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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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야고보서 5장 7-12절
야고보서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야고보서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었는데, 본문은 인내의 능력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서론인 1장 2-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시련과 박해에 직면해 있을 때 그들이 당하는 생의 고난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인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인내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인내와 관련된 단어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이처럼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단어가 인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이 인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이렇게 인내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의 강림이 함께 강조된 이유는 우리를 인내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강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성결하고 위대한 부흥을 체험한 시기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였을 때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짜 종말론이 너무 많습니다. 가짜 교리, 가짜 구세주 등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재림의 중요성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왜 이렇게 가짜가 많을까요? 파스칼은 “아무도 가짜 다이아몬드를 위조하지 않는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수많은 가짜 종말론은 그리스도 오심의 사건이 그만큼 중요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복된 소망입니다. 디도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공의로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시간이 가까워 옴을 자각할 때, 우리는 견딜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내와 그리스도의 오심을 관련지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인내해야합니다. 성경은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세 가지 인내에 대한 표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농부의 인내(7-9절)
훌륭한 농부가 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속전속결을 원하는 사람은 훌륭한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 현대는 인스턴트 시대이어서, 저마다 사람들이 조급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견디고 참을 수 있는 인내가 없이는 바람직한 농부가 못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표본으로서 농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루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고 애를 쓰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적절한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7절에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른 비가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사이에 내리는데, 이 이른 비는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리고 늦은 비는 주로 3월에서 4월 동안에 내리는데, 이 비는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이 두 가지 비는 결정적으로 수확을 돕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리는 동안에 농부의 참을성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들은 10월부터 4월까지 긴 우기를 기다리며, 5월에서 9월까지의 오랜 건조기를 참아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고난을 견디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아름다운 추수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모든 아픔을 견디고 수고의 땀을 흘리며 기다리게 하는 것일까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기다리는 것은 귀한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는 얼마나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 영적인 농부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흙과 같습니다. 이 마음에 씨, 곧 하나님을 말씀을 뿌립니다. 그리고 이 씨가 열매 맺을 날을 기대합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면 그 열매를 9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이 열매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게 되면 우리에게서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인격, 즉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은 능동적 기다림입니다.
농부가 열매 맺기만 기다립니까? 농부가 열매 맺기를 기다리며 들에 나가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농부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열심히 일하며 기다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의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9절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 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인내하면서 가져야할 자세가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로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농부의 바람직한 태도 가운데 하나는 이웃과 더불어 협력하는 것입니다. 혼자 농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은 부정적인 비판을 뜻합니다. 참다못하여 폭발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아론을 원망하였듯이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공정하게 심판하실 그분의 임재가 우리 앞에 가까우므로 인내하고 바르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무조건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일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2. 선지자의 인내(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선지자들의 고난은 오늘날 고난을 맞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선지자들의 고난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 이하를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과거 선지자들이 받았던 핍박을 상기시키면서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환경은 순탄할 것이라는 기독교적 미신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인의 고난입니다.
순종은 무사안일주의 같은 태평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의 온전한 성취였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방편이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한 것 없이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합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을 선언함으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면제시킨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엘리야를 보호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주께서 주신 말씀을 전파하다 반역자로 잡히기도 하고 우물에 던지우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참았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모두 의로운 사람들로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고난을 받을 때 꼭 기적이 일어나서 보호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더러는 죽기도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 기적이 나타나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고난을 그대로 직면하고 받으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똑같은 은혜입니다.
드라마처럼 고난을 피한 사람들만을 칭찬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그대로 받으며 죽어간 사람들도 똑같이 위대합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더욱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적극적인 승리는 가져 왔던 사람, 즉 전쟁에 승리하고 적군을 패배시켰던 위대한 승리자들을 설명하고 있고, 또 하나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그대로 죽어간 사람들의 믿음을 똑같이 중요한 가치로 설명합니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보호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주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디고 인내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인격을 닮아갔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극복하여 승리한 사람들은 영광스런 주의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즐거워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과 상처를 닦고 싸매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욥의 인내(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고난을 이야기할 때마다 욥을 생각하게 되는데 본문 야고보 사도도 욥의 인내를 말합니다. 욥의 인내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내란 그냥 당하며 참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으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욥의 인내의 본질은 욥기 42장에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더욱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욥기 42장 5,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욥을 겸허하게 하셨으며 그런 후에 고난 받기 이전보다 갑절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앤드류 머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문제의 해결이 속히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할 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내하노라면 주님께서 공의와 진리를 밝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고발하던 욥의 세 친구를 주님이 책망하셨습니다. 이렇게 인내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와 진리를 밝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고 무엇보다 인내를 배웠습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힐 수 있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의 생애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미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눈동자는 욥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욥이 바라본 고난의 관점은 욥기 23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고난과 인내의 뒤에는 순결하고 아름답게 변모한 성숙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참지를 못합니다. 저도 잘 참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도 이따금씩 참지 못한 것을 보고 위로를 얻습니다.
모세는 참지 못하여 사람을 죽였고, 아브라함은 참지 못하고 자기 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스마엘을 낳았으며, 베드로는 참지 못하여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영국의 성경 번역자이며 유명한 설교가였던 필립 브룩스라는 사람은 참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어떤 일을 참지 못하여 더욱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곁에 있던 분이 그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브룩스 박사님, 오늘 따라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게 있는 문제도 고민이지만 더 큰 고민은 나는 급한데 하나님은 도무지 급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잠잠히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참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자기 육체의 질병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그 고난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의 몸까지 건강하였더라면 불가능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몸의 가시로 인하여 겸손히 주를 의지합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바울 사도는 발견하였습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서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서양 속담에 “세계는 인내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여러 가지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주신 메시지입니다. 내용은 한 마디로 인내하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랑하는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곧 만나게 되고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 눈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인내에는 본이 있기 마련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나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나의 어려움은 좀 작게 느껴져서 쉽게 견딜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예수님만큼 억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고난을 당한들 욥이 당한 고난만 못합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본이 있습니다. 인내의 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훌륭한 인내의 승리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노라면 우리의 고통은 어느 사이에 눈 녹듯 스러져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욥기를 읽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욥기를 몇 십번이고 읽어나가노라면 ‘나는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내의 모본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참아나가는 것이다 하는 인내의 길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의 결과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아도 성경에 있는 모본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의 지혜를 배우고 인내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마지막 때 큰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인내하는 사람이요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되고 인내의 능력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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