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가장 중요한 일을 정리합시다(딤후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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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중요한일을 정리합시다

디모데후서 4장 6-8절
이제 한해를 정리할 때입니다. 매년 연말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과연 새해 초에 계획하고 결단한 것을 모두 이루었는가 아니면 연초에 계획하고 연말에 이루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가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오늘의 날을 맞이하고 오늘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날과 시간들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13세가 되는 성인식을 할 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잘 쓰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시간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스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라는 책에서 “소중한 일을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긴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 몰려 왔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청을 다 들어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성 관리를 잘하려면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후회 없는 인생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가 다 되었다고 생각되던 노년에 이르러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 후반부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는 종말론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은 나는 때가 있고 죽는 때가 있고, 올 때가 있으니 갈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인생의 긴긴 여행, 하나의 순례자의 길을 마치려 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코스를 뛰는 것과 같습니다. 저 앞의 골인지점에 왔습니다. 결승점이 눈앞에 보입니다.
저 바로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맞이하려 하고 계십니다. 마치 스데반이 순교하던 때와도 같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인자가 거기 서서 스데반을 향하여 ‘어서 오너라’ 하고 내려다보신 것과도 같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과도 같이 지금 바울은 앞에 있는 순교의 시간을 바라보고 인생을 정리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한 개인의 생애가 주를 위하여 값있게 바쳐지고 그 모든 정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낌없이 투입된 사람들이 다함께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생의 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 속에서 몇 가지 그의 귀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떠난다는 말에는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멍에를 벗는다는 뜻입니다. 마소의 목에 멍에를 얹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면서 일을 시킵니다. 저녁에 돼서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끈을 풀고 멍에를 내립니다. 떠난다는 것은 바로 그 뜻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이 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한평생을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충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고 많은 핍박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보습쟁기를 벗을 때가 됐습니다. 멍에를 벗어놓을 때가 됐습니다. 다 됐으니까요. 일을 다 하고 벗어놓는 것입니다.
멍에를 벗는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천막의 끈을 푼다’ 하는 뜻도 됩니다. 천막을 치고 있다가 저쪽으로 옮겨갈 때 매놨던 천막 끈을 풉니다. 그리고는 풀어 천막을 걷어가지고 나온 곳으로 가져갑니다. 여기 떠나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내가 여기서 살던 것을 이제는 멈추고 이 장막을 떠나서 하나님나라로 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배의 밧줄을 푼다는 뜻도 있습니다. 배가 매여 있습니다. 뭍에 있는 말뚝에다 끈을 매놓고 정박해 있습니다. 이제 이 배가 다른 곳으로, 먼 곳으로 가기 위해서 육지에 매여 있는, 말뚝에 매여 있는 그 밧줄을 풉니다. 이 밧줄을 풀고 떠날 때가 됐다 하는 것을 바울은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로 가는 배로 타고 내가 지금 떠날 때가 돼 육지에 매여 있는 이 줄을 풀어야 겠다, 밧줄을 풀고 떠나겠노라, 나의 떠날 때가 가까웠다.’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 말씀입니까?
이것은 목표로 향하는 길이요, 소망으로 향하는 길이요, 더 중요한 것은 안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쉴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습쟁기를 걸머지고 멍에를 매고 수고했지만 이제는 쉴 것입니다.
2.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쳤다”
마침은 시작보다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나 시작보다 끝맺음을 잘해야 합니다. 편물을 하는 사람이 뜨개질을 한 다음 끝맺음을 하지 않고 그냥 둔다고 하면 뜨개질 했던 것이 다 풀리고 말 것입니다.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쳤다” 그는 신앙생활을 경주장에서 달음질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마라톤 경기를 할 때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출발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길이 멀어짐에 따라 한 사람, 두 사람의 낙오자가 생기고, 차츰차츰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마지막 결승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상급을 받게 되는 사람은 불과 몇 사람 밖에 안 됩니다.
신앙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내고, 함께 봉사를 하고 함께 교제를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역사가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고 불과 몇 사람의 성도들만이 그 교회를 지키고 헌신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고 하실 때 수없이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며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변에 위험이 닥쳐오고 주변의 정세가 험악해간다는 것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해 놓으면 어떻게라도 일은 되어간다고 하는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용기 있게 시작하는 것은 매우 슬기로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시작만 해놓고 그 일의 끝을 내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쳐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6.25 사변이 끝나고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그에게 한국동란에서 세운 공로를 치하하는 훈장이 수여되던 날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는 두 가지의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하나는 펜이요, 다른 하나는 총칼입니다. 펜은 평화로울 때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일단 전쟁이 나면 총칼을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칼을 뺀 다음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싸워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할 때는 패전의 슬픈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전쟁의 실책은 바로 여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략이 트루먼 대통령에 의하여 거절을 당하고 전쟁을 마치지도 못한 채 해임되어 버린데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이 연설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뼈아픈 여운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전쟁을 누가 원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일단 전쟁이 났을 바에는 승리할 때까지 끝을 내야 한다는 맥아더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에 그가 생각했던 대로 끝을 냈더라면 오늘날 13억의 인구를 가지고 세계를 위협하는 저 중국이 지금처럼 크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민족에게 오늘날과 같은 북쪽의 위험과 이산가족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작보다는 마침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1년간의 신앙생활을 결산해 보아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송구영신 예배 때 혹은 정월 첫 주일 신년예배 때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기도했던 일을 조용히 회상해 봅시다.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변함없이 잘 감당했는지 점검해 봅시다.
바울은 본문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 내 앞의 생의 종말이 닥쳐온다 해도 우리도 당당히 이 고백을 하면서 주 앞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서 7장 8절에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했고,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입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 그 기대를 아십니까? 그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열중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는 정월달의 시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침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 마쳐야 합니다. 시작은 잘해놓고 그 일을 잘 마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은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작보다 마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 한 해를 잘 정리하기 위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잘 마치기 위해서는 전제와 같이 부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5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전제’란 ‘스펜데스다이’ 라고 하는 말로 이 말의 원문의 뜻은 ‘하나님의 전에 피를 쏟아붓는다’는 뜻입니다. ‘제단에다가 피를 쏟아 붓는다.’ 그것이 전제입니다.
양의 목을 치고 뒤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받아가지고 가서 제단에다가 그 시뻘건 피를 좌악 붓습니다. 그리고 태웁니다. 그 붓는 것이 전제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전제와 같이 쏟아버리는 희생이 있어야 했던 것을 바울은 여기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은 마지막 예루살렘 상경의 길에서 밀레도섬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 놓고 고별 설교를 하는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이 얼마나 비장한 각오를 표명한 고백입니까?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내와 희생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에서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쫓아간다. 뒤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린다”고 했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하고, 계속 뛰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제와 같이 생명을 쏟아 버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행로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많은 유혹도 있고, 친구의 비난, 가족들의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려 할 땐 직장에서 부르는 시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전제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주 앞에 쏟아 버리고 나가는 성도 앞에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달리는 자라야 상 받을 자리에 나갈 수 있고, 생명을 쏟아 버리는 신앙의 경주라야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입니다.
4.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8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노래였습니다. 우리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상을 바라는 생활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 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시겠다고 하는데 왜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겠습니까?
잠언 11장 18절에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35절에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 “주를 위해 핍박받고 욕먹는 성도는 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41~42절에서는 “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는다고 하셨으며,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상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 충성하고 신앙의 경주장을 다 달려간 성도에게는 하늘의 상이 있고, 땅의 상급도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에 수많은 열정과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 부인도 얼만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선교사는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보낸 슬픔에 비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큰 시련을 주실까? 나에게 이 선교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선교를 포기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짐을 싸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탔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붉은 주단이 깔리고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대통령이 선착장을 빠져나가자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멈추고 사람들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는 홀로 고독하게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휴가를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큰 환영을 받는데, 선교를 하다가 두 아들과 부인을 잃고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구나!’ 그리고는 고독감과 실패감으로 정신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군악대의 나팔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직접 너를 맞이할 것이다.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내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음성을 들은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했던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상급이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에 다 있습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잘 마치는 자에게는 커다란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승점을 알고 있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끝은 있고 그리고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전에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 시간이 짧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몇 십 년 후에 보면 아마 여러분의 한 사람도 이 자리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씀한 대로 육체의 남은 때, 그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중요한 시간에 낙오자가 되지 말고 실격자가 되지 말고, 과거에는 조금 휘청거렸지만 이젠 휘청거리지 말 것입니다. 전일에는 우왕좌왕했지만 이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에 왔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간이면서 결승점에 도달하면, 그러면 무엇이 보입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면류관이 보이고 그리스도께서 보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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