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
대림절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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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16-24
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소명 3: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세브란스 의과대학 1호 의료선교사이신 강원희 장로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안타깝게도 2023년 5월 2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이분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월남을 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장로님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몸소 겪으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얼마나 악해지고 비참해지는지를 목격하였습니다.
장로님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대도시에서 병원을 개업할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 정미소를 세내어 병원을 차리고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소문이 나자 속초에 정착하고 대동의원을 개업하였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대동의원 외에는 병원이 없을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장로님이 외과의사로서 어려운 수술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면서 얼마 후 대동의원은 영동 지역에서 알아주는 병원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치료 중이던 한 환자가 페니실린 쇼크로 인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고, 얼마 후 본인도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죽다 살아나는 경험 한 것입니다.
이때 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휴전선을 넘어 월남하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기도를 잊고 살아왔던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침 속초에 부흥집회차 방문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어떻게 하면 의사로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 여쭈어보았고, 마침내 의료선교사로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잘 나가던 대동의원의 문을 닫고 네팔로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 인생의 머리나 꼬리를 드리기보다는 가운데 중간 토막을 드리고 싶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네팔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2017년 10월 말 강 장로님은 에티오피아 M.C.M. 병원에서 35년 동안 의료선교사로서의 모든 사명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한 후에도 속초 인근의 무의탁 노인을 찾아다니며 무상 진료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타국살이로 인해 이미 큰 병을 얻은 장로님은 2022년 코로나 기간에 병원에 입원한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1년여 동안 요양병원 생활을 하시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강원희 장로님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본인의 영정에 ‘부활, 생명, 기쁨, 환송’이라는 네 단어를 꼭 넣어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하십니다. 장로님의 삶을 이끌어온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히말라야의 슈바이처의 삶을 살도록 하였고 일평생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서게 하였는가?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를 맞이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을 가르쳐 주는 성경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본문은 그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인데,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도바울이 보기에 많이 부족하고 또 잘못 이해 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서를 쓰게 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곧 오신다니 그러면 직장도 그만 두고 열심히 살 필요도 없는거 아니냐?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이 임박했고,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는거 아니냐?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교회 내 형제 중 죽는 자들이 하나둘 생겨나자 예수님이 재림 안하시는거 아니냐? 그리고 또 내세도 없는거 아니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생겨 나기 시작 합니다. 그리고는 내세가 없으니 살아 있을 때 맘대로 살자하면서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는 등 재림에 관해 여러 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올바른 종말론을 가르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설명해 주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1장 부터 쭉 읽어 보시면 데살로니가서의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건데, 그러면 거두절미하고 데살로니가전서 마지막 장을 통해 사도바울이 결론으로 말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가 가져야 할 태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먼저 항상 기뻐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항상 기뻐 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믿는 자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일들입니다. 그 중 당연히 핍박 박해가 많았기에 기뻐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쁜 일 보다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는 일들이 월등히 많습니다. 특히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로서는 더욱 연단과 시련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자들의 제일 첫 번째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인데, 기쁨은 주 안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후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거듭나 중생 한 사람의 특징은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인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 자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 됨으로 우리도 복 자체가 됩니다. 그래서 이를 말씀 하신 것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5장에 팔복인데, 팔복 말씀의 결론에 해당하는 12절을 보면 복된 존재가 된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즉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인격과 하나 되어 팔복이 체화 된 사람은 이제 세상이 주는 근심에 휘둘리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동행하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흘려 들을 것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고 묵상하면 그 안에 엄청난 진리를 내포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들에서 믿음있는자들에게 강조 하는 것이 기쁨이에요. 예를 들어 로마서 5:3-4을 보면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나 즐거워 하는 이유가 환난은 인내를 성장시키고, 인내하면 더 많은 연단을 견딜 수 있게 되고, 연단을 받고 부러지지 않는 자는 승리하게 되기에 그는 소망을 이루게 되니 나에게 환난이 찾아 왔다 함은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주신 소망을 이루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 된 은혜기 때문에 이를 즐겁게 감당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승리케 하시는 확신 가운데 갖는 즐거움입니다. 또 야고보서 1:2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말씀 하고 있어요. 시험을 당하거든 기뻐하라. 역시 동일하게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니 주님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기쁘게 살면 되는것인가? 기쁨이 다 좋은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에는 진짜 기쁨이 있고 가짜 기쁨이 있기 때문에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 10:23 을 보면
10:23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여기서 보면 미련한 자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고 하며 명철한 자는 지혜를 기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악인도 항상 기뻐한다는 거에요. 다만 그 악이 자신을 결국 고통으로 만들 것을 모르고 현재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편 1:1절을 보면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안에 담긴 보화인 진리를 깨닫는 것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자가 바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즉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쓴 글들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되심을 발견하고 그 안에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현재 환경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품고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증거가 바로 기쁨입니다.
둘째로 말세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권면은 쉬지 말고 기도 하라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세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권면은 쉬지 말고 기도 하라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와 감사를 하나로 묶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기도를 어떤 공로로 생각하고 내가 열심히 뭔가 고행과 노력을 통해 공덕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밤낮으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몇 시간이고 울면서 기도하고,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울면서 중얼거리는 장시간의 기도를 하면 신령하고 기도의 깊은 단계로 들어갔구나 생각하시겠으나 이러한 기도 속에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 나머지를 책임지신다는 공로사상이 들어가 있고, 이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와 다르며 쉬지 말고 기도 하라는 의미 또한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의 연장선상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까 어떻게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쉬지도 않고 무언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생각 하실 수 있는데, 우리가 기도 하면 뭘 주세요 주세요 하는데, 그런 달라는 기도라면 10분 이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하나의 세트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왜냐면 기도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 따로 감사 따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만 기도와 감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기도를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기도의 단계에서는 아직 감사가 나올 수 없어요. 기도의 소원과 요구가 응답되고 성취되었을 때나 ‘감사’가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아들이 출장을 가는 아빠에게 “아빠, 출장 갔다 올 때 꼭 장난감 사 오세요!”라고 요구한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장난감을 잊지 않고 사 온 순간에 그 장난감을 받아들면서 “아빠, 감사해요!”라는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아빠가 장난감을 안사왔다면 아들이 감사를 안 하겠죠. 오히려 왜 안 사왔냐고 하겠죠.
그래서 만일 기도의 목적이 단순히 소원 성취라고 생각하셨다면 감사는 기도 응답이라는 조건이 성립 될 때 나 나오기에 범사에 감사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 자체가 감사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일단 기도가 자체로 감사인 이유는 기도가 영광스런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 주시고 어마어마한 은혜를 주신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감사의 표현이에요.
고대 그리스 지역에 있던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처음 성찬에 참여하게 될 초신자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대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오! 이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아닌 담대함으로 나아가십시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 주 안에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실제로 성찬예식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요.
“주님!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과 자연스러움으로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고백하고 나서 주기도문이 이어지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성찬식 때 주기도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문에서 ‘감히’라는 단어가 눈에 띄는데, 우리가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에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고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가 대화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감사가 전제되어 있고 쉬지 않고 기도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 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라는 거에요.
반대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 그래요. 기도와 감사는 비례합니다.
기도 하는 사람일수록 삶 속에 감사가 넘쳐 납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 속에 늘 있기에 그가 접하는 모든 환경이 다 하나님의 크고 싶은 섭리 가운데 놓여 있기에 모든 상황 속에서 깨달아지는 감사가 넘쳐 흐르게 됩니다. 반면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만나는 현상들 속에 원망 불평 시기 질투가 끝없이 찾아 오기에 감사는 점점 매말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가 말라 있는 성도는 역시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오롯이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연결 되어 있어요. 기도가 없으면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반대로 기도가 있으면 감사가 있고, 감사가 있으면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를 가리켜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기도는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 하시는 방편이기 때문에 기도를 가리켜 은혜의 방편이다 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을 넘어 사귐이라고 했습니다. 연인이 사귀면 서로 궁금해 하고 관심 갖고 계속 생각 하고 밥은 먹었는지 어딜 가는지 무슨 생각 하는지 만나도 안만나도 하늘을 봐도 길거리를 걸어도 사랑하는 사람 생각이 나잖아요. 그 사람에게 항상 마음을 쏟고 생각이 집중 되어 있는 상태가 사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도 하는 삶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삶의 기도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과 같이 영이 호흡을 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영이 반응을 함으로 육신의 정욕과 욕망이 이끄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가는 은혜길에 들어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속했을 때 와 달리 예수 믿고 거듭난 삶을 살아갈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이전에는 기도가 없는 자였다면 이제는 기도 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을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하늘의 빛이 그를 강하게 비추었을 때 그가 말에서 떨어지며 눈이 멀었어요.
이 일이 벌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9:11절에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아나니아는 다소 사람은 사울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회심을 했는지 거듭나 중생 했는지 알수가 없어요. 당연히 당시 사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하고 있는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찾으라고 하시니 얼마나 두려워요. 그래서 이에 대한 의심을 한 번에 해결해 주시는데 그 말씀이 뭔가요?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행 9:11).
바울이 기도 하고 있다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사울이 기도를 하잖니.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니? 하시면서 그를 안심시키시고 사울을 찾으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여러 증거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가장 분명한 증거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가장 큰 증거요, 중생 받은 마음의 증거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증거요, 은혜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 셋째 시간을 맞이 하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이후 구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말씀하시는데 이는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열매의 방향들입니다.
즉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 하는 가운데 성령이 소멸되지 않으며 예언의 말씀을 더욱 귀히 여기고 그로 인해 진리가 그 안에 있어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여 취하고 버릴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 본 3가지가 말세를 살아가며 주님의 다시 오시는 때를 기다리는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가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세상의 환경에 빼앗긴 시선을 되찾아 하나님 주시는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게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