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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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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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튜브에 보면 외국인이지만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말을 잘 한다고 하지만 우리말의 속 뜻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굉장히 힘들어서 “크게 애를 먹었다.”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니까 ‘아이를 어떻게 먹냐?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너는 왜 이리 애를 태우니?”라는 말을 들으면 ‘아니, 애를 먹어도 아예 태워서 먹나?’ 하며 깜짝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다 그 안에 속뜻이 있어서 겉으로 문법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한국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그런 한국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언어를 그냥 아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뭔가가 더 있어야 이해가 갑니다. 문화를 알아야 하고 생활방식을 알 때 이해가 갑니다.
이와 굉장히 비슷하게,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읽는데,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느냐 하면, 성경책을 한 권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한 권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66권의 다른 책들을 모은 모음집입니다. 그것도 약 1500년에 걸쳐서 40여 명의 저자가 기록한 책들을 모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읽으면 잘못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특히 외국인과 같은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착각하여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하며 성경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열고 풀어주는 열쇠가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배경지식과 또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 공부하고 알아야 이해를 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럼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주셨을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부터 이 문제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다 (13~16절)
어떤 면으로 보면,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은 믿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야.”라고 하며 그리스도인이다, 아니다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아무것도 안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뭔가를 믿고 있습니다.
“난 예수를 안 믿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를 안 믿는 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구주가 아니다.’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어? 신이 어디 있어? 이 세상은 다 우연히 된 거지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신이 없다.’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음입니다.
또 성경의 기적 사건들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기적들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선택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해서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믿기로 선택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나는 예수를 안 믿어.”가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구세주가 아니다.’라는 것을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믿느냐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아니, 이 세상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저도 어릴 때 교회를 다니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가 율법을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오늘 본문에서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때는 아직 율법이 없었고, 이때로부터 430년 후나 되어서야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400~500년 차이가 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김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율법 언어’와 ‘약속 언어’입니다. ‘율법 언어’는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라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를 먼저 요구합니다. 반면, ‘약속 언어’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해줄게. 그것을 받아들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네가 율법을 잘 지키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니, 너는 내가 주는 이 약속을 받아들여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자녀인 분들도 있고 자녀가 있는 분들도 있는데, 만일 내가 자녀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적힌 리스트를 주면서 “야, 여기 내가 적은 대로 네가 다 해야만 너는 내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율법 언어’입니다. “너는 이것을 해야 내 자녀가 될 수 있어. 아니면 안 돼.”라고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고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부모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진짜 부모라면 그러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제대로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어떻게 자식에게 “너, 이거 해야 내 자녀가 될 수 있어.”라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널 사랑한단다. 그래서 네게 유익이 되는 것들만 내가 해줄게. 그것을 잘 기억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약속 언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을 베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중에 병원에서 태어나자마자 앞뒤좌우를 살피면서 ‘아, 이 사람이 내 엄마, 이 사람은 내 아빠, 저 사람은 의사구나.’라고 하며 자기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저 의사는 내 아빠(엄마)가 아니야. 이분들이 내 부모님이야.’라고 자기 아빠 엄마를 부모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기 부모님이 부모님인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진짜 내 부모님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내가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무엇보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당신들과 닮았다고 하고, 사진도 보여주고, 출생증명서도 보여주면, 그런 것을 보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다 보고 확인한 다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해주셨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그 사랑에 대한 증명 서류로서 주신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또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우리 인간도 사랑과 희생과 진실함과 의로움 등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알려주는 성경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구원받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로 믿었느냐입니다. 진짜 믿은 게 아닌 경우는 곤란하지만, 예수님을 정말로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맞아들였다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 영생의 선물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만, 살다 보면 죄를 지을 때도 있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기 때문에 내가 혹시 구원받지 못했나 하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 내가 한 일은 없습니다. 이미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사실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대신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 신실한 아들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구원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해 좋은 자녀로 사느냐, 나쁜 자녀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2.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 -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 (17~25절)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믿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창세기 12장에 보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이고, 창세기 15장에 보면 “너의 후손을 통해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해주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그런 약속을 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가 되었습니다. 75세에 처음 부르심을 받고 이제 100세가 되었는데, 아내인 사라도 아기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90세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럼 둘 다 이제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의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너무나 놀랍게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19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19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알고도’입니다. 이 단어가 해석의 열쇠입니다. 이것은 자신과 사라가 이미 죽은 자와 다름없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후사도 없고, 앞으로도 생길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불가능한 문제를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알고도’라는 말은 회피하지 않고 직면했다는 말입니다. 문제 앞에서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99세일 때 오셔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원래 이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자녀라고는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 한 명뿐인데, 이제는 이름을 그냥 ‘큰 아비’ 정도가 아니라 ‘많은 민족들의 아비’로 바꾸라고 하시니까, 그것을 믿는 것은 둘째 치고 다른 사람들 보기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사람들 앞에서 감추고 싶은 것, 되도록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은 어떤 약점이나 열등감이 있지 않습니까? 경제적 문제일 수도 있고, 부부간의 갈등일 수도 있고, 고부 갈등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 약점이나 상처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가 나오면 슬쩍 언급을 회피하거나 말을 돌리는 것이 누구나 가진 마음입니다. 그런 비슷한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슬그머니 다른 데로 말을 돌리거나, 그게 안 되는 것 같으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우리의 본능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문제를 감추지 않고 회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주셨다.” 지금 자녀가 첩에게서 나온 서자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오히려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 내겐 상속자가 될 아들이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께서 준다고 하셨으니까 분명히 언젠가는 나에게도 아들이 생길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후손이 많이 나올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렇게 그냥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심각한 현실을 바로 직면할 수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보이진 않지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자기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는 어려운 것이 없지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하신 분이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을 왜 못하시겠나 생각한 겁니다. 너무나 놀라운 믿음이 아닙니까?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안목으로 보면 지금의 고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인 것을 믿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2절)
의로 여겨졌다는 것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 말은 쉽게 요즘 말로 하면 성경을 맨 앞 창세기부터 맨 끝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다 지키는 사람으로 봐주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다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 때문에 그런 사람으로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놀라운 결론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3-25절)
우리는 원래 아브라함과 전혀 비슷하지도 않고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생기기 훨씬 전에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의 조상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랍 사람들의 조상도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세상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별로 관련이 없고, 특히 우리 같은 아시안 계통이 아브라함과 무슨 그렇게 큰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또한 전혀 의롭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리키시며 “너는 아브라함과 똑같다. 아브라함과 똑같이 의롭다.”라고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하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아주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위에 아무도 안 계세요? 사람 살려!” 그러자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여기 있다. 너는 나를 믿느냐?” “예, 주님,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하겠습니다. 빨리 잡아주세요.” “괜찮다. 네가 나를 정말 신뢰한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구해주겠다. 이제 네가 잡고 있는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러자 이 사람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다시 외쳤습니다. “그 위에 다른 분은 안 계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우리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느낌일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려움을 계속 묵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묵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뉴스를 묵상합니다. 굉장히 열심히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묵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고통 중에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고통을 좀 없애주시거나 아예 안 오게 해주시면 좋겠는데, 때로는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 그것을 이기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약속의 말씀에 나와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상황을 보면서 한탄하고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믿음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뭐, 믿어 봐야 소용없네. 기도해 봤자 소용없네.”라고 하며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회피하거나 대강 덮어두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약속을 주신 능력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욱 붙들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비록 현실을 보면 너무 힘들지만, 내가 현재 어떤 문제가 있어서 혹시 실패한다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 앞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나를 위한 선한 계획이 분명히 있으시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올수록 더 하나님을 찾고 더 하나님을 붙들며, 개인적으로 기도와 말씀에 힘쓰면서 새벽 기도라든지 또 이런 예배를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으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며 우리의 눈이 하나님께 자꾸 초점을 맞출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시는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와 말씀과 예배에 집중하며 나갈 때, 지금 상황은 어려워도 그 위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안 바뀌었어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지, 억지로 율법처럼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인데 “무조건 가라. 괜찮다, 무조건 가라. 뭐, 떨어져 죽어도 할 수 없지. 그냥 가라.”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으면 이해가 가지 않고 ‘이리로 가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믿고 발을 내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도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믿음에 대한 상은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처럼 믿음의 걸음을 담대하게 내딛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믿음의 기적이 우리 삶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