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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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여

누가복음 2:10–11 (NKRV)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히브리서 2:9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영광받고, 사람들로 부터 높임받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 위함이다.
우리의 왕은 죽기 위해 이 당에 오셨는데 그들의 제자들은 영광받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아이에게 있는 귀신을 꾸짖어 아이를 낫게 하는 모습을 보서 제자들이 한 것은 서로 누가 크냐를 가지고 말다툼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누가 복음 22장에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만찬으로 잘 알려진 상황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고 또, 포도주를 주시면서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 상황에서도 24절을 보면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다.
심지어 마태 복음 20자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와 하는 말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세요.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전지 전능하시분이시기 때문에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할 수 없는게 있다. 그건 바로 죽음이다. 왜 하필 죽으셔야 했는가? 왜 죽으셔야 했는가?
유언은 언제 하는가? 죽기 전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언은 언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Hebrews 9:16–17 NKRV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여기서 유언이라고 번역된 원어의 뜻에는 유언이라는 뜻과 언약이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것을 이렇게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유언을 하셨다.
그 유언의 내용은 그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의 구원의 약속이다.
Hebrews 7:25 NKRV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John 10:28 NKRV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John 6:40 NKRV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언약, 유언을 하시는데 문제는 그 유언이 성취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유언을 하신 분이 다시말해 하나님이 죽어야지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래서 죽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하신 결심이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토록 죽으시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그 모든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만일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반드시 구원 할거야, 내가 널 절대 거기 내버려 두지 않을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고 마음이 바뀌셨다. “안 되겠다 너, 그러면서 안해 안할거야!” 라고 말씀하신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꾸신들 누가 하나님께 따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하신 그 약속 안지키셔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죽으셨다고 성경이 말 하는 것이다.
죽기 위해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그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Hebrews 2:14–15 NKRV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셨는가?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해 종 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놓아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땅에 내려 오셨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렇지 않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들 오래 살려고 운동하고 좋은 것 먹고 그러는거 아닌가?
그렇다면 죽음이 무엇인가?
언젠가도 말했다. 차가움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가?
차가움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열” 인 것이다.
그러기에 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차가움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차가움의 정의는 열의 부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어두움도 설명할 수 있다. 어두움의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없다.
어두움은 빛의 부재이다. 빛이 아무리 작아도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 갈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어두움의 정의 또한 빛의 부재가 되는 것이다.
어둠은 절대 빛을 이길 수 없다. 빛이 사라지기에 어둠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어둠이 강할지라도 아무리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일지라도 작은 빛이 생기면 빛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어둠은 사라진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과 싸우면 안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빛을 가지고 오면된다.
그러면 반대로 빛을 잃은자리에는 어둠이 자리잡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겠는가? 생명의 부재 이다. 죽음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이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온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생명을 삼킨다고 생각한다. 악한영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머리털을 다 세면 죽음을 당한다)
2 Corinthians 5:4 NKRV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저승사자가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생명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죽음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그 실체도 없는 죽음에 일평생 종노릇 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1–4 (NKRV)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 할 수 있는가? 호흡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건가? 내 생명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다. 생명은 만져질 수 없다. 그래서 있는 것은 알았는데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사도 요한 당시 거짓교사들이 생명을 소유 할 수 있는 방법에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은밀한 지식을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은밀한 지식이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아주 극소수만이 알 수 있는 그 지식을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해, 종교적 행위를 하면 영생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요한이 한 말이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이다.
생명은 우리가 만질 수 없다. 그러기에 소유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요한이 말 하고 있다.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소유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John 1:12 NKRV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이 말하길 믿음은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다시말해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소유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소유하면 산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예수님을 포기하면 놓으면 죽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나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있는 것이다. 정말 순시간에 예수님의 품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이것이 진리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그 죽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얼마가 되는 것인가? 눈 깜빡할 사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죽음의 이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음앞에 너무나 무기력해진다. 죽기를 두려워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관문일 뿐이다. 아주 짧은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영생인, 생명이, 소망이 내 안에 있다면 죽음이 절대로 우리를 조정하지 못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죽음에 대해 호통칠 수 있다.
1 Corinthians 15:55 NKRV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신 이유는 그 죽음이 너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Hebrews 2:18 NKRV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기 위해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
우리가 어려움가운데 있을 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멋진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훌륭하고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와 같은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그 아픔을 아는 사람이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아실까? 예수님이 배고픔을 아실까? 거절당한다는거, 배신을 아실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아는가?
하나님 옮겨주세요. 하나님 옮겨주세요. 얼마나 이 기도가 연약한 기도인가?
그런데 예수님이 아셨다. 무엇을 아셨냐하면, 육체를 가진 인간이 그 육체의 고통앞에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예수님이 아신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육체의 고통앞에 때로는 인간관계의 깨어짐으로, 재정으로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아무리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육체의 고통앞에 인간관계의 깨어짐 앞에, 재정의 어려움 앞에 가족의 아픔앞에 한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하시겠는가? 너 이것도 못하냐!?!? 이러시겠는가???
내가 안다. 내가 안다.
예수님은 인간이 고통가운데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아신다. 그래서 돕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돕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분이 예수님이시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크리스는 잘 알다싶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스는 미사(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위한 미사 예배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냥 노는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날, 가족끼리 행복한 날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잘 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위한 날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전지전능하신 그 하나님이 죽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신 그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이 사실을 점점 잊혀지게 한다. 그 예수님을 가리기 위해 산타를 만들어 그 의미를 변질시킨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크리스마스를 아예 HAPPY Hollyday 라고 하여서 예수님을 완전히 잊혀지게 만든다.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메리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해피 홀리데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것인지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인지를 분명히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크리스마스 성탄절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려야 하는 날이다. 물론 평상시에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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