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실한 사역과 그 열매

요나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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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설교>
요나 3:4-10
“불성실한 사역과 그 열매”
2024. 5. 17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불성실한 사역과 그 열매”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말씀 사역을 한 결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본토에서 사역을 하던 요나가 우여곡절 끝에 800km나 멀리 떨어진 니
느웨까지 와서 선교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 과정이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였죠.
배 타고 도망을 치다가 폭풍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도 들어갔다 나
오고.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선교지에 도착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가 선교 사역을 어떻게 했습니
까? 오늘 제목처럼 “불성실한 사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봐 볼까요?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가 하루 동안 외쳤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하루 동안 외친다고 해서 될 게 아니었
어요. 그 앞에 3절에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고 소개를 하거든
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이 말은 단순히 성읍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읍의 크기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곳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 시간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가 사흘 동안 사역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얼마 동안 사역을 했습니까? 하루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의 절반
도 못 채웠어요. 3분의 1밖에 안 채웠습니다. 너무나도 불성실하게 사역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의 불성실이 이것만이 아니에요. 여러분,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려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준비 안 하면 선교지에 갈 수가 없어요. 가장 첫번째로, 뭘 준비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 땅의 언어를 준비해야 되겠죠. 말이 통해야 사역을 할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과 니느웨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니느웨는 아카드어를 사용해요. 화면을 한 번 보면요. 왼쪽이 히브리어고 오른쪽이 아카드업니다. 생긴 것부터 완전히 다르죠. 글자도 다르고, 발음도 다르고, 공부를 안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반드시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해야 돼요.
그렇다면 과연 요나는 아카드어를 알았을까요? 아카드어를 공부했을까요? 요나가 니
느웨에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라고 외쳤는데, 과연 무슨 언어로 외쳤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나가 히브리어로 외쳤을까요? 아니면 아카드어로 외
쳤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요나가 무슨 언어로 외쳤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
다. 다만 그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만 외쳤다고 말해 주고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나뉘는데요. 칼빈 같은 경우에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외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바로 아카드어죠.
2하지만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틀림없이 요나가 히브리어로 외쳤을 것이라고 말
합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선교사로서 파송되었지만, 애초에 요나는 이 사역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선교지에 갔어요.
그러니 언어를 배울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냥 들어가서 히브리어로 외치는 거죠.
하나님이 니느웨 말로 외치라고 하셨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알아 듣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히브리어 그대로 갖다 읊은 겁니다.
그것도 사흘 동안 최선을 다해서 한 것도 아니고, 하루 동안만 했어요. 너무나도 불성
실한 사역이죠. 자, 그렇다고 한다면, 그 불성실한 사역에 과연 열매가 맺힐까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런 사역에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열매가 맺힐 리가 없죠. 어떻게 하루 동안, 그것도 외국어로 외치는데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심지어 자세히 설명해준 것도 아니에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딱 이 말만 외쳤어요. 그러니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말도 안 되게, 여기에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입니다. 이 불성실한
사역에 회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데,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어요.
그것을 오늘 본문 5절부터 9절까지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먼저 5절을 같이 읽어보겠
습니다. 5절 시작,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아멘.
요나가 하루 동안 외국어로 외친 말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
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도대체 어떻게 히브리어를 알아들었을까요? 저희가 그 정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요나가 하루 동안 외치고 다닐 때, 니느웨 사람들 중에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요나의 말을 통역을 해줬겠죠.
“저 사람이 히브리 사람인데, 지금 히브리 말로 이러이러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줬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어느날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도시에 나타났는데, 겉
모습부터가 거지꼴이에요. 그도 그럴게, 바다에도 빠지고, 물고기 뱃속에도 들어갔다 나오고, 또 이 먼 니느웨까지 걸어왔으니까 그 꼴이 어떻겠어요? 우리는 보통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 앞바다에다가 내려준 줄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니느웨는 바다에서
65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완전히 내륙지방이에요. 그러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고나서 최소 650km 이상을 요나가 걸어온 겁니다.
그러니 겉모습이 거지가 따로 없었겠죠. 거기다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면서 돌아다
니고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미친사람인가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짓을 하루 내내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관심이 가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그리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러다가 마침 히브리 말을 아는 사람이 나와서 그 말을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놀라워요. 그 말을 미친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속하게 금식을 선포하게 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 그 배경을
4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 당시 니느웨를 보면, 시대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불길한 일들이 앗수르 제국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첫번째로 일식이 일어났어요. 이 일식은 기원전 763년 6월 15일에 발생했습니다. 이때
당시에 앗수르 왕은 “앗수르단 3세”였어요. 이 왕이 다스릴 때 안 그래도 국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와 계속된 전쟁에서 패배를 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나라가 어수선하고 또 왕은 왕대로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차에 일식이 일어난 거예요.
어느 문화권이든지, 일식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집니다. 태양은 곧 신의 상징이거든요.
그런데 어둠이 태양을 가린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미래가 그려지겠죠.
특히 앗수르가 유독 일식에 민감했는데요. 그래서 앗수르에는 옛날부터 일식에 대한
예언이 존재했습니다.
“에누마 아누 엔릴” 이라고 하는 예언모음집인데요. 하늘의 별자리와 날씨와 여러가지 자연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로 인해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언한 것을 모아놓은 모음집입니다. 이 중에 일식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화면을 한 번 봐 볼까요? “…왕은 폐위되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하잘 것 없이 무익한 자가 왕위를 잡을 것이다…왕이 죽을 것이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땅에 홍수를 낼 것이다. 기근이 있을 것이다…신이 왕을 칠 것이며, 불이 땅을 삼킬 것이다…성읍의 성벽이 파괴될 것이다…”
5여러분, 이것이 일식이 일어나면 일어나게 되는 일들입니다. 일식이 일어나면, 왕이
죽고, 무익한 자가 왕이 되며, 홍수가 나고, 또 기근이 오고, 불이 땅을 삼키고, 성벽이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이만큼이나 일식을 앗수르 사람들이 두려워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것뿐만이 아니에요. 또 앗수르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앗수르단 3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지진 역시도 일식 못지 않게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백성들이 왕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이 당시에 반란이
계속 일어날 정도였어요.
‘지금 왕 때문에 나라가 일식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 왕이 계속 있다가는 다 죽을 판이다. 왕을 갈아치우자!’ 이러면서 계속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니느웨에 왔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왜 그
토록 심각하게 요나의 말을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되시죠? 물론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일
이에요. 만약에 요나가 니느웨 말로 외쳤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 겁니다. ‘안 그래도지금 심란한데 어디서 재수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이러면서 두드려 팼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니까 시선이 집중되고, 온 도시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을때, 그 말의 뜻이 알려지면서, 그 말이 심각하고 또 굉장히 예언적인 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니느웨가 신속하게 회개운동을 벌이기 시작해요. 먼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5절에 다시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했다고 말
6씀하고 있는데요. 이 하나님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으로 기록이 됐어요. 엘로힘은 신을 뜻하는 일반명삽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만이 아니라 모든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사람이죠. 저도 사람이고 여러분도 사람이고.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이 여호와만 있는 게 아니라, 바알도 엘로
힘이고 아세라도 엘로힘이고 온갖 우상들도 다 엘로힘입니다. 그러니까 신적인 존재는
다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일반명사예요.
대신에 각 신마다 고유의 이름이 있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여호
와”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각각의 신마다 다들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바알, 아세라, 몰
렉, 아스다롯 등등. 각각 자기 이름이 있어요.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이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각자 자기 이름이 있는 것처럼, 신들도
엘로힘으로 분류되지만 각자 자기 이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믿은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
이었는가가 논란이에요. 니느웨 사람들이 엘로힘을 믿고 금식을 선포했는데, 과연 그 엘로힘이 여호와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믿는 민족 신이었는지, 분명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요나가 외친 말만 가지고는 여호와를 알 수가 없거든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말만 듣고 여호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어요. 만약에 요나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말 뒤에 “그러므로 여호와를 믿고 회개하라” 라고 덧붙였다면, 그랬다면 알 수 있죠. 하지만 뒤에 덧붙이지를 않았어요. 그러니 여호와를 알 수가 없죠.
그래서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요. 니느웨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요나가 전한 ‘메세지’를 믿은 것이라는 사람도 있어요. 이밖에도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들이 “여호와”를 믿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이에요. 그들을 심판하시리라는 뜻을 돌이키셨어요. 만약에 그들이 우상을 믿고 금식을 했다면, 과연 뜻을 돌이키셨을까요?
니느웨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여호와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뜻을
돌이키신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닐 거예요. 그러기에는 여호와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아마도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히브리 사람들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 찾다가 그 신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거예요. 앗수르는 다신교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신을 섬기는 것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여호와를 믿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호와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보니까, 정확히 어떤 식으
로 회개를 해야되는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 그게 보여요.
자, 5절을 다시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여기서 금식
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
8라, 애굽에도 슬픔 때문에 금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앗수르 역시도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굵은 베옷을 입는데요. 굵은 베옷은 보통 염소 털이나 낙타 털로 만들
기 때문에 거칠고 까끌까끌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안 입어요. 움직일 때마다 까끌까끌하고 피부가 긁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굵은 베옷은 초상이 났을 때나 큰 슬픔을 당했을 때만 입습니다. 이것 역시도 근동 사회에 널리 통용되던 관습이었어요.
바로 이러한 관습을 니느웨 사람들이 신속하게 온 국민이 다같이 동참을 한 겁니다.
심지어 왕까지도.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니느웨 왕까지 회개에 동참해요. 6절 봐 볼까
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니느웨 왕, 그러니까 앗수르 왕이죠. 앗수르 왕이 소문을 들었어요. 신하가 와서 알려
줬겠죠.
‘왕이시여! 지금 백성들이 단체로 여호와라는 신을 부르짖으면서,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랬더니 왕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어나서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은 거예
요. 그런데 왕이 한술 더 떠서 재 위에 앉았습니다. 재 위에 앉는 것도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재 위에 앉거나, 재 위에 눕거나, 혹은 재를 머리에 뿌리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왕이 지금 나라가 술렁술렁 하면서 다같이 애도를 하는 것을 알고, 혼을 내
기는커녕 자기는 재 위에 앉아서 한층 더 높은 회개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왕으로서
도 지금 자신의 지위가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알거든요. 수시로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전국적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왕으로서는 지금 이 사건이 지금 위태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겨졌을 겁니다.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를 부르짖고, 최선을 다해서 자기들의 방식으로 회개에 동참하는 것이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것을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동참을 시킨다는
겁니다. 밑에 7절과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7절 8절 시작,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
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기가 막히죠. 여러분, 짐승이 뭔 잘못을 했다고 회개를 합니까? 가축들한테 금식을 시
키고 굵은 베 옷을 입힌다고 뭐가 달라져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죠. 회개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짐승이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웃기는 일이에요. 여호와가 어떤 신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하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회개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요. 이 웃기는 일이 니느웨의 입장에서는 생사가 달린 일입니다. 니느웨 사람들
은 여호와가 누군지도 사실 잘 몰라요. 그래서 여호와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되는지 모
릅니다. 우리는 당연히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 사람들은
모르거든요. 그래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죄
없는 가축들까지도 같이 동참을 시키는 거예요.
‘여호와라는 신이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더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든 신의 자비를 구하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그것이 올바로 된 신앙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있어요. 국가적
인 위기 앞에서 왕으로부터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심지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온 나라가 간절하게 여호와를 부르짖으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8절에 다시 보면,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라고 왕이 조서를 내렸어요. 우리가 악에서 돌이키자는 외침이죠. 신을 진노하게 하는 그 어
떤 일도 하지 말자는 간절한 외침이에요.
비록 그들의 신앙이나 회개하는 모양이나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여러분, 놀라운 것
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절 시작,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철저하게 회개하며, 악한 길에서 돌
이켜 떠난 것을 하나님이 보셨어요. 그래서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신 겁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습니까? 1장 2절에 ,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라고 이유를 말씀하셨어요. 니느웨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될 정도로, 너무나 심각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그 악독에서 돌이킨 겁니다. 더
이상 심판할 이유가 사라진 거예요.
11그냥 보여주기식으로 모양만 흉내내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에서부터 악에
서 돌이켜 여호와를 찾는 참된 회개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입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척박하고 불성실한 사역 환경 속에서도 열매가 맺힌다고 하는 교훈입니다.
요나는 사역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불성실하게 사역을 했어요. 그 사역의 현장은 여호
와가 누군지도 모르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고작 하루 동안,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선포되어진 말로서는, 누구도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척박한 땅에 떨어진 그 불성실한 씨앗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
우고, 신속하게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어요. 이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사건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태복음 12장 41절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아멘.
지금 이 말씀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보여줄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이
말은, 요나가 니느웨를 회개시킨 것보다, 나는 더 위대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
12다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니느웨의 회개에 대해서, 그 회개가 요나의 전
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정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전도가 니느웨
를 회개시켰다고 말씀하셔요.
요나의 전도. 말 그대로 요나가 니느웨에서 하루 동안 외친 그 말씀이 그 땅에서 회개
의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요나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의 사역의 성실함이 어떠했든, 그 모든 것에 앞서서,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하여, 메마른 땅에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전도는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가 말
씀을 어떻게 잘 전할까, 어떤 좋은 방식으로 할까, 다른 교회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까. 물론 이것도 중요하죠. 좋은 전도 방법이 있으면 배우고, 잘 적용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전도해야 됩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전도하되, 그보다
먼저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전도가 씨
를 뿌리는 것이라면,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가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씨가 싹을 틔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아무리 성실하게 순종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역
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개떡같이 사역을 해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가 있어요.
13여러분 전도의 성패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내 영역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가 낙
심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용하셨듯이, 우리들을 사용하
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씨앗을 뿌리셔요. 특별히 우리가 행축을 앞두
고 있는데요. 이번 기회에 우리가 집중적으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니느웨에서는 요나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씨앗을 뿌렸음에도 도시 하나가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잖아요.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여러분 우리가 나름대로 일당백의 용사들 아닙니까? 국동제일교회, 국동에서 제일 가는 교회잖아요. 우리가 이제는 여수에서 제일 가는 교회가 될 때도 됐죠. 이번 행축이 그 발판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여러분이 전도하고자
하는 태신자들, 또 그뿐 아니라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말씀의 씨앗 한 알을 뿌리
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씨앗 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회개가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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