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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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첫 번째 주일에 믿음으로 인한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지난 두 번째 주일에는 평화/평안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 가운데, 주신 예수를 통하여 믿음과 소망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주일로서, 스바냐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스바냐서의 배경을 본다면, 사실 아직까지 기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오히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날이 바로 심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예언하던 스바냐는 마지막 3장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심판을 예언하던 이가 기뻐하라는 말로서 글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왜 지금 상황에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근거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시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연말을 맞이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나 상태보다는 스바냐가 제시하고 있는 그 근거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슬픔과 두려움, 낙심과 좌절 중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오늘 말씀을 듣고 믿어 기쁨이 회복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기쁨의 근거 4가지를 먼저 살펴보고, 기뻐하라는 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근거 첫 번째는

우리의 형벌이 제거되고 원수가 쫓김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저희 부모님은 매우 엄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부모님이 엄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제가 말썽을 너무 많이 피운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무슨 잘못을 하면 부모님께 회초리도 꽤 맞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각해보면, 거의 비슷한 잘못을 반복해서 혼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비슷한 잘못을 하고 또 똑같이 혼이 날까봐 무서워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길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어두워지면 몰래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댓가로서 형벌이 남아 있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또 우리를 유혹하고 때로는 공격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가 있다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학교에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학교 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형벌과 원수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제거하였고, 원수를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어떻게 그 일을 이루셨습니까? 바로 이번 성탄절에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단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심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십자가의 공로를 생각할 때, 어찌 아니 기쁠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이 권면하듯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 근거는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천사가 한 말로 요약하면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왜 우리의 기쁨이 됩니까?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쫓겨난 사단마귀가 자꾸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입히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나누었던 가치인 “평화” 깨어지지 않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일입니까?
일제 식민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습니까? 그런데, 독립을 이루고 우리 민족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비록 그 이후로도 죄인된 인간들이기 때문에 같은 민족으로 인한 불화와 고통이 있었습니다만, “참된 평화”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근원이 됩니다.

우리가 기뻐할 세 번째 근거는

여호와가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신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를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뜻은 그냥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에 겨워 뛰어 노는 것을 흐믓한 눈으로 바라보신다는 의미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죄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 죄를 덮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를 보시며 기뻐하시고 즐거이 부른다는 것은 기쁨의 노래를 흥얼거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기쁘시고 행복하시면 그렇게까지 합니까?
실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기뻐하고 환대해준다면 얼마나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까? 특히나, 내가 생각하기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나 참 좋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여겨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일입니까?
저는 성도님들이 목사님을 참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해주시면 너무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좋아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되고 기쁨이 됩니까?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가 기뻐할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당하는 수치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기쁨의 근거는 하나 같이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네 가지를 전부 동시에 이루시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을 잠잠히 사랑하며 그로 말미암아 즐거이 찬송을 부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감정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가. 그 기쁨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며 예배하게 합니다.

찬양과 예배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에 겨워 드리는 자발적인 헌신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늘어뜨리지 않습니다.

손을 늘어뜨린다는 것은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했던 일들을 이제는 포기하고 그만 두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즐거워한다는 히브리어 “알라즈”는 승리한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무기력에서 벗어나서, 권능을 힙입어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게 하시며,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까?!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마음이 뜨거워져서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번아웃되거나 고갈되지 않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기쁨의 근거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다시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신 예수님, 우리의 함께 하시는 성령님,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수치를 씻겨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시며 세상적인 즐거움과 기쁨이 아니라, 참된 기쁨으로 승리하시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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