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대박 소식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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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이유는?
온 세상이 기뻐해야할 이유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식이 가장 가슴을 뜨겁고 설레게 만드는 소식인가? 이번에 폭설로 인해서 학교가 경기도 전역에 휴교령을 내렸을 때 기쁨의 소식으로 듣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특히나 교육부에서는 아무리 비가 많이와도 어떤 일이 있어도 단호하게 휴교를 내려주지 않는다. 정말 재밌었던 것은 최근 나라에 이슈가 있을 때 이 시국에 “학교 휴교하나요?”라는 댓글이 많이 보여서 진짜 학교를 안가려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육부는 뉴스에 학교 휴교령을 내리지 않고 정상 등교한다고 속보에 뜬 것을 보았다. 그렇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전도사님이나 여러분이나 선생님들이나 모두 듣고 싶어하는 소식은 “학교 쉽니다, 회사 쉽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반장 선거할 때나 학생 회장 선거할 때 보통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와 이 친구가 회장, 반장되면 우리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겠지?”하는 기대감 때문에 누구를 뽑아야 하는지 고민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유능하고 센스있는 회장이 당선이 되어 교장선생님과 딜을 잘해서 학생들이 너무 획기적이고 좋은 공약들을 지켜서 혜택들을 학교에서 누리게 된다면, 학교가는 것이 그래도 싫겠지만 기왕가는거 너무나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가게 된다.
이처럼 여러분이 엄청나게 유능한 사람이 회장이 된다고 하면 기대가 되고 설레는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로마에서 어마어마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원래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이라고 부른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보통 알고 있는 것은 ‘good News’이다. 그러나 2개 더 있다. Gospel과 복음 전도라고 불리는 evangelism 단어가 있다. 복음이라고 불리는 단어를 언제 처음 부르게 되었냐면, 로마시대 1세기 당시 황제의 탄생이나 왕이 됨을 선포하는 즉위를 ‘복음’이라고 불렸다. 그렇게 왕이 된 새로운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그 왕이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수많은 전쟁 속에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렇게 황제가 이룬 평화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자는 황제의 백성이 되기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자유로운 로마 시민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 황제였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왕으로 찬양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렸기에 신으로 숭배했었다. 그의 생일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시작이었다.
그러한 로마의 강력한 시대 속에서 억압되어 로마의 속국이 되어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드디어 로마로부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유롭게 해줄 강력한 왕이 올 것을 이사야 말씀을 붙들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 황제가 통치하던 당시에 황제가 아닌 다른 것을 숭배하면 곧장 사형과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자신들을 자유롭게 해줄 구원자가 절실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믿음으로 붙들고 살았던 복음의 내용은 이사야서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이다. 유배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기쁜 소식, 복음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억압하는 나라가 물러가고,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독립국가로 강대국이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이사야에서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선포다. 그들이 기쁜 소식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사야가 말씀을 선포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한 삶에서 떠나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가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며, 점점 음란해져가는 이스라엘을 돌이키려 앗수르 제국의 핍박 속에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더욱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다가 끝내 다음 선지자였던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무려 70년을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했다. 바벨론으로부터 포로생활이 끝나고 바벨론이 무너지면서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가 그들을 억압하게 되었고,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게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 유대인들의 상황이다. 그러니 더욱 자신을 구원해줄 구원자를 더욱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우리가 읽은 본문 2장을 전체적으로 읽다보면 8절부터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때를 돌보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목자는 천한 계층에 속했다. 목자들은 법정의 증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밤에 동네 밖에서 생활하는 목자들은 강도 짓을 하는 자들로 오해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룩한 주의 천사는 당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춘다.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나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 영적인 일, 예수의 부활에 사용된다. ‘좋은 소식’은 큰 기쁨을 선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그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기쁨의 뿌리가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목자들은 기뻐해야 한다.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도시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가리키지만, 본문은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도시’라고 말했고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일어난 일들을 확인하자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다윗의 동네가 베들레헴임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을 ‘구주’와 ‘그리스도 주’로 소개된다. 구약에서 ‘구주’는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구원자, 백성을 돕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사용된 용어였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구원자는 통치자에게 붙여진 칭호였다. ‘주’는 로마 사람들에게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바로 떠올리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주’는 하나님의 칭호이다. 여기 말씀에서 ‘오늘’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시작된 것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메시아ㄷ가 탄생한 장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구주’, ‘주’, ‘그리스도’를 증거로 보여주는 현장을 보게 된다. 초라한 탄생 장면이지만 하늘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으로 찬송이 울려 퍼진다. ‘찬송하다’는 하늘의 합창단 또는 군악대의 역할을 하는 하늘 군대가 주의 천사와 함께 우렁차게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계획을 시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으로 땅에 거하는 백성이 구원의 혜택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이 땅의 평화로 나타난다. 구주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평화는 치유와 회복으로 실현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이 평화가 임한다. 과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었으나 그 대상은 모든 사람, 모든 민족, 열방으로 점점 확대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린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만민 곧 모든 사람을 위해 준비된 선물’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백성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이스라엘의 위로’는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구원이었다. ‘만민’은 유대인 입장에서 우리 같은 외국인인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한다. 만민이 경험할 구원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된 구원은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빛은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르치고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에 예고된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현된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셔야지 그 모든 사실이 믿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살아가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기 원한다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이 주인으로 인정이 되고 성경의 모든 사건들이 믿어질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기쁨으로 살아가며 그 구원을 누리면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누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한다.
여러분은 북한을 보면 어떤가? 자유로워 보이는가? 그곳에 사는 북한의 동포들은 3대의 김씨 일가의 독재로 억압된 삶을 살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무리 인민들이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김씨 일가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 모든 수입을 그 집안에 가져다 바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정작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더러 얼마나 최악의 독재집단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만약에 그리스도가 주인되지 못한 삶이라면, 세상 바깥에 살아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어쩌면 이런 모습과 같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 어느 것도 자신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보통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죽고 난 후에 얻어지는 구원만 생각하면 반쪽짜리 신앙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다. 내가 내 삶에서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이 이 땅에서 누리는 구원이다.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대박 소식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모태신앙이라고, 부모님이 교회다닌다고, 내가 지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더 이상 죄의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 목표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구원받는 인생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은 크리스마스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부활절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추수감사절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과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매일 감사하며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전도사님,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나요?” 그에 대한 대답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들도 예수님의 실체는 알지 못했으나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과 그들이 살면서 예수님이 오심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이기에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자신있게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라고 고백하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길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