밖에 없어서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을 것이다. 랍비도 구제할 때 과시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사실 (Str-B 1:391–392; Davies and Allison, 1:579–580을 보라) 을 보면 이는 이미 익숙해진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마태는 ‘휘포크리테스’(이 단어는 원래 연극 “배우”를 의미했다) 를 본문 2, 5, 6절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지 않는 비판자 (7:5) 에게도 사용하고, 극형에 처해질 자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 (24:51; 70인역에서 ‘휘포크리테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로도 사용한다. 하지만 이 용어의 주요 용례는 예수가 15장 7절, 22장 18절, 23장에서 여섯 번이나 논쟁하게 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 용례 중 몇 가지는 아마도 불성실의 의미나,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아 행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날 “위선자”가 뜻하는 것과 가깝다. 그러나 특히 7장 5절, 15장 7절, 23장 15, 23, 25절에서는 대체로 “위선자들”을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가치에 대한 거짓 관점이나 느낌에 초점을 두고 있고 의식적으로 속이려는 시도에는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비참하게도 스스로 기만당한 자 (마치 7:21–23의 열정적이지만 잘못된 길로 인도된 추종자들처럼) 일 뿐이고, 속이는 자는 아니었다. 본문에서는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기만이라는 혐의점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아마도 분명히 구제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이 사실을 모두가 알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이 종교 자랑꾼들은 타인에게 감동을 주려는 목표를 가졌다는 점에서 “배우들”이지만, 동시에 이들의 행실은 이들이 하나님이 이해하는 “의”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에 대해서는 5장 18절 주석을 보라.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에 대해서는 288쪽, 각주 247을 보라. ‘아페코’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받을 것을 전부 받았다는 의미 (이들이 속은 것은 없다) 와 더 나올 게 없다는 위협까지 전한다. 그래서 이는 서글프게도 이들의 시야가 제한되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볼 수도 없고 열의도 없어서 동료의 찬사에 안주할 뿐이다.
3절 이곳과 6, 17절에서 복수형 위선자들에서 단수형 제자로 전환한 것은 이런 종교적 의무가 집단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제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었음을 강조한다. 기도와 금식의 경우 (이는 복수형 “너희가 기도/금식할 때에”로 시작한다) 제자의 개인적 행동은 합의된 기도나 금식 양식에 부합하면서도 공동체가 집단으로 수행했을 수 있지만, 공공의 인식이 없는 경우 수행 방법은 개인에 달렸던 것이다. 구제의 경우 같은 정도로 집단적으로 수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단수형 도입부 “네가 구제할 때에”로 시작했을 것). 이는 전적으로 사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의사소통의 결여 는 유쾌하고 기괴한 일이겠지만, 절대적인 은밀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방법도 된다.281)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25장 35–40절을 비교하라. 여기서 의인은 자신이 행한 의에 대해 스스로 알지 못한다.
4절 마태복음에서 “너희 아버지”라는 어구의 “너희”는 보통 복수다. 본문과 6, 18절에서만 단수인 것은 장면이 제자 개인이 하나님과 사적으로 갖는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밀히 본다”는 것은 시편 139편에서 능숙하게 표현하듯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에겐 숨겨진 것이 없다고 이해한 것을 반영한다 (참고, 신 29:29; 시 90:8; 전 12:14; 렘 23:24; 집회서 17:15–20; 23:18–19). 이는 구약 성경에서는 위안이 되지 못하고 자주 위협이 되는 생각이지만, 여기서는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이며 “갚아져야” 하는 일이다. 지시 대상은 1절에서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2절에서 빼앗긴다) 그보다 앞인 5장 12, 46절에서도 지복의 “왜냐하면” 어절에서 훨씬 충분하게 개관된 “보상”임이 분명하다. 본문과 6, 18절에 나오는 “되갚다”라는 교역 용어는 “등가”의 유상 거래를 가리키는 말로, 공적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교리와 불편한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하나님의 균형이 안 맞는 보상에 대한 마태의 폭넓은 이해로 균형이 잡혀 19장 29절, 20장 1–15절, 25장 21, 23절에서 표면화되고 있다 (위 5:12 주석을 보라).
c. 은밀한 기도 (6:5–6)
종교적 실천의 둘째 사례는 기도로, 이는 5–6절에서 2–4절이나 16–18절의 구제나 금식과 같은 방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런 후에야 7–15절에서 추가적인 어록으로 이 주제를 더 다룰 것이다. 이 세 사례가 매번 표준 형식을 반복하는 점에 대해서는 2–4절 주석을 보라. 다른 사람들이 “위선자들”의 공개 기도에 목격자가 되리라는 희망은 아마도 이 기도를 크게 소리내서 한 것이며 단순히 눈에 보이게 기도한 것만은 아님을 암시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개인적인 독서도 큰 소리로 한 것처럼 아마 기도도 일반적으로 크게 들리게 했을 것이다. 6절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요구한 것이 반드시 침묵의 기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은밀한 곳으로 간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곳에 있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쉬나고게’는 예배 모임을 가리키고 (4:23 주석을 보라), 당연히 거기서 기도를 하지만, 이 모임을 이끄는 특권은 아무에게나 열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 길에 나가 기도한다는 말은 아마도 여기서 “모임”의 보다 세속적인 의미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잠재적인 청중으로 보인 곳이면 어디서든 “위선자들”은 자기 기도를 사람들이 보고 들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오늘날 무슬림 국가에서 익숙한 모습인 거리나 공공 공간의 구석에서 깔개 위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 것 보다 더 눈에 띄는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실한 유대인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지만 (단 6:10),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한 것은 아니었고 (m. Ber. 1:1–2; 4:1), 제구시 (오후 3시) 는 일반적인 기도 시간으로 보인다 (행 3:1; 10:30). 유대인에게 서서 기도하는 자세는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참고, 막 11:25; 눅 18:11, 13), 간혹 무릎을 꿇거나 (대하 6:13; 단 6:10; 눅 22:41), 심지어 특수한 환경에서는 몸을 엎드리기도 했다 (민 16:22; 마 26:39).
“가장 은밀한 방”(개역개정, “골방”) 은 아마도 내부 저장실일 텐데, 이는 평범한 팔레스타인의 집 안에서 유일하게 자물쇠가 달린 방이었을 것 같다 (24:26; 눅 12:3에서도 은밀한 공간을 가리키는 데 같은 용어를 쓴다). 기도 전에 문을 잠그는 것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4장 33절을, 그리고 비밀 때문에 저장실로 들어가 안에서 잠그는 것은 이사야 26장 20절을 보라 (70인역은 같은 단어 ‘타미에이온’을 사용). 하지만 이사야 26장 20절의 경우 목적은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은밀한 공간에서 제자는 “은밀한 중에 있는” 하나님을 대면한다. 이 눈에 띄는 어구286) 는 본문과 18절에 사용되어 (다음 어절에 나오듯이 은밀히 볼 뿐만 아니라) 은밀한 공간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전지함을 알리고 또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겉치레만 하는 예배자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이들은 너무 잘 보일 뿐이다.
본문은 공개적으로 들리는 기도를 금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예수는 자주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막 1:35; 6:46 등) 간혹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했다 (11:25; 14:19; 26:39, 42; 눅 11:1). 9–13절에 나오는 이런 기도 양식은 개인 기도가 아니라 집단 기도로서 복수형으로 서술되고, 기도를 위해 모임을 갖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의 삶에서 초기부터 규칙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그 동기다.
->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동기로 기도했고, 예수의 제자들은 그와 반대가 되어야 한다.
d. 기도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 (6:7–8)
종교적 은밀함에 대해 가르치던 삼부 구조의 단위에서 느닷없이 기도를 다루느라 “이탈”하고서 (위 292쪽을 보라), 비슷하게 기도의 잘못된 길과 옳은 길 사이의 대조로 시작한다. 여기서는 5절에서 “이방인들”이 “위선자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에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태도와 습관,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기대하는 접근 방식에 대한 오해를 보여 주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는 5장 47절 (이에 대해서는 아래 18:17 주석을 보라) 에서 제자 공동체 외부의 세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것과 같은 용어다. 여기서 강조점은 이들이 경건한 외부자라는 것 외에 유대인이 아니라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아버지로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궁핍을 채워 주기를 기대하면서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이 떼를 써서 신이 마지못해서라도 자신들을 알아차리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에 대한 이들의 접근법은 두 가지 다채로운 용어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 “횡설수설”,289) 즉 아무 뜻 없이 길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종의 장광설이나 사족이라고도 한다. 이는 질보다는 양 (혹은 음량?) 에 가치를 두고 기도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반드시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말이 많을 필요는 없고, 오히려 눈에 띌 정도나 불필요하게 말이 많은 경우를 말한다. 이 입장에서 보는 기도의 목적은 우선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 혹시 간과할 수 있는 긴요한 일을 알리는 것이다. 의식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9–13절에 공식화된 기도가 나온다), 불행히도 KJV가 “헛된 반복”이라고 해석한 것이 자주 거론되듯이 기도를 고집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기도 방법이나 빈도가 아니라 (예수도 26:44에서 직접 자기 기도를 반복했고, 14:23–25에서는 분명히 기도로 밤을 새웠으며 눅 18:1에서는 제자들에게 계속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기도의 근간을 이루고 기도에 영감을 불어 넣는 믿음의 태도다.
“너희”(복수, 제자 공동체는 기도로 연합되었다) 가 저들과 같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관심과 분명히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전지하심 (참고, 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이라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에 대한 신학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 궁핍함을 알릴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에 대해 자신에게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전통적으로 기도라는 관념에서 그 해답을 찾았는데, 기도는 정보 전달도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기술 (더 많은 말을 입력하면 더 많은 결과가 나오는 법) 은 더더구나 아니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서 갖게 되는 신뢰 관계의 표현인 것이다. 이어지는 모범 기도는 이런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준다.
e. 기도의 모범 (6:9–13)
“위선자들”(5절) 과 “이방인들”(7절) 의 공허한 기도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이라는 형태로 기도 방법의 모범을 보게 된다. 이를 마태는 오늘날 가장 널리 쓰는 형태에 가깝게 보여 준다.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오는 상당히 짧은 형태와 본문 13절 이후에 추가된 부분 (290쪽, 각주 258을 보라) 은 자주 사용되었기에 전례적 이형과 확장이 이루어진 본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디다케 8장 2–3절은 1세기 말엽에 이런 경향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주기도문의 완전한 형태 (현대적 용례에 친숙한 확장된 형태) 가 정리된 상태로 여기에 “하루에 세 번을 이와 같이 기도하라”라는 지시문이 붙는데, “이와 같이”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모범 기도의 정신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전례적으로 반복할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정해진 전례 기도 형태는 이미 회당 전례에서도 친숙한 것이었다. 주기도문은 전례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지역적인 이형과 번역상의 차이가 생겨났다.
간혹 마태와 누가에 있는 도입 형식이 기도의 본질에 대해 갖는 관념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는 의견이 있는데, 누가의 경우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는 반복되어야 할 정해진 단어 형태를 가리키고, 마태의 경우 “그러므로 이것이 너희가 기도할 방법이다”(기도에 대한 바른 태도를 말한 후에) 는 전례적 형식이 아니라 올바른 기도 양식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구별하는 것이고, 예수가 이 말씀을 가르쳤을 때에 (가르친 형식과 무관하게) 예수는 이 말씀이 전례 형식으로든 올바른 기도의 모범으로든 사용된다는 것 자체로 만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전통은 언제나 이를 단순 반복이든 더 긴 기도를 위한 견본으로든 기도와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할 (그리고 가르칠) 기초로든 적절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초대 교회가 이 기도가 서로 다른 형태로 보존된 것에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분명히 암시하는 바는 이 기도문의 정확한 형태보다는 기도의 내용에 더 크게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어느 기도 형태가 “원본”이냐는 질문에는 물론 답이 없다. 한편으로 13절 이후에 추가 부분으로 입증되듯이 이런 기도가 사용하면서 확장된다는 경향이 더 짧은 누가의 형태가 더 초기라는 점을 시사할 수 있다. 반면 마태의 어법이 원본으로 여겨지는 아람어 본문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어쨌든 본능적으로 비평적인 추정, 즉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 단일 사건에서만 나온 것이고 이후 전승 과정에서 상이한 형태로 변형을 거쳤다고 보는 이런 추정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의심을 받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어느 측면이라도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아마 어법도 달랐으며,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되고 아마 매번 청중도 달랐던, 그런 가르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이 모범 기도처럼 핵심적인 사안일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느 판본이 “더 진정한” 판본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가 나름대로 (그리고 차이점도 근본적인 수준은 아닌 것이다) 적절하게 예수의 진정한 기도라는 관념을 증명하는 것으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기도 모범은 다음과 같다.
도입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과 하나님 예배에 대한 세 문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한 세 기원:
우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균형을 이룬 구조는 자체로 7–8절에서 책망하는 “이방인”의 기도 관점과 강하게 반대된다. 기도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영광, 나라, 뜻에 관련되어 있고, 그 후에야 우리의 필요가 자리를 잡는다. 첫 세 문장은 바람의 형태로 3인칭 명령형을 사용한다. 이는 실제로 영광송으로 예배 행위이며 기도하는 공동체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들이 2인칭 명령을 쓴 것은 우리의 바람보다 하나님의 뜻이 전반적으로 우선함을 전제로 둔 것이다.
기도의 모든 측면이 이 모범 기도 안에 담긴 것은 아니다. 명시적인 죄의 고백도 없고, 이미 받은 강복에 대한 직접적인 감사도 없으며, 세상의 궁핍한 자나 제자들을 파송한 이 (혹은 제자들을 박해하는 자, 5:44) 를 위한 중보 기도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이 기도의 각 문장을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출발점은 경배와 기도다.
기도의 첫 세 문장은 이미 예수 시대에 회당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던 아람어 카디쉬 기도나 송영을 꽤 생각나게 만든다. J. 예레미야스 는 이 기도의 확보 가능한 가장 오래된 형태를 다음처럼 번역해 놓았다.
그가 자기 뜻에 따라 세상을 만드시니
세상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찬미하고 숭배하라.
네가 사는 동안 네 날 동안 이스라엘의 모든 집이 사는 동안
신속하고 빠르게
그가 나라를 다스리게 하라.
그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받으리라.
그리고 이 모든 말씀에 아멘.
예수의 기도 첫 부분은 친숙한 종말론적 소망의 표현을 더 축약한 형태로 증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이런 것으로 제자들이 놀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기도가 카디쉬와 다른 점은 첫째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2인칭으로 부른다는 점, 둘째로 기도가 계속되면서 공동체의 기원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297)
카디쉬에 나오는 종말론적 기대라는 분명한 관념에 비추어 많은 해석자가 주기도문의 도입부만 아니라 기도문 전체적으로 비슷한 방향성을 주장했다. 이 내용을 아래 11절과 13절에 대해 논평할 것이다. 그러나 9b–10절을 현재에 하나님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위기의 때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매일의 필요에 대한 예비는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이런 기도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필연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실제로 9b–10절도 미래에 대한 관점뿐 아니라 현재를 사는 제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사도 될 만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경외받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세상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회당의 기도가 필연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와 제자들이 보기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선포되었고 예수의 사역을 통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그 역사는 진행 중이었다. 이 관점에 비추어 보면 주기도문의 모든 구절마다 기도하는 자가 처한 현재의 상황과 관심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
9절 연결사 “그러므로”는 이어지는 내용이 7–8절에서 진술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진정한 기도의 근거로 신뢰한다고 표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전해지고, 기도문 전체가 복수형으로 진술될 것이다. 이는 혼자서 하는 기도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기도지만, 그 양식은 창고에서 은밀하게 하는 기도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침이 될 수 있다 (6절).
누가의 기도문은 간단한 “아버지”로 아람어 호격 ‘압바’를 반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예수가 기도에 들어서는 독특한 접근법으로 (마태복음에서는 11:25, 26을 보라; 아람어 용어에 대해서는 막 14:36을 보라), 제자들도 나중에 이를 나눌 특권을 얻는다 (롬 8:15; 갈 4:6). 마태가 “우리의”를 추가한 것은 ‘압바’ 형태를 반영한 것과 거리가 생기지만, 하나님에게 접근할 특권에 대한 함의는 그만큼 분명하게 드러난다.300) 하나님을 제자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보는 것에 대해 이 강화 내에서는 5장 16, 45, 48절, 6장 1, 4, 6, 8, 14–15, 18, 26, 32절, 7장 11절을 보라. 같은 언어가 복음서 나머지에 희귀하게라도 나오지만 (10:20, 29; 13:43; 23:9), 그 대신에 7장 12절 이후로는 예수가 자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이 특별한 관계에서 타인을 배제한다는 의미이고 (특히 11:25–27; 해당 주석을 보라), 이와 관련하여 “(내) 아들”이라는 칭호도 2장 15절을 시작으로 3장 17절 등에 계속 나온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는 (11:25, 26), 간혹 분명하게 “ 아버지”라고 하지 (26:39, 42;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열네 번 더 나온다),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사용한 형태인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 예수가 갖는 고유의 자녀 관계와 하나님의 다른 “자녀”가 갖는 파생 관계를 상정하는 신학 체계를 보여 주는 원 자료가 나온 셈이다. 그런데 이 파생 관계는 예수가 이 다른 자녀를 이 관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나 (참고, 11:27) 예수는 이들과 같은 수준에서 이 관계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교리가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더 충분히 발전될 수 있을지 몰라도, 마태복음은 이 용례에 담긴 함의로 이를 드러나게 한 것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제자도 강화에서 주된 내용은 제자들의 특권적 지위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 강화의 중심에 있는 이 가족 기도에서 제자들이 하나님을 집단적으로 부르는 호칭을 통해 이 점이 가장 적절히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 강화에 보면 “너희 아버지”라는 말의 절반을 충분히 넘는 경우에 “하늘에 계신”이나 “하늘의”가 추가된다. 이는 이 개념의 은유적 성격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까지 규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전능하며 그래서 전적으로 신뢰할 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외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주기도문의 이어지는 문장에 표현되어 있다.
주기도문의 첫 세 문장은 3인칭 명령으로 표현되고 그중 둘은 수동태다. 기도문에 이런 명령이 나오는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바라는 상태나 사건을 일으키도록 행동에 옮겨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그너가 의역한 것에서는 2인칭 명령을 써서 “당신의 이름을 구별하소서. 당신의 종말론적 나라를 가져오소서. 당신의 뜻이 성취되게 만드소서”(Hagner, 1:144) 로 나온다. 하지만 3인칭 형식을 없앨 경우 아마 무언가를 상실하게 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왕 됨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인간의 응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의 행동을 포함하여). 이 바람을 기도에 포함시킨 이유가 하나님이 개입해야 이 바람이 성취되기 때문인데도 “신적 수동태”를 단순히 하그너처럼 처리하는 것은 인간적 차원을 모호하게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백성이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거듭 반복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자주 “거룩하다”고 묘사되는데 (시 30:4; 97:12; 103:11; 111:9 등), 거룩함이 하나님의 주요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문장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한다는 요청이 아닌 것은 전통적으로 “숭배받는”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미 거룩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경외심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사야 29장 23절에서는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로 설명한다. 그 백성의 죄악된 행실과 그에 대한 징벌의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우려를 비교하라 (겔 20:8–9; 36:20–23; 참고, 사 48:11; 52:5–6).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요구하는 경외심을 표현한 것이다.
10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3장 2절 주석을 보라. 3장 2절과 4장 17절에는 (그리고 복음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와서 통치하는 것은 이미 선포된 것이다. 12장 28절을 보면 그 실제적 임재가 요구되지만, 이 말씀에서 부지중에 붙잡힌다는 관념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이를 모두가 알거나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3장의 비유는 이 점을 반복할 것이고 두드러진 경우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더 그럴 것인데 (13:31–33),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숨겨진 임재가 미래에 더 대중적으로 증명되도록 준비된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이 기원을, 아마도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미래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미–아직 아니”의 긴장은 이 용어에 대한 공관복음 용례에 기저를 이루는 것으로, 지금 막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했던 제자들이 즉시 이 일이 이미 현실이 되었음을 선포하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이 기원은 무언가 이미 사실이 아닌 것 (하나님이 왕이 된다는 것) 이 실현될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인 하나님의 실제 왕권이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함으로써 실제로 충분히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은 카디쉬에서 많은 신실한 유대 백성의 기도를 반영하고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막 15:43).
셋째 문장은 둘째 문장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 왕권 도래의 본질은 하나님이 순종을 받고 하나님의 의도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미–아직 아니”의 긴장은 여기서 더 분명해져서 하늘의 상황 (하나님의 왕권이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곳) 과 땅의 상황 (아직 완전히 인정되지 않은 곳) 이 비교된다. 하나님의 인간 피조물이 하나님의 천사적 세력과 합세하여 자신들의 왕에게 영광을 돌리고 섬길 때가 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마태가 보기에 제자들의 삶 을 잠재적으로 개관한 것이고 (7:21; 12:50; 21:31은 비유로), 예수도 기도 가운데 자신의 뜻을 그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했다 (26:42).
마지막 말씀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앞의 세 문장 전체에 적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영광을 얻고 있으며, 하나님의 왕권이 인정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도 실현된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하나님의 하늘 정세가 땅에서도 반영되리라는 것이다. 이 기도의 누가 형태에서 첫 두 문장에 이 추가 부분이 없지만, 이것이 셋째 문장의 일부로 추가된 경우 이 추가 부분이 앞의 두 문장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역시 분명해 진다. 물론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왕권을 수용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11절 제자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원 중 첫째는 물질적 예비에 관한 것이다 (참고, 잠 30:8,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25–33절에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 갖는 의미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두고 하나님을 신뢰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 기원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이 신뢰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초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배급인 떡도 하나님이 매일 준비해서 얻게 되는 것이고 (참고, 시 104:14–15, 27–28), 그래서 당연한 일로 여기기보다 적절한 기도 주제가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인 “날마다”는 헬라어 형용사 ‘에피우시오스’를 가리키는데, 이는 현존 헬라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그 어원론과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었다. 고대 시리아 역본은 “지속적인” 혹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로 나오고, 초기 라틴어 역본에는 “날마다”로 나오지만,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역본은 ‘수페르숩스탄치알리스’(supersubstantialis) 라는 말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아마도 “초자연적인”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 해석자 중에 일부는 이를 ‘에피’와 ‘우시아’에서 파생시켜서 “실존을 위해 필요한”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일부는 ‘에피 텐 우산 (헤메란)’, 즉 “오늘을 위해”로 보고, 최근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를 ‘헤 에피우사 (헤메라)’로 형성된 형용사로 보려 한다. 이는 사도행전 7장 26절, 16장 11절, 20장 15절, 21장 18절에서 “다음 날”을 뜻한다 (사건 순서나 여행 단계에서). 이런 용례에서 ‘헤 에피우사’ 는 방금 기술한 날의 다음 날을 뜻한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헤 에피우사 뉙스’는 이어지는 밤을 뜻한다. 이 의미는 아마도 말하는 시간에 달린 것 같다. 아침의 ‘헤 에피우사’는 그때 시작하고 있는 같은 날을 말할 수 있지만 (고전적인 용례는 이를 지지한다), 그날 늦게는 “내일”을 의미할 수 있다. ‘에피우시오스’가 그 의미를 ‘헤 에피우사’(“다가오는 날에”) 에서 끌어낸 것이라면 같은 범위의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요구하는 떡은 가까운 미래를 위한 것이고, 이는 말하는 시간에 따라 “오늘”이나 “내일”일 수도 있다. 이 기원은 유대인 청중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한 일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만나는 날마다 한 번씩 충분한 양으로 공급되었고, 예외적으로 다음 날이 안식일일 때는 추가분을 받았다 (출 16:4–5).
“오늘” 이런 떡을 구하는 것은 일상의 예비를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현대 서구 문명에서는 식량 조달이 보통 사전에 적절한 시기에 계획하여 확정되고, 이렇게 즉시로 소요되는 경우는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도 세계 여러 지역에 그렇지 못한 곳이 존재하여, 아직도 예수가 살던 세계처럼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카슨 (171) 은 이렇게 떠올린다. “수많은 1세기 노동자는 삶이 위태로웠다. 매일 하루치 임금을 받았으며, 며칠 앓아눕는 것은 비극이었다.” 예수와 제자들도 비슷하게 순회 사역 중에 날마다 물질적 곤궁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없었다 (8:20; 10:9–14, 40–42를 보라). 25–33절에서 물질적 공급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이것도 대다수 현대 서구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은 이 기도가 요구하는 대로 모든 필요를 하나님에게 신뢰로 의탁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예수는 식량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스스로 해결할 문제로 처리하지 않았다 (4:3–4).
나는 지금까지 이 기원이 문자 그대로 매일의 물질적 필요에 대한 공급에 관련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주기도문의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는 자들은 “내일의 떡”이 종말론적 예비에 대한 생략된 표현이라고 보면서 이것이 특별히 메시아적 연회 (8:11 주석을 보라; 참고, 눅 14:15) 나 더 구체적으로는 만나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 (바룩2서 29:8; Sib. Or. 7:149; 계 2:17) 을 가리킨다고 본다. 일부는 이를 지지하면서 ‘에피우시오스’가 ‘헤 에피우사 (헤메라)’ 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사 ‘에피에나이’에서 직접 도출된 것이라고 보고, 그래서 “미래에” “도래하는” 것은 그날이 아니라 떡 자체라고 한다. 하그너 (1:144) 는 이 관점을 자신의 “해석적 의역”에서 표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종말론적 떡을 주시어서 그것이 미래에 우리 것이 되게 하소서”라고 한다. 하지만 전체 기도문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종말론적 의미는 이 기원의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그너의 의역은 실제 헬라어 어법에 많은 것을 추가시켰다!). “떡”은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나오는데, 심지어 문맥 때문에 문자 그대로의 떡으로 사용되면서 상징적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도 있고 (15:26; 16:5–12; 26:26), ‘에피우시오스’(언어학적으로 개연성이 큰 ‘헤 에피우사’에서 파생된 경우) 로 함의되는 일상의 차원은 문맥이 비문자적 의미를 암시하지 않는 한 이 의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떡이 “오늘”(그리고 심지어 누가복음은 한술 더 떠서 “매일”이라고 한다) 공급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종말론적 관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12절 이 기도에서 유일하게 용서를 기원하는 문장으로, 이 주제는 끝 (14–15절) 에서 다시 거론하여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의 요지는 문장 자체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에서 드러나듯이 용서가 상호적인 원리라는 말인데, 이는 18장 23–35절의 비유에서 더 충분히 강조될 주제다. 이 비유는 지금 나오는 기원과 마찬가지로 빚에 관한 것이지만, 18장 21–22절에 나오는 도입 질문과 답변은 빚이 용서받아야 할 범죄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서도 빚을 순수하게 금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배제되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에게 진 빚으로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14–15절에서 “잘못” 으로 대체한 것 (참고, 눅 11:4a는 “범죄”) 은 빚의 회화적 은유에 대한 단조롭지만 분명히 정확한 해석을 준다. 마태의 판본은 누가와 달리 한 문장의 전후반부에 같은 은유를 유지시켜서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 긴밀한 평행 관계가 유지되게 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채무가 아니라 채무자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개인적인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호스’(“–처럼”) 는 이 문장의 전후반부를 연결하는 것으로 우리 동료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엄밀하게 우리가 용서받는 선결 조건인지 여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 동사의 시제에 대해 사본이 다양한 것 (289쪽, 각주 255를 보라) 은 아마도 이 주제의 불확실성을 반영한 것 같은데,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것보다 먼저라는 점을 이 부정과거 시제가 적절히 지적하지만, 현재시제는 이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이 점에 정확을 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구한 용서가 기도하는 자의 태도에 반영되는지 여부다. 18장 23–25절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나오지만, 용서받은 사람이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 하나님의 용서가 철회된다. 그렇다면 용서에는 무언가 피할 수 없는 상호작용적 요인이 있는 셈이다. 용서받기를 구하면서 자신은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위선이다. 용서를 구하는 자는 잘못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J. 예레미야스319) 는 ‘아페카멘’(“우리가 용서했다”) 이 수행의 의미를 가진 아람어 완료를 대표한다고 본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하노라.” 헬라어 부정과거를 당연히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지만, 예레미야스의 해석은 이 기도 문장이 기도하는 자에게 초래할 일에 대한 관점에 적절한 도전이 되고 있다.
13절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기원한 후에 미래의 죄에서 보호를 구하는 기원이 나온다. 이 기도의 마지막 문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지만, 이번에는 두 행이 모두 기원이고 그 주제는 긴밀히 관련되어 있어서 둘째 기원은 첫째 기원의 확장이나 해설로 볼 수 있다. ‘투 포네루’를 “악한 자”로 번역한 것이 맞다면 (290쪽, 각주 257을 보라), 두 행 사이에 평행이 분명한 것은 이미 우리가 4장 1–11절에서 ‘페이라스모스’(“시험”) 를 마귀의 역할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실제로 “유혹자”[‘호 페이라존’]로 기술된다). 두 행 사이에 진행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시험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구하는 요구이고, 둘째는 첫째 요구가 불가능할 경우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 그러나 “들게 하지 마시옵고”나 “~에서 구하시옵소서” 같은 어구의 의미에 관심을 두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일 것이다. 둘 다 마귀가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함을 제자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는 생생한 인상을 준다.
하나님이 “ ‘페이라스모스’로 들게 한다”는 개념이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양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가끔 제기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실수가 연루되어 있다. 첫째, 부정적인 요청이 있다고 해서 그렇지 않을 경우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 기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절대로 나를 떠나지 마세요”라고 해도 반드시 아내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일은 아닌 것이다. 둘째, ‘페이라스모스’를 그 자체로 언제나 악한 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결국에는 성령이 예수를 “시험받도록”(4:1) 광야로 데려갔던 것이다. 야고보가 하나님이 “누구라도 유혹하지 않는다”(약 1:13) 고 말하면서 아마도 ‘페이라조’를 “잘못 행하도록 유혹한다”는 더 제한된 의미로 썼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시험한다”는 관념이 성경적인 관념이다 (창 22:1; 신 8:2 등). 여기서 ‘페이라조’를 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할 경우, 기원의 핵심은 시험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아는 제자들이 시험에 직면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322) 4장 1–11절처럼 같은 상황에서도 마귀의 “유혹”이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시험”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 기도의 기원이 주로 종말론적 초점을 갖는다고 이해하는 자들은 이 “시험”을 구체적인 사건, 곧 종말의 때를 시작하는 시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페이라스몬’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초점이 그렇게 구체적인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페이라스모스’는 이 관념과 관련하여 인식된 적 없는 용어다). 게다가 종말론적 완성을 기쁘게 기대하는 공동체는 이 “시련의 때”를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가 거의 어려운데, 이것 없이는 마지막 대단원이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의 기도는 오히려 이 시련을 겪으면서 안전하게 보존되기를 기원할 것이다 (13절의 첫 행이 아니라 둘째 행이 이에 해당). 전체 기도가 그렇듯이 이 기원은 종말론적 지시 대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법은 종말론을 주요 목표로 암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려고 하지만 이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제자들이 많다는 것은 시험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5장 11–12절에서 상상하는 박해의 종류가 떠오른다. 26장 41절에서 예수는 다시 제자들에게 ‘페이라스모스’에서 구원받도록 기도하면서 종말론적 위협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면한 위험을 언급한 것이다.
f. 주기도문에 대하여 (6:14–15)
여기에는 이 강화에 몇 개 없는 마가에 대한 반향이 나온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 기도와 관련하여 상호 용서라는 같은 원리를 보라. 12절 기저에 있는 이 원리를 이렇게 확대한 것은 마태가 갖는 전형적인 관심사를 반영하는데, 이 관심사는 특히 18장 1–35절의 강화에서 전개될 것이고 (참고, 5:23–24), 제자 공동체가 삶 가운데 하나님의 왕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가치가 변화를 겪은 집단으로서 적절하게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8장 23–35절에서 두 빚진 자의 비유라는 메시지를 간단한 제안 형태로 둔다. 26장 28절에서 예수는 죄의 용서를 자신의 사역의 중심에 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역의 결과로 나온 제자 공동체가 용서받은 자의 공동체이며 그렇게 기능해야 한다면, 그 구성원은 타인에게 용서를 선뜻 베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서 12절에 분명히 암시된 조건 요소는 꽤 분명해졌으며,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도 진술되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용서하는 자만 용서받을 것이다.
이 선포가 확실히 단순하기에 불편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 이 조건적 용서가 바울이 선포한 값없고 과분한 은혜의 복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가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버는 것인가? 같은 문제가 마태복음의 다른 곳, 특히 25장 31–46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의인”의 구원이 다른 궁핍한 사람을 향한 의인의 행실에 어느 정도나 의존하는지 숙고하게 된다. 이는 22장 1–14절의 비유에 깔끔하게 압축되었는데, 여기서는 분명하게 자격 없는 사람 (“악하든 선하든”) 이 혼인 잔치에 뽑혔고, 그럼에도 그중 한 사람이 후에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이 비유에 따르면 구원은 받을 자격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일 수 있지만,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18장 23–25절의 빚진 자처럼 은혜를 받은 자는 구원의 지속이 의존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죄의 용서가 예수의 구원하는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나 (26:28) 제자의 입장에서 적절히 용서하는 태도가 이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 성취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 “행위”에 의존한 구원 (“칭의”) 을 규정하느라 ‘디카이오쉬네’를 보다 “이론적으로” 사용한 것에 비해 마태가 같은 용어를 주로 윤리적인 용법으로 사용한 것이 이 구원 신학에 더 어울린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전통적인 모순을 두고 보면, 아마도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확실히 죄의 용서에 수반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20장 1–15절의 비유로 마태가 인간의 노력에 비례하여 얻는 구원이라는 잔인할 정도로 기계적인 관점에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둘째 문제는 요구되는 용서의 폭에 관한 것이다. 용서의 대상은 문자 그대로 “사람”으로 어떤 추가적인 한정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과 사람에는 제한이 없는 것인가? 전쟁 범죄, 연쇄 살인, 아동 학대도 용서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용서”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18장 21–22절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말하는데, 지금 예수는 용서에 한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18장 23–35절에 이어지는 비유는 왕이 탕감한 상상할 수 없이 큰 빚을 채무자에게 상대적으로 사소한 분량을 요구하는 것에 대조시킴으로써, 우리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은 죄의 무게에 비하면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범죄 중에 이에 비교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인간의 본질에는 맞지 않겠으나, 제자는 자신에게 범죄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본문에서 “나를 거슬려”라는 어구는 아마도 본문의 의도까지 알려 주는 것 같다. “사람”의 범죄를 말하는 것은 무척 객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본문의 기도문은 특별히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이라는 은유를 이용해서 설명한다 (12절). “용서”라는 관념이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은 사적인 범죄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는 악을 범한 자들은 우리의 믿음에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며 (가능한 최대한) 공감을 통해 이해받게 마련이지만, 제대로 표현하자면 이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본문이 관심을 두는 것은 18장 21–35절처럼 제자가 자신에게 범죄한 자에게 보이는 반응의 문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우리의 원수다 (5:44).
R. T. 프랜스, 마태복음, ed. 권대영, trans. 권대영와/과황의무, NICNT 시리즈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29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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