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목장설교_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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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회복

본문 : 스바냐 2:1-3
스바냐 2:1–3 NKRV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수요목장예배
제목 : 헤어지지 않을 결심
본문 : 스바냐 2:1-3
1.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 지어다
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오늘 스바냐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본문을 보니 참 이렇게도 오래된 구약의 말씀인데, 신비하게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 참 닮은 모습들이 담겨있어서 그다지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연일 뉴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고, 혼란스러워보이지요? 국제정세이든지, 국내정세(정세: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든지 매일 매일이 예측가능한 선을 넘어서, 변동이 심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불변하는 진리를 가진 자로써 안도할 수 있다는 안전지대에 거하고 있음을 오히려 더 뚜렷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무엇이 불변합니까?
모든 것은 다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하고, 또 그 사랑만이 우리에게 영원합니다.오늘 여기모인 삼일의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현실이, 영원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저 세상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뉴스의 분위기에 따라, 국내외 정세에 따라서 곧잘 휩쓸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이 완전한 주님의 사랑 앞에서, 다시금 감사함으로,  또한 스바냐서에서 주님이 격한 어조로 외치시는 이 말씀 앞에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겸허하게 서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론)
성경 스바냐서는 구약의 12선지서 중에 한 권입니다. 12소선지서는 호세아부터 시작하여 말라기서까지를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선지서로 분류된 성경은 선지서 만의 독특한 이야기 구조가 있습니다. 심판, 구원, 회복에 대한 일반적인 패턴이 드러납니다. 스바냐서 또한 동일한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동시에 스바냐서는 ‘심판’으로써의 여호와의 날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성경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메시지 맥락으로 유난히 강조 된 것은 아무래도 그 시대에 대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시대였는가 보니,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에 사역한 선지자로서, 이 시기는 주전 641년쯤 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앞서 1장 서두에 밝히기를, 스바냐는 왕족 출신이라고 나옵니다.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지요. 히스기야에게 아마랴와 므낫세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스바냐는 아마랴의 아들 그다랴, 그리고 이어 구시의 아들입니다. 왕의 가문이라는 출신배경을 볼 때, 시대적 정세 또한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바냐는 자기를 소개한 후 바로 이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맹렬하게 전합니다.
당시 어떠한 배경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왕이 통치하던 때에 있었던 역사적인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특별히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으로 유명합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필요했던 시대적 긴급함을 생각해보면, 그만큼 앞선 세대가 얼마나 악했는가를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의 가장 큰 악행은 이교도(자기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혹은 무리)우상 숭배 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타종교, 다른 나라의 종교를 따라 섬기며 그 신들에게 예배하고 숭배하는 행위들을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행할 만큼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처럼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1장을 보면, 바알, 그마림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지붕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하고, 여호와께 맹세하는 동시에 말감(밀곰)을 향해 맹세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4-5절)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의 정체성, 그들 신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언약백성입니다. 모세의 설교문으로 기록된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 복을 누리며 사는 유일한 길로 주님이 주신 말씀(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들도 이야기해주었지요. 신명기의 경고들이 이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어 나타납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예언이 모두 이 신명기적 관점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스바냐서 또한 이 신명기를 비롯한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회복에 관한 예언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악행인, 다른 이교도에 대한 예배는, 언약관계에서 영원한 사랑을 제시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하던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스바냐서 서두의 말씀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분노에 치를 떨며, 저주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진멸하고 말겠다는 살의가 가득 담긴 심판의 메시지만 선포되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1장부터, 스바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렇게 예언하여 외칩니다. 진멸하겠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거센 항의를 하며 달려드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당장 너희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내가 벌하고 심판하겠다고 진노를 가득담아 절규하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환난과 고통을 예언하시며, 주님의 불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라고, 땅 위의 모든 것이 형체도 없이 소멸될 것이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볼까요? 다짜고짜 우리 자신에게 날아들고, 달려드는 분노에 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모든 진멸의 자세한 내용들을 읊으시는 하나님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왜 이렇게 화가나신건지, 하나님은 무엇에 이토록 진심으로 분노하신건지, 하염없이 번지는 불길처럼, 사그라들줄 모르는 하나님의 살의로 가득한 결심, 죽이기로 하신다는 이 결심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우리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건지 하나님의 말씀앞에 이런 저런 마음이 어수선하고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한참, 분노하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너무 너무 넘치게 화가나신 하나님 앞에서 한동안 생각해보게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고, 우리는 그분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지금 이렇게 화를 쏟으시는가. 하고 말입니다.
18절에 제시된 ‘질투의 불’이라는 부분에서, 질투, 사랑이 예측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판 그 너머의 무엇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더 깊고 깊은 하나님의 마음, 우리가 아직은 잘 알지 못해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서-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올 한 해 지나온 시간을 오직 주님의 말씀앞에서 바르게 해석받는 시간으로 마무리 하며,  새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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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보면, 본문 말씀 1절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 가리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즉,  창피한 줄을 모르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행했는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성경 원어로 보면 이 때 쓰인 단어가 ‘카사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이 ‘기다리다, 사모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의미적으로는 ‘갈망’을 말하는 거죠.
다시 말해,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갈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무엇을 잘못 했는지 죄를 알지 못 하고 깨닫지 못 하여 동일하게 죄를 반복하는 사람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또한 갈망하지 않는 사람. 즉,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간절히 기다리거나, 바라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범주 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사모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사모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정말 갈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말하지만, 실상은 현실을 잘 살아갈 방도를 다른 것에 구하면서 또 신앙생활도 하면서, 조삼모사식으로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배는 드리지만, 성경은 읽지만, 그저 그 형식자체에서 만족을 구하고,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것도 진정한 갈망을 가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갈망이라면, 그것이 마땅히 세상에, 이웃에게- 사랑으로 구현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마음과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구하고 찾으며 갈망하는 그러한 예배자를 을 바라고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갈망하고 사모한다는 것, 정말 이것이 아니면 절대 안되는 마음이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삶을 다하여, 전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주님이십니다.
1장에 서술된 하나님의 목적이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었지요. 1장에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시고, 진멸하겠다고 으름장을 내시고 2장에서 지금 뭐라고 하십니까. 그 분노가, 진노가 이르기 전에 ‘함께 모여라, 함께 모여라!
함께 모이라고 하십니다.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돌이키고 삶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포기할 수 없는, 다시금 그들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 그리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이들이 모일 것을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판만이 목적이셨다면 모으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을 모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을 위해, 회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할 것을 간절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얼마나 촉박하냐면 2절의 말씀처럼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즉, 지금 속히, 빨리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겨 같이 지나간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모츠’라는 히브리 단어인 이 단어는 구약의 용례를 살펴보면 ‘여호와의 심판’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29장5절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
여호와의 심판의 날은 이처럼 순식간에 임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함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포함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주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젊으셨을 적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전에 여러분의 부모님들께 이런 이야기를 한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때가 되면, 언젠가는 다 돌이키게 하실거에요. 그러니까 날 좀 내버려두세요.” 저는 어렸을 적 참으로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참 성실해 보이고 근면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20대 시절에는 정말 게으른 삶을 살았더랬습니다. 그 때는 뚜렷한 목표도 비전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재밌게 보내는 것, 날이 지나는 것에만 의미를 두며, 딱히 뭔가에 열심이지도 않고, 그냥 시간이 가니까 대학생활하고, 또 친구들과 노는데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세상에 취해있던 것입니다. 시시껄렁하게 놀거리가 많고, 또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제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말그대로 ‘그냥, 그냥 ’살았던겁니다. 아침이 오니까 일어나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가야되니까 가고, 친구들이 놀자고 하니까 놀고, 밤이 오면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시니까 들어가고- 딱히 그렇다고 표면적으로 죄를 심각하게 짓고 그런 삶도 아니었습니다. 풍경으로 보면, 정말 만화책속에 나오는 행인1, 행인 2처럼 무해한 존재였지만 그저 관성적으로, 무념무상으로 삶을 허비하며- 게을렀던 것이죠. 무념무상, 저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부모님이나 혹은 신앙의 선배들이 늘 잔소리를 했지요. “생각을 좀 하고, 또 뜨겁게 살고, 열정적으로 하나님 찾아라” 그러면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 돌이키시겠죠. 하나님이 어차피 하실 거니까 내버려 두세요” 제가 늘 대답한 이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출생은 모태신앙이라서 교회에 나가고,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외면적으로는 티안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로님 권사님 아들이었는데요, 제 실생활속에서 교회의 의미는 그저 커뮤니티처럼 여겼고, 현실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즐기던 제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 더 편하고, 그 선을 지키는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주인은 제 자신이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않고, 교회에서도 형식적인 예배의 모습 그 이상에 영적으로 전혀 눈뜨지 못하는 삶,  삶의 시작과 끝에 대한, 영원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도 없는 채로 살아가지만, 또 그것에 대해 알려주는 교회 공동체의 여러 권면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거절하며 살아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제 삶의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이렇게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안에서 제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시간,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말씀 앞에 굴복하게 된 은혜를 맛보고 곧이어 영원한 구원의 세계를 맛본 것이죠.
혹시 성도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영적 감각에 무딘 자들이 있습니까, 주변에 그러한 자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하시고, 말씀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우리가 오직 주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바라고 듣고, 또 그러한 자들에게 들려주셔야합니다.
나중에, 나중에 그러면서, 내 판단과 내 삶의 템포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영적인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지체하지 말고- 삶의 우선순위와 초점을 하나님께 두고-
완전하게 굴복하는, 영적 허기, 목마름을 느끼며 주의 말씀 앞에서만이 완전하게 갈망이 채워지는, 그 해갈을 맛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3절 말씀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를 찾으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부르고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규례,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화를 면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먼저 여기서 여호와를 찾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가난한, 빈곤한, 유순한,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마음에 가난한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빈곤하기에 무언가를 찾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즉 겸손한 자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만을 전심으로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메시지성경은 어떻게 표현하였냐면, ‘벼랑 끝에서 서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소유한 자들은,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는 필연적으로 심령이 가난합니다. 천국백성들의 정체성은 이 땅, 이 세상의 백성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종말이 오기 전 아직 악의 세력이 잔존한 이 땅 가운데- 천국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역은, 이 땅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심령이 늘 가난하지요. 여기에서는 늘 영적으로 허기를 느낍니다. 늘 힘들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는 주님이 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 품에 와락 안길 때, 변함없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를 만날 때- 우리는 그제서야 만족하며 영적으로 부요함을 누립니다. 풍성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과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다스리시지요.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이렇게, 늘 헤매고 방황하는 것 같은 이 현실 가운데서도, 가끔은 정말 미로와 같은 인생길에서 찾았다 싶으면 또 멀어지고 그러한 날들을 반복하면서도-
늘 온전히 우리의 푯대,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지난한 세월을 견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푯대를 향한 갈망, 그리움, 천국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지내며 느끼는 영적 허기와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거하신 풍경, 낮고 낮은 곳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구하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공의와 겸손은 무엇입니까?
공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삶,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으로 정확하게 구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른 길과 올바른 삶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바른 것, 올바른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정의와 공의, 겸손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받을 형벌을, 진노를
예수님이 대속하심으로- 깨끗하게 되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멸절, 죽음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이것은, 실상 말씀만 놓고 보면 우리가 찾아 헤매온 길처럼 보이나, 우리가 아니라-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스바냐 1장 서두에서부터, 맹렬하게 심판을 외치던 주님께서는 또 다시 선지자를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기다리시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회개의 탄원을 하시고, 또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무 애절하십니다. 스바냐서 1장부터 3장까지를 쭉 읽어보면
마치 사랑의 서사가 너무나도 애절한 원맨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하여 포기하지 않고, 그분의 자녀답게 만드십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 존재하는 양식은, 거룩의 삶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기19장)
거룩이 우리 삶에 실현되는 것은, 온전한 이웃사랑입니다.
야고보서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사랑하며, 거짓말하지않는 것, 이웃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사랑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러한 애절한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백성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로 돌이켜 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제 곧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느 곳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백성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 애절한 마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선교를 앞두고 있는 지금, 또 다음 주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는 시간.
단지 우리들만이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정확히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성탄이 되길 바랍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며 언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는지 알지 못한채로 두려움도 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날에 구원 받을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또 장년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라고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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