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한 모임과 해로운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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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고린도전서 11:17-34
“유익한 모임과 해로운 모임”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2024. 12. 17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유익한 모임과 해로운 모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세상에 많은 모임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유익한 모임도 있고 해로운 모임도 있습니다. 계모임이나 동창모임, 동호회모임, 등산 모임, 운동모임 등등 크고 작은 모임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 가장 건전하고 가장 유익한 모임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교회 모임입니다. 교회모임 만큼 건전하고 유익한 모임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모임이 해로운 모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 1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7절 시작,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너희의 모임, 고린도교회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모이는데, 왜 그것이 유익한 모임이 못되고 해로운 모임이 될까? 그 이유를 바울이 이어서 설명을 해요.
1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교회에 성도들이 모일 때 뭐가 있어요? 분쟁이 있어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데 분쟁이 있더라는 겁니다. 이 분쟁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스키스마”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찢어버리다, 잡아뜯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모임이 있을 때마다 누가 찢어버리는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 교회가 어떻게 되냐면, 파당이 생기는 거예요. 서로 분열이 되어서 끼리끼리 모여 파당을 이루는 거죠.
그런데 밑에 19절에서 놀랍게도, 바울이 파당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파당이 안 좋은 건데, 그나마 한 가지 유익한 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드러내 준다는 겁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이 더욱 밝게 빛나듯이, 파당이라고 하는 어둠 속에 있다보니까,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부각된다는 것이죠. 또 동시에 정말 믿음의 일꾼인 줄 알았던 사람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서 공동체를 실망시키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도대체 교회가 어떤 모임을 가졌길래, 이처럼 성도들이 분열이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그 모임이 성찬의 모임이었다고 말씀합니다. 20절에 보니까,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주의 만찬, 이것이 성찬이죠.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예수님이 떡은 나의 몸이고, 포도주는 나의 피라고 하시면서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라고 하셨어요.
오늘날에 우리는 성찬을 절기 때나 중요한 날에만 몇 번 하지만, 초대교회 때는 수시로 했습니다. 당시의 문헌기록들을 보면, 최소 일주일에 한번 이상 성찬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는 심지어 매일 성찬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2장 4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날마다 모여서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찬을 했다는 거예요. 이처럼 초대교회 때는 성찬을 굉장히 자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주 예수님을 기념하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성찬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은혜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체험하는 귀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찬을 자주하면 자주 할 수록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성찬을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는데,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더니, 교회가 1년에 4번만 성찬을 하고 있어서 굉장히 실망을 했다고 그래요. 1년에 4번.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이렇게 4번만 성찬을 하고 있었거든요. 오늘날에 대부분의 교회가 비슷하죠.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혹은 맥추감사절에 하기도 하고요. 송구영신 때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성찬 대신에 같이 점심을 먹죠. 정확한 신학적 의미로 보면, 성찬과 점심식사가 같다고 볼 수 없겠지만,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하고 은혜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보면, 점심식사도 일종의 성찬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은혜가 넘쳐야 할 그 시간에 분쟁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밥이 잘 됐네, 안 됐네. 국이 짜네 싱겁네. 이런 불평의 소리들이 나오고 하면 은혜가 안 돼요. 또 식사후에 같이 치워야 되는데, 치우는 사람만 치우네 안 치우네 하면, 이 역시도 덕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성찬을 할 때 분쟁이 있었어요. 예수님을 기념해야 할 성찬의 자리가 분쟁의 자리가 되고 만 겁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겼을가요? 오늘 본문 21절에 그 이유가 나와요.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성찬을 하는데, 먼저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먼저 먹는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뭘 먹었습니까?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먹었죠. 20절에 보면, 이 만찬은 주의 만찬입니다. 자기의 만찬이 아니라, 주의 만찬이에요.
오늘날에는 우리가 성찬을 준비할 때, 책정된 예산을 가지고 떡과 포도주를 준비해서 그것을 먹죠. 하지만 초대교회 때는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았어요. 각자가 자기 먹을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21절에서 말하는 “각각 자기의 만찬”이에요. 각각 자기 것을 챙겨와요.
하지만, 가져올 때는 각자 가져오더라도, 먹을 때는 각자가 아니라 같이 먹어야 됩니다. 성찬은 같이 먹을 때 연합됨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각자 따로 먹으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럴 거면 그냥 집에서 혼자 먹지, 왜 여기까지 와서 먹겠어요?
그래서 22절에 바울이 이렇게 책망을 하죠.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혼자 먼저 먹을 거면 너희 집에서 먹지, 집이 없어서 교회에서 먹냐?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서 뒤에 또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먼저 먹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의 의미를 깨트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뿐만 아니라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돼요. 빈궁한 자들은 사실 매주일마다 성찬 음식을 준비해 오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초라한 음식을 갖고 오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아예 빈손으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야 되잖아요. 그런데 부자들은 그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 전에 먼저 먹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찬은 자기 것을 주장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아까 우리가 사도행전 2장 46절을 봤는데, 바로 그 위에 44절 45절을 보면, 그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눴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날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은 겁니다. 그러니까 성찬은 그 음식을 서로 통용하는 거예요. 각자 따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아멘.
서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먹지 말고, 기다렸다가 다 모이면, 그때 다같이 축사하고, 음식을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면, 그 모임이 유익한 모임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 특별히 성도들이 모일 때, 그 모임은 유익한 모임이어야 합니다. 모여있으면서도 파당을 짓고 따로국밥이 된다면 그 모임은 해로운 모임이에요. 그런 모임을 가질 바에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하는데, 나보다 뒤쳐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또 믿음의 성장이 더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역이 급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있습니까? 같이 보듬어 가야죠. 그들이 성장하도록, 그들이 나와 함께 가도록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국동제일교회가 서로 돕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기다려서 모일 때마다 즐겁고, 함께 일할 때마다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