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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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3
“신령한 것에 대하여”
찬송가 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2024. 12. 20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신령한 것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부터 전체적으로 예배 모임 중에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의 복장의 문제를 다루었고, 두번째는 성찬 모임 때 먼저 먹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번째로, 오늘 본문에서부터는 은사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은사. 오늘 본문에는 “신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영어성경에는 “Spiritual gift”라고 되어 있어요. 영적인 선물, 은사를 말하는 거죠.
고린도교회의 예배 모임 가운데 이 은사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장의 문제나 성찬의 문제도 골치였지만, 사실은 은사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어요.
그래서 은사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길게 바울이 말씀을 합니다. 오늘 본문인 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서 은사에 대해 말을 해요. 그만큼 은사의 문제가 고린도교회 안에서 심각했다는 겁니다.
자,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절 시작,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아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말을 합니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너희가 좀 알아라” 이런 말이죠. 무엇에 대해서 알라는 겁니까? 신령한 것에 대해서, 은사에 대해서 알라는 겁니다.
고린도교회가 은사를 많이 받고, 영적 체험을 많이 함으로써, 자기들이 은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영적인 교만이죠.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교만을 깨기 위해서, “너희가 은사에 대해서 알기를 바란다”고 말을 한 겁니다. “너희가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너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여러분, 은사만 많이 받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은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돼요. 그래야 은사를 제대로 잘 분별해서 사용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바울이 볼 때, 지금 고린도교인들이 분별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무절제하게 영적인 일들을 행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자, 2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이 말은 지금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특별히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교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은사를 받은 너희,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너희가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다니지 않았느냐?’ 이런 말이에요.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을 말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 다녔다는 거예요. 이 말은 곧, 교인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상을 믿는 이방종교를 통해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에 취했든지, 혹은 마약을 했든지 해서 정신을 잃고, 어떤 황홀경을 체험했다는 겁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고, 기분이 좋고, 하늘이 빙빙 돌고, 누가 귀에 속삭이는 것 같고… 이런 체험들을 예수 믿기 전에 다들 해봤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은 성령체험이 아니죠. 은사도 아니고. 그것은 그냥 정신이 나간 거예요. 술에 취해서, 또는 뭔가에 취해서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이것을 성령체험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 성령체험이 아니거든요.
‘내가 무슨 꿈을 꿨는데,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니까 이것은 예언의 은사다. 안수해줬더니 어깨가 안 아프네, 치유의 은사다.’ 이런 식으로 뭐만 좀 신기하면 다 은사라고 그래요.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방 종교에도 나름대로 자기들이 믿는 신의 힘으로 능력을 사용하거든요. 무당들도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기도 하고, 굿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을 성령체험이나 은사라고 말하지 않죠.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런 것을 다 은사라고 말을 한다는 거예요. 무슨 은사, 무슨 은사.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신앙의 급수를 나눠서 무슨 은사는 좋은 은사고, 무슨 은사는 안 좋은 은사라고 차별을 해요. 뿐만 아니라 은사가 없는 사람은 아예 대놓고 무시를 합니다. 그렇다보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은사가 없으면 기를 못 펴고, 반대로 방탕하게 살아도 은사가 있으면 큰소리를 떵떵 친다는 겁니다.
교회가 말씀 안에서 진리를 지키고, 서로 사랑으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은사 하나로 모든 것이 휘둘려버려요.
그래서 바울은 먼저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겁니다. 너희가 과거에 말도 못하는 우상들에게 빠져서 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이어서 3절에, 우상의 체험과 성령의 체험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성령체험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과연 진짜 성령체험이 맞는지, 아니면 우상의 체험인지를 판단해보라는 것이죠.
자, 3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멘.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어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성령을 체험한 자죠. 또는 은사를 받은 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아요.
여기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한다’는 말은 ‘예수를 욕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높여드리고 영광을 받게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은 자는 절대로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요.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떠한 삶을 사는가 하면,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3절 끝에 보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죠.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를 주시라 고백한다는 말은, 말로만 고백을 하는 게 아니에요.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진정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내 입술로 고백한 그대로,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주시라” 하는 삶이에요. 이런 삶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체험을 한 사람과 우상체험을 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성령체험을 했고, 은사를 받았다고 백날 떠들어봤자, 그의 삶이 예수를 욕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가짭니다.
지혜와 지식이 넘치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어떤 신령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는 삶을 살아내지 않는다면,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짜가 너무 많아요. 진짜처럼 행세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짜들이 고린도교회에도 많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에요. 사랑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 형제가 은사가 없다고 해서, 사역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차별을 하고 무시를 해서는 안 돼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 기다려줘야 됩니다. 기다려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다려주는 것이고, 그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려주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나와 발맞춰 갈 수 있는 수준까지 연단되어지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났다고 앞서가다가는 형제를 앞지르고, 앞지르고 하다가 결국에 예수님까지 앞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앞지르면 안 돼요.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형제와 함께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공동쳅니다. 뒤따라가는 길에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받고 못 받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뭐라고요?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은사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뒤에 31절에 가서 보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바울이 권면을 하거든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은사를 받는 것도 필요해요. 그러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우리는 은사를 사모하기에 앞서서 먼저 예수를 주시라 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예수를 주시라 하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서, 나 혼자가 아니라 형제를 보듬어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는 은사나 어떤 신령한 체험이 없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국동제일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 나를 높이기보다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겸손한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날마다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덕을 세우는 교회.
우리 모두 그런 교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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