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저주로 변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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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이 저주로 변할때
[서론]
여러분, 안전과 사고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하인리히의 법칙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법칙에 따르면, 큰 재앙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전에 작은 사고와 무시된 경고들이 반복되다가 결국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형 화재가 발생하기 전에 작은 누전이나 경고음 같은 신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괜찮겠지" 하며 지나쳐버린 것이죠.
그러다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고들이 바로 이러한 하인리히의 법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수년전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도 그렇고, 성수대교 붕괴도 그렇습니다.
참 기억하기조차 싫은 큰 사고였습니다.
삼풍백화점도 부실공사로 인해 잦은 균열과 소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라도 제대로 점검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데 그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수대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근의 균열들이 있다는 것이 보고되었지만 적절한 보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더 중요한 문제들, 즉 삶의 변화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그 "안전한" 신앙생활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의 신앙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안전한 것인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1절입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을 덮칩니다.
설령 거기서 살아남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칼에 맞아 죽을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할점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장소입니다.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성전을 무너뜨리시다니 어찌된 일일까요?
당시 사람들의 삶은 성전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을 단순히 축복과 안전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에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복을 얻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리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들의 종교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삶은 변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종교행위만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그들을 구원할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이 오면 어디에 있겠다고 말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곳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교회가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바로 심판의 장소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은 삶의 변화가 없는 빈 껍데기같은 예배와 기도를 혐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다니는 것 자체나 종교적 열심 자체가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의 예배, 삶의 제물입니다.
2-4절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든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피할수 없습니다.
땅으로 숨든지, 하늘로 숨든지, 산 꼭대기에 숨든지, 바다 밑바닥에 숨든지 하나님은 찾아내셔서 심판하십니다.
심지어 적군에게 끌려가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 의지가 그만큼 강하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시편 139편 7-10절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이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늘에 있어도 땅속 깊은 곳에 있어도 바다 끝에 있어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붙들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험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축복이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쫓아오셔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축복이 저주로 변해버린 것일까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행위에만 집중한채,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잊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을 축복만 구하며 이웃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마땅히 해야할 사랑과 정의의 삶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아이구 우리 은상이 살아있는 동안 예배를 수천번 드렸구나. 기도 시간이 1만시간을 넘었구나. 말씀묵상도 하루도 안 빼먹고 했구나. 찬양할때 눈물도 흘리고, 고백도 엄청했지? 그러실까요?”
하나님의 기준은 한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입니다.
얼마나 주위를 돌아보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았는지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모습들을 보고 공정하게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악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리 그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때가서 아무리 주장해봤자 변명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5-6절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 두려움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땅과 하늘과 바다를 움직이시고 조정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곳에 피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애쓴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고, 공정한 보응이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쇼킹한 소식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드린 수많은 예배와 종교적 열심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허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깨달아봤자 늦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나 에티오피아 사람들이나 다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일과 블레셋, 시리아에게 행하신 일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하신 일이 같을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구원받은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잘나거나 이뻐서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푸신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그들에게는 선민의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민족적 우월감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똑같습니다.
그들이 모두 비슷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죄짓는 너희들이나 이방민족이나 다른게 뭐냐?
‘예배만 드린다고 다 내 백성이냐?’
분명 하나님이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보잘것없는 노예였던 민족을 선택하시고 구원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렇게나 살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특권에는 분명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합니다.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국민들이 뽑았기 때문에 그들은 큰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보통국민들이 누릴수 없는 불체포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특권을 누릴수 것은 그만큼 큰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 특권은 주어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큰 특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나 그 특권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만 믿는다고 다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 다니고 예배드린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죽어서 천국가는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특권은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에 있습니다.
8-9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 민족들과 아무 차이가 없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정의입니다.
죄를 짓는데 계속해서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도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모두 멸하지는 않으십니다.
남은자를 두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곡식을 체질하여 돌멩이를 날려버리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곡을 남겨 회복을 위한 일말의 소망을 남겨두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복을 위한 심판이지 멸망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다른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그게 끝이 아닙니다.
11-15절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심판하시지만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남은 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회복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고치고 일으켜 세워 다시 지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초막이란 단순히 다윗왕 때의 번영을 되찾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윗의 궁궐이나 다윗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초막은 주로 광야시절을 의미합니다.
광야시절처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과 동행하던 삶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윗왕 시절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살아 숨쉬는 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미래에 이뤄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12-15절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모든 민족이 돌아와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에돔 족속의 남은 자와 하나님께 속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온 세상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때가 옵니다.
또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면 저주받았던 땅들이 회복됩니다.
거름진 땅으로 인해 풍성한 곡식, 열매를 얻게 됩니다.
사로잡혀 갔던 백성들은 돌아와 다시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요롭고 평안한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과 사회 정의가 회복된 삶을 보여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깊이 돌아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형식적인 예배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삶의 예배, 변화된 삶입니다.
혹시 우리 중 신앙생활이 종교적 관습이나 습관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껍데기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성 있는 예배가 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열매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특권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를 실천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한해가 저물고 있는 이번 한 주, 주변을 돌아보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