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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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과 거룩함
음란과 거룩함
오늘 본문말씀인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함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3-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그리스-로마시대에서는 매춘부나 노예와의 성관계가 허용되었던 사회였습니다. 특히 로마법 상으로는 혼전 성관계가 상류층 여성과의 관계만 제외하고는 전부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곧 성경이었던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혼전에 갖는 모든 성관계는 금지된 것이고, 혹시라도 결혼 전에 성적인 관계를 맺었으면 반드시 결혼을 해서 아내로 삼으라고 나와있습니다. 게다가 특히나 간음, 그러니까 이미 결혼한 사람과 갖는 성관계와 간통에 경우에는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준하는 죄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이야기하는 성생활은 일반적인 사회와 도덕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고 성경과 율법이 정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의 기준처럼 결혼하고 나서도 매춘부나 노예들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기준으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사랑하기에 힘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유대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을 모두 포함하는데요,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지난 주에 이주혜 전도사님이 전해주셨던 바와 같이 이방인들을 포함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많이 섞여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어서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는 공동체원이라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 보시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기준이 할례나 율법이나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할례, 즉 회개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들이 진짜 형제자매들이다라는 것을 바울은 항상 강조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나 율법주의를 기피해왔는데 오늘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성생활과 관련된 내용이나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 등장하는 성과 관련된 권면의 내용을 보면 꽤나 바울은 율법에 기반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간음, 간통죄, 즉 남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아주 중죄인 사항입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성적인 생활에 대해서 딱히 터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요즘의 법과 사회적인 시선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그 사회의 도덕과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덕목의 기준이 바울이 그렇게 기피했던 율법이라고하니까 조금 인지 부조화가 오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먼저 바울이 여기서 음란과 색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저희가 알아야합니다. 3-4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여기서 거룩함과 음란이 대조되고 있구요, 자신의 아내를 대하기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결론적으로는 율법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혼전 성관계를 맺지 마라, 결혼하고 나서 간음하지 마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기반은 율법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특히 모세 율법인 신명기에 22장에 보시면 13절로 30절까지 성생활과 관련된 법이 나오는데요, 한번 직접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내용이 다 “이렇게 하면 죽여라, 저렇게 하면 죽여라”라고 아주 살벌한 내용들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이 “죽여라”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해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거룩함이나 사랑이 바로 드러난다기 보다는 딱딱한 법조문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법조문과 같이 딱딱한 어조로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거룩하라,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고 기뻐하시는 이는 하나님
심판하시고 기뻐하시는 이는 하나님
본문말씀 1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더욱 많이 힘쓰라”라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율법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나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다들 아시죠? 율법주의자들은 “처벌”하는 것에 힘쓰고 담임목사님이 여러번 말씀 전하신 것처럼 “겉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11절에 등장하는 말씀처럼 조용히 자기 할일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그래서 두번째로, 바울이 6절에 보시면,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이는 율법주의자들처럼 혹여나 간음한 사람을 발견하면 “사형! 사형!”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신다, 라고 표현을 하는데요, 이 신원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한을 풀어주다”라는 뜻인데, 원래 헬라어는 “ἔκδικος(엑디코스)”라고 하는 단어로 “복수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6절을 조금더 헬라어 원문에 맞게 해석하면, “주님께서 이 일에 복수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괜히 복수하겠다고 가서 죽이지 말라”라고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간음하고 부정하게 되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에 적힌 대로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절부터 8절까지 쭈욱 이어지는 “성”과 관련한 바울의 권면은 비단 “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반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는 “율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저희들이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에 저희가 힘써야한다 라고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거룩함을 저버리게 되면 단순히 사람에게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힘쓰고, 만약에 형제자매 중에 그러한 범죄한 자가 있거든 율법처럼 “내가 가서 죽일거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저희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단순히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9-10절을 보시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칭찬할 정도로 서로간에 사랑하기에 힘썼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더욱 그렇게 행하라, 더욱 힘쓰라 라고 하면서 지금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잃지 말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남에게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희 스스로가 직접 해야하는 행위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제가 아마 고린고전후서 전해드릴 때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바울이 직접 노동을 했던 일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몇몇 부유한 사람들이 바울을 무시하고 경멸했던 일이 있었다고 말씀 드린적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돈이 많고 권력이 높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로 하여금 노동하고 직접 힘써 일하는 일을 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접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절도 보시면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한다고 했는데,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을 보시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게 하려한다”라고 번역하는게 좀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부유한 교인이든, 가난한 교인이든 서로에게 의존해서 부자들은 “저 돈 못버는 교인들에게 우리가 돈으로 후원해서 나 대신 좋은 일 하게끔 해야지”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가난한 교인들은 “저 부자들이 후원을 좀 해줘야 내가 일할 수 있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써야한다고 사도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나의 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제가 만안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지가 어느덧 4개월 정도가 되어가는데요, 제가 부임하고 나서 참 많이 눈물로 사역을 해온 것 같습니다. 몸이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마음이 많이 힘들때가 많았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저도 그렇고 이주혜 전도사님도 그렇고 풀타임 전도사로 근무하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고, 저는 특히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오게 되면서 한국 교회에서 사역을 안한지가 3년이 넘은 상태였기 때문에 적응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저는 처음 교회 사역이라는 것을 시작했던 19살 간사로 사역했던 시절부터, 5-7살 유치원 다니는 어린 아이들 30명 앞에서 처음 설교를 했을 때, 대인기피증 때문에 어떻게든 꾹 참고 설교를 마치고 나서 화장실로 달려가서는 먹은거 안먹은거 다 게워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해서는 하나님께서 저를 아주아주 많이 성장시켜주셨구나 라는 마음도 들지만, 성장은 항상 아픔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만안교회에 와서 제가 담당하는 대다수의 일들이 다 처음겪는 일이기도 하고, 가끔은 제가 목사안수도 안받았는데 부목사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만큼 몸이 힘든 것보다도 처음 겪고 해보는 일들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컸어서 저랑 이주혜 전도사님이랑 부둥켜 안고 막 울었던 날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얼핏 보면 오늘 본문 말씀이 “일해라 더 일해라, 아직은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이 말씀이 은혜가 되었던 것은 저희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손으로 일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전까지는 저 또한 많이 성장해오기도 했지만 저를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제가 간사시절에 전도사님 한분은 “야 너 같은 간사는 처음봤어, 어린이부 애기 한명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것 같아”라고 하실 정도로 제가 참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해왔다면,
이제는 제가 제 손으로 할 일을 찾아나가면서 사역을 해나가다 보니까, 만안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교회 내의 많은 부분들을 알아가고 섬기고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면서 감사함으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잘하는 지 못하는 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에 저희가 저희 손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저희가 날마다 거룩하기를 힘쓰는 것은 “내가 이렇게 잘났어, 내가 이만큼 열심히 하는 걸 알아봐줘”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를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희 손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