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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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오브크라이스트

저는 아버지가 목사님이신 소위 모태 신앙인으로서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농담삼아서 신앙생활을 못한다 할 때 그 “못해” 신앙인으로서 자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회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아주 성경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로 극찬을 받는 영화인데요, 저희 어머니는 아주 눈물을 펑펑 쏟아내시면서 영화를 보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혹시 저 영화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여러분에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 영화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고난받고 달리신 십자가”입니다라고 답변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고난이고, 저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달리신 곳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라 못해 신앙인으로서 어렸을 때 믿음이 없던 시절에 봤을 때에는 저 영화에 그려진 예수님이 겪으신 굉장히 잔혹한 고난을 보고서 “으~ 아프겠다” 정도로만 보고 끝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영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아주 잘 표현했지만, 저한테는 그 고난이 저한테는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저희가 오늘 준비찬양으로 십자가와 관련한 찬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마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그냥 처형도구 였을 뿐이었습니다.
저희가 지금 교회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에야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기 쉽지만, 십자가란 원래 그 용도가 처형대였고, 그래서 실제로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라보는 십자가도, 저희들의 시선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 자체의 의미를 한번 파헤쳐보고,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저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폭력의 상징

죄인에게 가해지는 폭력

먼저 십자가는 단적으로 말씀 드리면 폭력의 상징입니다. 사형도구라고는 하지만 단순한 사형도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여러 국가들이 있는데요, 인권 인식이 높은 나라의 경우에는 약물 주사형으로 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니면 여전히 총살을 하거나 교수형에 처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만큼은 절대로 그렇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지 않습니다.
언제 십자가형이 처음 시행되었는지는 저희가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사료를 찾아보면 예수님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십자가형은 존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여러분도 아시는 영화 300에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의 경우 사후에 그의 시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에 처해졌다고도 하구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난 키케로라고 하는 로마 철학자는 이 십자가형이 너무나도 참혹하고 잔인해서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머릿속에 담지도 말아야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만큼 십자가형은 아주 심각한 범죄를 일으킨 이들에 대해서 행해지는 끔찍한 형벌이었는데, 왜 끔찍하나면, 먼저 채찍질을 하거나 고문을 하거나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던지게 하는 등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주는 것을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아 놓게 되면 사람이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고통스럽게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이 십자가형의 목적이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도 고통을 받다가 숨을 거두게 만들어서 “이런 죄를 저지르면, 이런 끔찍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라고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전에 제가 역사를 설명드리면서도 말슴드렸지만 유대-사마리아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니까 반란자들을 2000명이나 체포해서 모두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행해지던 십자가형은 “로마에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키면, 너희들에게 이런 끔찍한 형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죄인에게 가해지는, 무엇보다도 아주 끔찍한 폭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저지르는 폭력, 반란

반면에 십자가는 또 다른 의미로, 그 죄인이 저지른 폭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들이 그런 폭력에 포함되기도 합니다마는, 이는 단순히 “나는 이 나라 시스템이 맘에 안들어요!”라고 말로만 한다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구요, 노예 즉 종이 주인에게 반역해서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또한 아예 무기를 들고서 군사적인 반란을 저질 때에야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열심당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들은 아주 유대교에 극성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항상 품에 단도를 숨기고 있다가 유대인의 배신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암살하기도 하고, 로마에 대대적으로 반란을 모의하던 사람들인데요, 성경에도 두 명정도 이 열심당이 등장을 하죠.
Luke 6:15 NKRV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베드로가 아닌 시몬이 셀롯이라고 하는데, 이 셀롯이 당시에 살인과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으려고 했던 열심당을 의미합니다.
Luke 23:19 NKRV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바라바라고 하는 인물도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혔다고 하는데요, 이 열심당원의 속성을 아주 잘 표현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라바와 셀롯 시몬은 로마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심볼을 넘어서서, 폭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고 한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형벌을 내리는 도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정당성 부족

근데 문제는 이겁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반란 군사를 일으켜서 로마에 대적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막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으셨어요.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로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황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칭하게 되면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반란의 여지가 있게 됩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는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Mark 3:11–12 NKRV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Mark 8:29–30 NKRV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메시아 비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않게 감추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혐의가 부족했습니다. 계속 어떤 껀덕지를 찾으려고 하는데도 찾을 수가 없는거예요.
그러다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만찬 이후에 일단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심문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게 됩니다.
Mark 14:61–62 NKRV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스스로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빌라도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Mark 15:2 NKRV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가까워질 때가 되어서야 스스로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성경을 보시면, 말하는 뉘앙스가 “이 사람은 딱히 죄가 없어보이는데?”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 혹은 그리스도와 메시아를 자칭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람들을 이끌고 군을 조직해서 군사적인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조직한 일도 없고, 사역 중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저기 소문내라고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감추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단어가 굉장히 위험한 단어이긴 합니다. 로마에게 있어서 왕은 마치 헤롯 대왕처럼 황제가 임명해서 다스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자칭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고, 스스로 메시아이며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이들은 대체로 반역자들이었기 때문에 로마로서는 충분히 기소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처형한 일은 합리적이고 법적인 것일까요? 문제는 진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누구를 풀어줄 것이냐고 묻는데서 등장합니다.
Mark 15:7 NKRV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바라바는 당시에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진짜 반란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람도 죽이기도 했고, 민란을 일으켜서 로마에 대적하려고 했던 열심당원이었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부당함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폭로의 상징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는 타이밍이 언제라고 했죠? 십자가가 가까워졌을 때라고 했습니다. 그말은 십자가가 없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지신 직후에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이 고백되어집니다.
Mark 15:39 NKRV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현장은 십자가 이후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눈먼자를 눈뜨게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게 아니라, 군을 조직해서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받았던 십자가 형벌을 받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세상에 들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침뱉고 돌던지라고 세워놓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졌을까요?
1 Corinthians 1:25 NKRV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리고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고 약한 것을 나타냅니다. 힘도 약하면서 감히 로마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대항하다니 어리석은 일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강함을 나타내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죄에 빠져있는 저희를 구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곧 저희를 향한 사랑임을 나타냅니다.
Romans 5:8 NKRV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함은 누구보다도 약한 저희들을 인정하시고 공감하시는 약함입니다.
Hebrews 4:15 NKRV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약해 빠져서 죄 가운데 허우적대고 있는 저희들의 마음을 아시는 약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십자가는 로마에게 있어서는 폭력의 상징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하는 폭로의 상징입니다. 너희들이 못박은 그 예수가 곧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폭로하는 폭로의 상징입니다. 죄 짓는 인간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셔서 죄 없는 예수를 죄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을 폭로하는 폭로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오늘 본문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Galatians 2:20 NKRV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하신 그 십자가에 함께 못박힌 사람들입니다. 비록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폭력의 상징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폭로하는 폭로의 상징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세상이 죄 가운데 빠져있는 꼴을 도저히 못보셔서 스스로를 내던지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의미한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저희가 얼마나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한국이랑 다르게 저녁에 밖에 나가질 못했어요. 미국은 밤이 아주 위험한 나라기 때문이죠.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까지 칼부림 난동이 일어나는 등 저희가 얼마나 폭력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고 계엄이나 탄핵과 관련하여서도 정치적으로도 얼마나 폭력적인 세상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런 폭력적인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하는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합니다.
바라바처럼 민란과 살인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로마가 반란군을 싸그리 십자가 형에 처하는 것처럼 그러한 폭력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폭력의 십자가를 지우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폭로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합니다.
1 Peter 2:20–21 NKRV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롤라드

제가 작년에 유학하다가 잠시 한국에 있을 때, 교회 청년들과 함께 뮤지컬을 보러간 적이 있습니다. 바로 더 북: 성경이 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뮤지컬인데요, 이 뮤지컬은 14세기 말에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서 사람들에게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전해주고자 했던 롤라드파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고 막는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짧은 영상이 있어서 함께 보고자 합니다.
(영상)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달리는 고난을 감수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고통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무릅쓰고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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