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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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서론]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 작품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의 관심 영역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던지는 작품입니다.
보통 우리는 악에 대해 생각할 때, 잔인하거나 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며 괴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 악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무관심의 벽이 얼마나 무서운 악인지 알게 됩니다.
무관심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나 진실을 외면하는 선택이며, 이 선택은 결국 악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 무게와 심각성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오늘 함께 나눌 시편 110편은 악과 선의 경계선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행위로 나타나는 악을 넘어, 마음속 무관심과 하나님을 외면하는 태도가 얼마나 치명적인 악인지 깨닫게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무관심을 깨우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지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시편 110편의 저자는 다윗 왕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칭하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왕을 "내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다윗이 “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그가 바로 메시아 왕입니다.
다윗조차도 경배할 만큼 뛰어나고 온 세상을 구원할 왕이신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메시아는 단순히 한 나라의 정치적 통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온 세상의 궁극적인 구원자입니다.
시편 110편은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의 상황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우리 모두의 소망이신 메시아를 선포하는 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도 절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110편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길 위에서 새로운 소망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약속이 성취되고 잃어버렸던 영광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새롭게 재건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너무 초라했습니다.
땅은 황폐하며 기근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무너졌고, 악인이 번성하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더 큰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백성들은 이 모든 부조리와 악을 바로잡을 메시아 왕을 더욱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다림과 소망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와 악이 만연해 있습니다.
부가 세습되며 빈부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근, 그리고 기후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우리의 삶을 위협하며,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차별, 폭력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는 정의를 세우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며, 온전한 회복을 이루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다윗이 "내 주님"이라고 부른 메시아 왕은 바로 이러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을 이루실 분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메시아 왕에게 “내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메시아 왕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2절에서 메시아 왕은 권능의 지팡이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며, 원수들을 발아래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럼 과연 원수는 누구일까요?
이 원수는 단순히 과거의 전쟁과 갈등 속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민족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원수의 본질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적이 아니라, 죄와 악을 퍼뜨리는 사탄과 그의 영적 졸개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안에 뿌려놓은 악의 씨앗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이 무관심은 다른 이름으로 이기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메시아 왕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 안의 이러한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원수를 짓밟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바로 원수와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기심과 무관심을 물리치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곧 메시아 왕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가 통치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메시아 왕의 사랑과 정의를 어디에서 있을까요?
그 답은 4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0편 4절은 메시아 왕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임을 말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으로 묘사되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왕과 제사장이 본래 분리된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은 이 두 역할을 모두 수행했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메시아 왕이 멜기세덱을 언급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메시아 역시 왕이자 제사장으로, 두 직분을 완전하게 감당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왕은 다스리고 통치하는 역할을 하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인도합니다.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하실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뿐입니다.
우리의 메시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이십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길을 여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며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셨습니다.
동시에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두 실현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메시아 왕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귀신을 내쫓으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와 악이 만연해 보이는 이 세상이지만 왕되신 예수님이 원수인 마귀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십니다.
물론 아직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죄와 악이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이 세상에서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손해를 보거나, 무력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그분임을 믿는다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3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편 110편 3절은 메시아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지 보여줍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표현하지만, 새번역 성경은 이를 “왕이 전쟁터로 나가는 날”로 번역합니다.
이 날,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며 왕을 따릅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새벽이슬은 각각은 매우 연약하지만, 그들이 함께 모일 때 땅과 나무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왕의 일이자 우리의 일입니다.
여기서 청년이란 단순히 육체적 나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메시아 왕 예수님을 따라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을 청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이 세상에 부활 생명을 흘려보내는 사람은 누구나 새벽이슬 같은 청년입니다.
“거룩한 옷”은 무엇일까요?
이는 죄를 떠나 경건한 삶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삶은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무관심과 이기심의 옷을 벗고, 사랑과 정의의 새 옷을 입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세상에 부활 생명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강제나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즐거이 헌신하며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경험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왕을 따릅니다.
우리의 기쁨의 헌신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세상의 무관심과 이기심은 우리가 싸워야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싸움을 완성시키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왕 예수님이십니다.
시편 110편 5-7절은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은 이 땅의 모든 사탄과 죄악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싸움을 이기시고, 시냇물을 마시며 머리를 높이 드실 것입니다.
이는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의 운명은 분명히 갈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처럼 무관심과 이기심 속에 벽을 허물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수인 사탄의 하수인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최종 승리하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어느 누구도 지는 자의 편에 서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결과를 아는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아 왕이신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의 질서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셨고, 그분의 통치를 따르는 삶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를 볼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중요한 한 폴란드 작은 소녀가 등장합니다.
칠흑 같은 밤, 그 소녀는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 빛은 땅에 사과를 숨겨 놓습니다.
그 사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찾아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걸고 준비한 것입니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이 소녀의 용기는 생명을 흘러보내는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크리스마스날, 나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너뜨려야 할 무관심과 이기심의 벽은 무엇입니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메시아 왕 되신 예수님께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깊이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걷는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따라 살아가는 용기 있는 삶을 선택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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