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한 분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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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나 4:1-5
“하나님의 긍휼”
2024. 12. 13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하나님의 긍휼”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선교 사역을 다 마치고 난 직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단락인데요. 사실 요나서는 3장까지만 있으면 완벽한 스토리가 됩니다. 1장에서 불순종하여 바다에 던져졌던 요나가 큰 물고기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2장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3장에서 마침내 순종함으로 니느웨를 구원하게 되는 완벽한 스토리가 돼요.
그런데 거기서 끝이 나지 않고, 뒤에 4장이 이어진다는 것이죠. 이 4장 때문에 스토리가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요나가 비록 불성실한 사역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결과 니느웨가 재앙을 면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역의 열매에 대해서 요나가 기뻐하기는커녕,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해요.
오늘 본문 1절을 봐 볼까요? 1절에 보니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느닷없이 요나가 화를 내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먼저 “성내다”라는 말을 살펴보면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라” 라는 말입니다. 하라. 이 말은 “분노하다, 불이 붙다” 이런 뜻이에요. 너무나 화가 나서 마치 불이 붙는 듯이 뜨겁게 화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 창세기 4장에 처음 쓰였는데요.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어요. 그때 아벨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여기서 “분하여” 라는 말이 바로 히브리어 “하라” 입니다. 불이 붙듯이 머리가 뜨겁도록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이 그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벨을 죽여버리잖아요. 지금 요나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사리판단이 안 될 정도로 분노가 타오르고 있어요.
그리고 1절을 다시 보면, “매우 싫어하고” 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라아 가돌” 이라는 말입니다. 라아 가돌. 두 개의 단어예요. “라아”는 “악하다, 나쁘다” 라는 말이고, “가돌”은 “크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크게 악하다” 라는 말이 됩니다. 지금 요나의 마음 상태가 크게 악한 상태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 단어들 중에 “라아” 라는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요. 라아. “악하다” 이 말이 요나서에 총 일곱 번 등장합니다. 그 중에 맨 먼저 1장 2절에서 나왔었어요. 요나서 1장 2절을 한번 봐 볼까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 악독이 바로 “라아”입니다. 라아를 여기서는 악독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본래 이 악독은 니느웨의 것이었습니다. 그 악독이 어찌나 심각한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입장이 반대가 됐어요. 니느웨가 아니라 요나가 악독의 주인이 됐습니다. 반면에 니느웨는요, 악한 길에서 돌이켰죠. 오늘 본문 바로 앞에 3장 10절을 봐 볼까요? 요나서 3장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아멘.
니느웨가 철저히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악한 길에서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어요. 여기서 재앙도 똑같이 “라아” 라는 말이에요. 라아에 재앙이라는 뜻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니느웨가 ‘라아’에서 돌이키자, 하나님도 ‘라아’를 내리지 않으셨어요. 니느웨도 라아를 돌이키고, 하나님도 라아를 돌이키신 겁니다.
그런데 이 라아가 뜻밖에도 요나에게서 표출이 되는 거예요. 니느웨가 버린 악독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갖게 된 겁니다. 그것도 그냥 악독이 아니라, 큰 악독이에요. 라아 가돌. 큰 악독으로 말미암아 불이 붙는 듯이 성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니느웨는 악독으로 인해서 재앙을 받을 운명이었어요. 그러면 그보다 심한, 큰 악독에는 얼마나 큰 재앙이 내려야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니느웨에 예정되었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요나가 회개를 해야 될 입장이 됐습니다. 이 큰 악독을 돌이키지 않으면 요나가 재앙을 받을 상황이에요. 그러나 요나가 안타깝게도 회개를 하지 않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 요나가 뭐라고 원망을 하는지 볼까요?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가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나오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혹시나 니느웨가 회개하여 재앙을 피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이러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는 거예요. 자기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면, 그 뒤에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는 것이죠. 니느웨가 어떻게 될까?
그런데 시뮬레이션 결과, 니느웨가 회개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는? 니느웨가 회개를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그랬더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결과가 나오는 거죠. 만에 하나, 니느웨가 회개를 해버린다면,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재앙을 돌이키신다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감사할 일입니다. 절대로 화를 낼 일이 아니에요. 화를 내면 그게 미친놈이죠. 그런데 요나는 지금 화를 내고 있어요. 미친놈이에요.
그런데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제대로 미친놈입니다. 밑에 3절 말씀 봐 볼까요? 오늘 본문 3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가 제대로 미쳤죠.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고 요청을 해요. ‘나를 그냥 죽여주십시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요? 선지자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하나님께 나를 죽여달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요. 모세, 엘리야, 욥, 예레미야. 이렇게 네 사람이 대표적인데요. 이중에 모세와 엘리야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나를 죽여달라고 말을 했고, 욥과 예레미야는 간접적으로,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표현만 다르지, 사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너무나 힘들어서 더는 살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말이에요.
모세, 엘리야, 욥, 예레미야. 이 사람들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었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 엘리야는 백성들의 심령을 일깨우는 사명, 욥은 고난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명,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사명.
이처럼 각자 맡은 사명이 달랐어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대에 가장 신실하고 가장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실한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요? 나를 죽여주십시오…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절망의 소리, 저주의 소리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자기를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소망이 없는 고난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는 어떻습니까? 요나도 분명히 당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신실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됐겠죠.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요나가 저들과 같은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그들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가 모세, 엘리야, 욥, 예레미야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 회개는 곧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겁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욥이나 예레미야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서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내기는 했지만, 그 뒤에는 모두 회개했습니다.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무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어요. 니느웨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니느웨를 죽이고자 하는 나의 뜻이 충돌할 때, 조금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나의 뜻을 주장했습니다.
비록 그가 요나서 3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가 회개를 했던 것은 아니에요. 여전히 그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래서 굉장히 불성실하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사흘 동안 외쳐야 되는 것을 하루만 외쳤고, 심지어 그것도 니느웨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히브리어로 외쳤어요.
마지못해 순종하면서 그나마도 마음에 악독을 품은 채로 한 겁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마음에 악독을 품고 해요.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도록 악독한 마음을 품고, 불성실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요나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앞세우는 것.
그런데 이렇게나 요나가 악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정말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셔요. 요나의 이 악독 앞에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요나를 타이르셔요.
자, 오늘 본문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4절 시작,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아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죠. ‘요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지 않으니까 다시 생각해 봐라.’ 이런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히 요나가 다시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만한 믿음과 지혜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다시 생각하고 회개할 수 있어요.
엄마들이 자기 자식에 대해서 이런 말을 많이 하죠.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안 좋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머리가 안 좋습니다.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고, 머리가 안 좋은데 공부까지 안 하니까 성적이 안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데는 정말로 머리가 좋은 아이들도 있어요. 아이큐가 140, 150. 머리는 정말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오는 아이들.
요나가 딱 그런 케이스인 거예요. 믿음은 좋아요. 믿음은 좋은데, 자기의 뜻을 꺾지 않아요. 그래서 회개를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요나가 믿음은 좋은데, 자기의 뜻을 꺾지 않는 겁니다.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회개를 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요나를 타이르면서 기회를 주는 거예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뜻을 주장하면서 악독을 품고, 나를 죽여달라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요나에게 분노하시기보다, 요나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어요. 그런데 요나가 그 기회를 어떻게 해요? 발로 걷어차버려요. 오늘 본문 5절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같이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하나님이 타이르시는 말씀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니느웨 성을 나갔어요. 그것도 성읍 동쪽으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서 앉았다는 말은,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되거든요.
지도를 한번 봐 볼까요? 지도를 보면요. 가운데 요나가 배를 탄 욥바가 있고, 저 서쪽에 요나가 본래 가려고 했던 다시스가 있어요. 그리고 동쪽에 니느웨가 있습니다. 지금 요나가 니느웨에 있는데,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면 서쪽으로 나와서 밑으로 쭉 내려와야 돼요. 그런데 서쪽이 아니라 반대편, 니느웨 동쪽으로 가서 앉은 겁니다. 이거는 고향에 안 돌아가겠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초막을 지었죠. 니느웨 동쪽은 황량한 광얍니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축재료라 봐야 나뭇가지 몇 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마도 나뭇가지를 세우고 그 위에 자기 겉옷을 덮어서 임시 텐트를 만들었을 거예요. 바람 한번 훅 불면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텐트. 그걸 만들어서 그 밑에 앉은 겁니다.
여러분, 요나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역 마쳤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지, 오히려 고향에서 더 먼 곳으로 가서 텐트를 만들고 거기 눌러앉은 이유가 뭐예요?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죠.
그 성읍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이미 니느웨가 회개를 해서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도 재앙을 기다려보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요나의 심리를 잘 알아야 됩니다. 요나가 언제 동쪽으로 갔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직후에 동쪽으로 갔어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동쪽에 가서 앉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부모가 아들에게 ‘너 잘못했어? 안 했어?’ 하고 혼을 냈을 때, 아들이 집에 안 들어오고 놀이터에 가서 앉아 있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 아들의 의도가 뭐겠습니까? 부모에게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거잖아요. 그것을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요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라고 하셨을 때, “내가 성내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시위하는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에 재앙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눌러앉은 겁니다. 재앙을 내려달라고.
요나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옳아요. 자기가 생각할 때, 니느웨는 악한 민족이거든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면, 악한 민족은 반드시 멸망해야 됩니다.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했듯이, 니느웨도 그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니느웨도 멸망당해야 돼요.
요나가 지금 억지주장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하는 거예요. 정당한 주장이죠. ‘니느웨는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악한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재앙을 내려주십시오.’ 이것을 지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요나의 행동이 옳은 행동입니까? 아니면 정당한 행동입니까? 악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공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요나의 행동이 정당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악은 벌을 받아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요나 역시도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요나도 지금 악하기 때문에. 니느웨가 가졌던 것보다 더 큰 악독이 지금 요나에게 있어요. 그러면 당연히 요나도 벌을 받아야겠죠.
그런데 요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해요.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요나가 성을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을 내시는 것이 옳아요. 만약에 저같았으면 당장에 요나를 작살을 냈을 겁니다. ‘어디 싸가지 없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대통령도 지금 탄핵을 시킬까 말까 하는 마당에, 요나 탄핵! 요나 아웃!’
이러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이방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봐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옳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했지만, 사실은 내가 틀렸고, 그 사람이 맞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됩니다. 나의 뜻을 앞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고. 혹시라도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에는, 미련없이 나의 뜻을 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천하의 모든 지식이 나에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잘 말씀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사람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지혜롭게 계획하고 뜻을 세워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버려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에 이게 맞고, 이게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겁니다.
모세, 엘리야, 욥, 예레미야. 각자 자기 뜻이 있고, 자기 생각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거두어 가시라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결국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아무리 힘들고, 절망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요나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공의에 앞서서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긍휼이라는 거예요. 죽어가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비록 그가 나의 원수이고, 그가 백번 죽어야 마땅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를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우리를 살리셨잖아요. 우리보다 지혜로우시고 우리보다 강하신 분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긍휼보다 공의를 앞세울 수 있겠습니까?
긍휼은 곧 사랑이에요.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에베소교회가 칭찬 받을 일이 많았음에도,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신 이유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어요.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교회를 없애버린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말씀을 잘 가르치고, 말씀을 잘 지켜도, 사랑이 없다면 그 교회는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는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고,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인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형제에게, 이웃에게, 그리고 원수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