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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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이 곳에 모인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날씨가 덥다 덥다 하지만 요즘 더워도 너무 덥지 않으세요? 밖에서 불과 몇 발자국 걸어도 땀이 날 정도로 열기가 굉장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지금도 더우세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굉장히 시원하지요? 그야말로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 아닌가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음은 주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아멘. 제가 바라기는 졸려도 조금 참고 함께 말씀을 나눠 봤으면 좋겠는데요, 분위기 환기를 위해서 잠시 제 여담을 말씀 드리면, 청년 때 교회에서 청년들끼리 놀러 갈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날씨도 굉장히 더웠는데요, 더운데 있다가 시원한 차 안에 들어오니까 친구들이 졸렸나 봐요, 그래서 하나 둘씩 자더라고요, 그런데 전 운전을 하고 있었거든요. 이게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나도 피곤하고 졸린데 저 빼고 다 자니까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에어컨을 끄고 히터를 틀고 시트 열선도 다 켰습니다. 물론 저도 같이 더워 지지만 옆에 자는 애들이 너무 보기 싫은 거예요. 한 5분쯤 잤을까요? 애들이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 일어 나더라구요.
혹시 성도님들도 너무 졸리시면 저한테 살짝 싸인을 주세요, 그럼 제가 가서 옆에 있는 선풍기를 조용히 꺼드리겠습니다. 그럴 일 없겠죠? 아멘.
본론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아주 익숙한 본문이지요? 저는 특별히 성인이 되었을때 보다 어렸을 때 주일 학교나, 청소년부 시절 많이 접했던 설교 본문 이였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에서는 달란트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본문의 내용도 달란트를 중심으로 이뤄 집니다. 달란트를 주고 받고 장사하고 땅에 묻고 또 뺏으며 이야기를 열고 닫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달란트의 비유를 어떻게 알고 계실까요? 아마도 조금의 차이는 있으실 거라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은 저와 함께 늘 그래 왔듯이 예수님 당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당시의 청중들의 입장이 되어 볼 텐데요, 그러기 위해선 먼저 당시 화폐의 단위부터 알아야 겠죠.
(화폐 표 사진)
자, 지금 보시는 화면에 당시 화폐의 단위를 정리해 봤는데요. 제일 오른쪽이 가장 작은 단위인 렙돈이고, 왼쪽으로 가면서 점점 단위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끝에 달란트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해서 1달란트는 약 10억 정도 한다고 해요. 물론 학자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보시면 밑에 글씨로 [세겔]이 나오는데, 세겔은 보시는 것과 같이 성전 안에서만 통용되던 유대인들만의 화폐이고요, 드라크마는 그리스 지역에서만 쓰였던 화폐로 1데나리온, 그러니까 일용직 잡부의 하루 일당인 15~18만원 정도의 가치라고 합니다.
달란트 이야기를 해서 말인데, 성도님들 달란트 시장 아시죠? 교회에서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달란트 시장을 열잖아요, 성경학교 할 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평소 주일날 말씀도 외우고, 공과 공부를 하면서 선생님이 조금씩 주셨던 달란트로 공책도 사고, 떡볶이 사 먹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앞에 보이는 표를 보면서 기억을 떠올리면요, 달란트 시장에서 친구들에게 얼마에 팔았는지 아세요? 제 경험으론 연필 한 자루가 2달란트 그러니까 20억 했던 거 같고요, 공책 한 권이 4달란트로 약 40억 했던 거 같아요.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습니다.
네, 아무튼 당시 화폐의 단위는 이랬습니다. / 그리고 본문 말씀에 주인이 종에게 돈을 맡기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미쉬나 기록을 보면 당시 문화엔 프로스불 제도라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돈을 빌려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돈을 빌려 쓰는 종들은 소작농에서 전락한 농노라던가 노예들이 해당 되었는데요,
오늘 함께 나눌 말씀에 나오는 종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종들. 그러니까 노예들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그럼 말씀을 함께 보시면서 나눠 보겠습니다. 먼저 14절부터 15절을 보겠습니다.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말씀에 등장한 이 주인은 실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부자는 현금 10억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에 속한다고 하는데, 지금 이 주인은 종들에게 총 80억을 주고 있습니다.
어마 어마한 액수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건, 당시 소작농에서 전락한 농노와 노예들이 이 큰 금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았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로또가 한참 유행인 시절에 재밌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어요, 아마 성도님들도 저와 같은 상상을 해보신 분이 계실거예요. “만약 내가 로또 1등에 당첨이 된다면 난 OO를 할거야” 해보셨나요? (없을시, 음... 여기 계신 분들은 저 빼고 다 MBTI가 T 신가 보네요)
자, 제가 1등에 당첨이 된다면 뭘 한다고 했을까요? 저는 “은행에 다 넣어서 이자를 받을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걸로 사업을 해서 돈을 불려야지” 라고 하시던 분들도 계셨구요. 아무튼 돈도 써본 사람이 돈 쓸 줄 안다고 종들도 저와 같았을 거예요.
기껏 소작농 하던 사람이 농노와 노예로 전락했는데, 50억, 20억, 10억이 손에 쥐어줬다 한들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았겠습니까? 몰랐을 거예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6절부터 17절까지 보겠습니다.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자, 말씀에 종들은 장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장사를 할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상업이 발달하지 않던 사회였어요. 더군다나 노예 신분으로 그 큰 비용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종들은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장사를 했다고 하니,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 들인 게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볼까요, 18절을 보겠습니다.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여기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었다고 하는데요, 이게 당시 문화에선 아주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일 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땅에 감추인 보화”라고 합니다. 그 땅에 묻힌 보화를 갖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모든 걸 다 팔아 땅을 쟁취해야 한다고 하지요.
이게 예수님 당시 문화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지금 장사를 하는 종들과 1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을 보며 “그렇지 땅에 묻는게 당연하지”라고 생각 했을 거예요. 왜냐면 그게 맞는 행동이거든요. 물론 사회 신분마다 차이는 있었겠지만 / 적어도 이 종들의 신분에선 귀한 물건이나 큰 가치의 재산은 땅에 묻어 보관하는게 당시 사회 문화였습니다. 보화와 같은 천국이 땅에 묻혀 있었듯이 말이죠.
즉, 자신과 가족한테도 제일 안전한 행동이고 말이죠. 만약 장사를 했다가 그 큰 돈을 다 잃으면 노예 신분으로 어떻게 감당할까요? 그래서 1달란트 받은 종은 제일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이죠.
그럼 계속해서 19절부터 23절 보겠습니다.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이 먼 여행길 에서 돌아와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는데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벌었고요,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벌었습니다. 이 종들은 모두 2배씩 벌었고, 주인은 이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며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종이 남았죠? 이 종은 제일 안전하게 땅에 묻은 돈을 다시 가져와서 주인에게 돌려 줍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24절, 25절입니다.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 을 가지셨나이다
종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 이 종의 말은 당시 시대를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는데요, 지금 이 종은 주인이 무리한 세금을 요구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돈을 쓰지도 않고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에 빈번한 주인들이나 내 주인이나 모두 같은 수준의 주인으로 알고 판단 했던 것이죠.
자 그럼 이제 주인의 대답을 한번 볼까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주인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인 입장에서는 구지 능력도 안되는 농노나 노예에게 돈을 맡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죠. 노예 신분으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돈 쓸 방법도 모르는 그들에게 돈을 맡길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인은 잘 알고 있었겠죠. 그들의 위치와 능력을 말이예요.
결국 주인은 종들에게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돈을 맡긴 게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정말 원했던 건 몇 십억을 맡길 만큼 종들을 아꼈고,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게 주인의 바램인 것이지요.
만약 다섯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았겼어도 주인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지금 주인의 관심은 종들이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이, 종들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나만의 가치관이 아닌 내가 모시고 나를 사랑하는 주인의 가치관에 맞춰져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때에 종들은 주인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고 따라 가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이 주인의 사랑은 지금 이 곳에 모인 우리들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종들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선 우리는 아무 보잘것 없는 피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선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것이고, 그분의 자녀가 될 자격을 주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단지 우리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게 문제이죠. 지금 마지막 종처럼 말이예요.
이 무지한 종이 자신이 경험한 사회의 주인들과 지금 자신의 주인을 똑같이 여겨버렸습니다, 즉 내가 기준이 되어 주인을 판단 했으며, 내가 한 판단이 답이 되어 주인의 바램을 몰라 봤던 것입니다.
성도님들, 이 말씀 자주 들어 보시고 또 사용하셨을 텐데요. 바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아주 익숙하죠? 그런데 정말 그러실까요? 내 기준인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으면 나의 보여지는 모습은 전혀 상관 없을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사무엘상 16:7절 을 인용해서 많이들 사용하시는 거라 생각하는데요,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씀 들이 복음서를 제외하고도 14곳이 될 만큼 많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맥락과는 많이 다를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릴 영상의 이야기처럼 말 이예요.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가 놀라운 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대략 2분 남짓한 영상 이였는데요, 아주 강하게 뇌리에 박히더라구요. 영상엔 5명의 남,녀 청년들이 나와서 대화를 주고 받는데, 한 여성이 “나는 기독교인이고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며칠 전 난 다른 여성과 키스를 했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고 말을 이어 갔어요.
그러자, 주변에 앉은 다른 청년들이 “그건 잘못된 행동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 라며 잘못을 지적하자 레즈비언인 여성이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신다. 내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복음을 믿는데, 그리고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계신데 누가 나를 정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네가 뭔데 날 정죄해?” 이 말이죠?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말이 맞을까요? 그런데요, 우리는 상황만 다를 뿐이지 지금 이 레즈비언 여성과 같은 행동을 일상에서 수없이 많이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간혹 우리는 “에이 저렇게 보여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셔”,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니 얼마나 다행이야” 등 행동을 합리화해서 말씀을 자주 사용하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이 의미와 / 하나님이 다윗을 들어 쓰시는 의미를 놓고 볼 때 과연
맞게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가 남용해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과 행동을 통해 세속화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상황과 같이 본문 26절 말씀을 통해 제 자신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곤 알았어요, “내가 이 악한 종이구나” “내가 이 악한 종처럼 세상과 세속화 되어 나의 왕 되신 하나님을 몰라 보고 있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내 안에 가둬 제한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그리곤 그 사실을 굉장히 정당화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일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게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단 말이죠. 지금 말씀에 등장하는 1달란트 받은 종처럼 말이예요.
우리는요,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신앙 고민도 나누고, 말씀도 함께 나누지만 그런 경험 들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경우도 있고요,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며 응답받은 몇 몇의 일을 바탕으로 그런 하나님으로 만들고, 세상에서 말하는 하나님, 기독교 문화에 맞춰진 하나님으로 / 마치 어항에 물고기를 가두듯 하나님을 가둬 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춰져야 합니까? 우리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 내시는 분이 하나님인데 왜 그 전능하신 왕께서 우리에게 맞춰져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내가 뭘 원하는지 그분이 아셔야 하는게 아니라, 그분이 뭘 원하시는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26절로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며 말이죠. 여기서 “악하고 게으르다”의 원어적인 의미는 “너의 태만한 모습”을 의미하는데요, 더 깊게 생각을 해보면 “너의 태만한 모습과 나와 상관없는 모습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이 주인과는 상관없이 살아 간다는 것이죠. 주인은 종들 모두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비록 금액은 다르지만 달란트의 가치만 봐서는 그들에게 과분한 금액인 건 틀림 없습니다.
주인에게 정말 중요한 건 돈을 잃었던 벌었던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 달란트를 누구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의 가치관과 삶이 주인을 위해 맞춰져 있던 종들은 주인을 위해 사용하였고, 주인이 아닌 세상과 자신에게 맞춰줘 있던 종은 자신의 안위와 안전을 위해 달란트를 묻어 버렸던 것이 결국 화를 불러 온 것이죠.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계신거라 생각합니다.
“얘들아 나는 너네가 나의 즐거움에 동참했으면 좋겠는데, 너네는 지금 어디를 바라 보고 있니?”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갚을 수도 없는 큰 은혜를 받아 살아가고 있는데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를 향하여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안위를 바라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어치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복음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지옥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동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듯이 말이죠. 이 은혜가 복음이고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는 달란트와 같은 것입니다. 달란트는 종들이 노력해서 받은 게 아니라, 주인이 종들에게 선물처럼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나의 재능을 개발하는게 아닙니다. 그 달란트를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게 아니예요. 달란트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나의 안녕과 안위를 위해서 맞춰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입은 자 답게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에서 주인은 말합니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렇습니다. 주인을 바라보며 주인을 위해 달란트를 사용했던 종은 더 많은 달란트를 받았으나, 주인의 가치관과 바램과는 상관없이 “내가” 우선이 되어 주인을 “내가” 생각하고 바라본 가치관으로 판단한 종은요. 있는 것 마져 빼앗기고 결국 30절 말씀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 난 것이죠. 함께 30절 읽어 보겠습니다.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 라
영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바울 사도 이야기를 보면 날씨가 언제나 맑던가요? 흐른 날도 있었습니다.
결국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예수님의 삶을 따라 그분의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는 게 쉽겠습니까? 사도들 조차 힘들었는데 말 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큰 것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동참하여 주인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자에는 그것에 맞는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그 기쁨에 동참하는 보상을 말이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시간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배푸셨는지 함께 나눠 보았고, 그리고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자 들로써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영동교회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가치관에 잡혀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내가 주인”되어 사는 삶이 아니라 왕 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마지막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그 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를 듣는 우리가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 찬양 드리며 정리 할 텐데요, 우리가 매여 있어야 할 곳은 이 땅. 이 현실이 아닙니다. 물론 이 현실도 부정할 수 없이 중요한 곳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매여 있어야 할 곳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치관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매여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찬양하며 주님께 고백 할때에 “주님,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온전하게 매여 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백하며 이 시간 찬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이 시간 주님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을 함께 고민해 보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가 큰 은혜를 입어 살아 갑니다. 그리고 자격 없는 우리가 은혜를 누리며 살아 가는 동안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나의 안위를 위해 허비 하는 삶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나라를 위에 살아가며 주님의 가치관을 소망하며 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는 아버지의 사랑을 고백하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