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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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무엇을 볼 것인가
출애굽기 14장 10-20절
사람의 모든 기관 중에서도 눈은 가장 아름답고도 소중한 것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눈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문화와 문명은 없었을 것이며, 전혀 다른 세계가 이 지구상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눈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길이 전혀 다르게 진행 되어져감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형무소에서 두 사람이 한 날에 출감하여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길의 오른쪽에는 푸른 언덕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왼쪽에는 하수도가 있어 더러운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왼쪽을 계속 바라보며 걷다가 말했습니다. “아 이 더럽고 지겨운 세상,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산단 말인가?” 그런데 오른쪽을 계속 바라보며 걷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닐세,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네.”
그 후 10년이 흐른 뒤 둘은 다시 형무소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목사가 되어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이 보았던 상황, 그들은 똑같은 환경이었습니다. 똑같은 장소를 걸었고 똑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스타일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나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그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그 각도가, 그 관점이 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바라보는 재미로 사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상황과 환경을 여러분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1. 애굽을 바라보는 자는 원망과 불평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음지가 있는가 하면 양지가 있고,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남이 있으며, 패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승리하는 자가 있습니다. 즉 언제나 이런 양면성을 지닌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자기들을 잡으려고 뒤 쫒아오는 애굽 군대를 볼 수 있는가 하면 능히 그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출 14:10).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하).
이것이 과연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에서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말들을 하나님 앞에서 모세에게 쏟아냈습니다.
“왜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이것이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한 자들의 말입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우리는 바로를 섬기는 것이 더 좋은데, 왜 이렇게 탈출시켜서 오도가도 못하게 하느냐?” 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것을 더 좋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전혀 구원받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냥 그대로 노예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왜 억지로 우리를 구원해 내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어떤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이런 후회에 빠집니다. “왜 하필 내가 이렇게 젊었을 때 예수를 믿어서 고민하는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 방식으로 다 살고 난 후에 늙어서 예수를 믿으면 이런 고민이나 갈등도 없을 텐데.”
또한 자신이 영적으로 침체되면 영적으로 가장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속 시원하게 같이 욕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요 경험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뒤에 몰려오는 애굽 군사들을 보고 왜 이렇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면서 머릿속에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떠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여차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애굽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양다리 작전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간다고 하니까 일단 따라 가보자. 그러나 가다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돌아와 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곧 발견하게 된 사실이 무엇입니까? 이 길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특별 병거 육백 대까지 끄집어내서 달려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한꺼번에 죽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그들은 이처럼 심하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양다리 정책입니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유익한 쪽으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순진하게 말씀만 믿고 따라가다가 도망할 수 있는 한 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것이 확인될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길이 없습니다.
요즘 교인들은 순수성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여기저기서 들은 것이 많아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절대화시키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불신앙은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양쪽 다 가지기 위해서는 진리를 굽혀 놓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의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길, 그 숨겨진 길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옛날 방식으로 취직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고, 그런 방식으로 사업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능해서 그런 것도 아니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감사드립시다. 세상이 그처럼 무섭게 우리를 거부하고, 우리가 발붙일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시도할 때마다 늘 실패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하나님은 양다리 작전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2. 모세는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분노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세는 외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모세가 뒤에서 추격하는 애굽 군대와 앞에서 소리 지르고 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어떻게 이런 믿음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이런 경우에는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광야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오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런 좋지 못한 곳에 진을 치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지금 이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으신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일으키신 일에 대하여 모두 책임을 지십니다. 아무리 길이 없어도 하나님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길을 바다 속에 묻어 두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지금 잘못된 지경과 같은 현실에 부딪친 것이 모세가 지도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길에 대한 군사 지식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이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 그 결과가 너무 나빠서 절망 상태에 빠졌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사람의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만약 모세가 사람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에게는 오직 한 길, 물에 빠져 죽는 것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능성은 다 막히고 백성들은 분노에 차서 소리치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 보았더라도 모세는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특별 병거 육백 대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로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순간, 죽음의 골짜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작전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의 명령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싸우신다. 하나님이 행하신다. 아우성치지 말아라. 몸부림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 조용하라.” 이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어찌 불안해 할 수 있습니까? 왜 두렵겠습니까?
도단성에 있는 엘리사의 종이 적군을 바라 볼 때에는 그의 입에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였으나 그의 눈이 열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을 때 그는 엘리사와 더불어 아람군대의 앞에서 행진할 수 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여호사밧 왕은 온 백성을 모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하나님을 바라보던 백성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도 놀라운 승리를 하였습니다(대하 20:22-23).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눈을 갖고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까 다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추악하고 더럽고 불가능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좋은 것만 보입니다. 아름다운 것만 보입니다. 그리고 가능성이 보입니다.
여러분, 내 앞에 불가능한 과제가 부딪힐 때,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 짜증날 때, 신경질 날 때, 폭발하고 싶을 때, 미칠 것 같을 때,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다시 보십시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을 보십시오.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성경 호세아 12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3.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길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갑니까?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길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 아닌 요단들을 바라보던 롯은 아내와 후손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살아나온 존재가 되었으며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물질을 바라보다가 아골 골짜기에서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으며, 구세주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은 30냥을 보았던 가룟 유다는 피밭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마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바라보므로 영원한 저주를 인간 세상에 들여오고야 말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창 3:6).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먹을 것만 바라보다 멸망당한 에서나 하와처럼 망령된 자가 되시겠습니까? 있다가 없어질 재물만 바라보다가 멸망당한 롯의 처나 가룟 유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시겠습니까? 육신의 안일과 쾌락만을 취하다가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되시겠습니까?
썩어질 것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 부정한 죄악의 모습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들은 풀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불신의 눈, 비웃는 눈, 교만의 눈, 시기 질투하는 눈이 되지 마십시오. 그들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여러분의 눈길을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가 여러분에게 기쁨과 승리를 주십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에게만 참된 행복과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똑같은 상황을 살면서 한 사람은 휘파람을 불며 미소를 띄우며 확신과 성령에 충만하여 환희와 기쁨과 감격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불안해하고 짜증을 내며 넘어집니다.
눈은 인생의 등불이요 길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인생길은 달라집니다. 원망과 탄식 그리고 멸망으로 갈 수도 있고 생명과 평안 그리고 기쁨이 넘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과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는 모든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주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술에 한없는 기쁨과 찬송이 넘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의 삶은 무엇을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고 말씀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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