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31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모든 일에 어떤 경계를 ‘딱’하고 넘어서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이구나 하는 감각적인 경험을 하거나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왜 나는 안되지’하는 벽을 느끼는 경우는 한 번즘은 있을 겁니다.
지난 주 빈 무덤에 대한 저자 요한의 이야기를 살폈습니다. 첫 번째, 안식일의 의미와 하나님의 안식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 쉼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임재를 담고 있는 날이죠.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의 완성과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 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임재 안에서의 쉼,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시간이지만 저자 요한은 마치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없는 이스라엘의 유월절 그리고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반전의 사건이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빈 무덤에서 일어난 예수님 말씀의 성취 즉 ‘다시 살아남’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의 다시 살아남’을 기적이라는 눈은 뒤로 하고 영적인 것 보다 앞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오히려 기억한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자들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두 번째, 제자들과 마리아를 통해 본 것과 들은 것을 비교합니다. 요한복음은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긴장을 통해, 참된 믿음은 눈으로 확인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닫는 데서 온다고 강조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오늘 살필 다른 제자들의 경험에서 보겠지만, 그들은 눈앞에 드러난 부활의 표적을 보고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여자여라고 불렀던 예수께서는 16절에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이야 말로 나를 아는 이에 대한 반응 아닙니까?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려 반응을 하고 ‘저를 어떻게 아시죠’, ‘누군데 저를 부르시죠’라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부른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제 마리야는 본 것에서 벗어 나게 됩니다. 그녀의 믿음은 단순히 눈으로 본 사실에서 벗어나, 예수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기억하고 온전해졌습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격적 관계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거룩한 임재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우리의 삶과 믿음 안에 실현된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가 보았던 빈 무덤은 부활의 사실보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벽 앞에 선 것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영적인 존재’조차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밖에는 없는 것이죠. 이런 문제는 우리의 삶에도 매일 매 시간 일어나는 너무나 평범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떤 벽’에 선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공부일 수도 있고, 다이어트도 가능하고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제의 실체를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가요? 이런 질문을 던져 놓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 보면, 19절 ‘안식 후 첫날 저녁 때’라고 했습니다.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니 토요일 저녁에 시작한 안식 후 첫날은 주일 저녁 때입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을 보니 생각을 해 볼가요? 그들은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 훔쳐 갔다면 1순위는 제자들이겠지요? ‘문들을 닫았다’는 표현 역시 제자들의 상황이 드러내놓고 제자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분명 ‘예수의 부활’을 마리아를 통해서 들었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천군 천사를 동원해 심판을 행하시거나 여기저기에서 난리가 났다면 어떨가요?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를 삶에 찾아오는 두려움 그리고 원하는 결과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예수께서 오사’라는 표현은 문들이 닫힌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 불연듯 나타나는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 어떤 두려움이 제자들에게 더 클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강은 어떤 두려움은 해결하고 어떤 두려움은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부터 오든, 내부에서 일어나든 모든 두려움을 대항하는 것이 ‘평강’입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들었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 오신 예수님의 출연 그리고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의 혼재 속에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는 동작을 통해 제자들은 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평강’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는 말씀은 외부에서 오는 두려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본다면 이보다 적정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21절과 22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이기는 방법’이자 왜 ‘이길 수밖에 없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영광의 부활을 너희가 보느냐 그리고 ‘즐거움’을 경험했느냐 이제 곧 너희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는 말씀에 요한복음의 앞 선 모든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결론이라면 그분이 이제 제자들에게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보십시오. 다시 만남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그래 봤지, 그동안 마음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 말하는 것을 잘 들어와 같은 과정은 없습니다. 처음에 이런 표현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순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였고,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새로운 사명을 받는 자리이자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주일은 그래야 합니다. 한 주동안 우리 삶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하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도 감사할 정도로 위축됩니다. 그래서 예배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대를 갖죠. 그리고 말씀을 통해 다시 한 주를 살아 낼 용기와 지지를 얻고 세상을 향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들을 향하사’ 우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을 선포하여 이르시는 ‘성령을 받아라’ 2장에 기적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그리고 ‘연회장은 물로 된 모포주를 맛보고’ 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잔치에 연회장이십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포도주를 맛보고, 성령을 받으라 입니다. 그 맛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한 다음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세요’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이니 멀리하자가 아니라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잠시 맛본 잔치를 기억하십시오. 매주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과 예배는 잠시의 맛봄 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의 죄든지 사하고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앞선 말씀의 맥락에서 ‘본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믿음의 세계’를 본 자들에게 본 것에 대한 해석, 본 것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자세’,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자에게 사도행전 3:6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이미 주어진 것은 분명한데 여전히 우리는 ‘눈에 보인 것’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도마가 대표적으로 그런 인물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25절 ‘우리가 주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도마라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 모두가 하는 핑계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나이가 있든 없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 ‘보지 못했다’ 그러니 ‘보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바로 앞에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는’ 상태의 도마를 보여 줍니다. 그렇게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입니다. 어쩌면 제자들 모두는 예수를 경험했는데 도마는 ‘왜 나만 아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도마에게 ‘여드레’는 참 긴 시간이었을 겁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은 예수를 만났고 예수의 말을 들었지만 도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 도마에게도 26절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신 후 도마에게 이르시되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도마에게 ‘보라’는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말대로 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한편으로 보는 것 이상의 경험입니다. 도마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 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29절 ‘나를 본 고로 믿는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마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졌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공관복음에는 도마의 이름은 등장하지만 이 기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엠마오로 떠난 제자들을 만난 예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누가는 빈 무덤 기사 후 엠마오로 떠난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때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천사도 있었다는 여자의 말과 그리고 다른 제자가 무덤에 가서 여자들이 맞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런 내용이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즉 예수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전하고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기사를 다룹니다.
본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하셨던 모든 일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의 성취는 우리 믿음의 시작이자 기초입니다. 한국 교회가 믿음을 말할 때 어느 정도 신에 대한 간구나 치성과 같은 무속적인 면을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도 몇 자로 정의를 내리지 못할 만큼 분량이 많다보니 뭉뚱거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와 같은 식으로 말하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앞으로 오는 자들이 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보았지만 믿지 못했던 제자들을 열거하면서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줄 때 엠마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제자들의 모습처럼 본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과 성취의 말씀을 통해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보지 않았음에도 믿는 믿음’의 본질을 저자 요한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본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30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대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즉 본 것을 이야기하자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21장 25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라는 마지막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고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저자 요한은 결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