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오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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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
서론
서론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십자가 고난이라는 심오한 주제 앞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섬김, 낮아짐의 영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고, 다른 제자들 역시 그들을 시기하며 권력 다툼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의 영광과 권세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영적인 맹인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영적 무지와 대비를 이루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0장 46-52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 그것도 거지의 신분인 바디매오의 치유 기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과,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영적인 눈이 열린 한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의 진정한 의미
1.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의 진정한 의미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결하지만, 이 외침에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을까요?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우리가 마가복음 초반부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그때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를 들어, 막 1:24 에서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외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조롱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굳이 "나사렛" 출신임을 강조해서 불렀을까요? 당시 나사렛은 이스라엘 내에서도 작고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을 무시했고, 심지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즉,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적으로는 낮고 천한 나사렛 출신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권위를 깎아내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사렛 예수"라는 이 호칭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동시에 그분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표현이 됩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낮아짐이 곧 위대함이라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낮아지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이루셨고, 온 세상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의미를 깨닫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높아지려고만 애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직분과 지위를 놓고 경쟁하며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 (막 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낮아짐을 통해 높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믿고, 그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서로를 섬기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두 가지 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아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며, 다윗 왕조의 영광을 재현할 정치적, 군사적 구원자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치유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이 말씀은 메시아께서 정치적인 왕의 역할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35장 5-6절은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예언하며, 메시아의 시대에 일어날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이 두 가지 기대를 모두 충족시키는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샬롬, 즉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실 왕이시자, 자신의 영적, 육체적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디매오의 외침은 단순한 도움 요청을 넘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믿음이 담긴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2. 믿음의 길로 나갈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
2. 믿음의 길로 나갈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
하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장애물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경멸했으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을 소음으로 여겼고, 그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세상으로부터 받는 조롱과 핍박과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고, 우리의 신앙을 폄하하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이 항상 순탄하기만 한가요? 오히려 세상의 유혹과 핍박,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하고 넘어질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때로는 주변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과 비난 때문에 위축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욕망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빠져 물에 빠진 것처럼 (마태복음 14:28-31), 우리도 믿음의 길에서 때로는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넘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마치 거센 파도와 같이, 세상은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함은 결국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유혹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우리는 바디매오와 같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라도, 다시 일어서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3. 나사렛 예수에게만 길이 있음을 알고 나갈 때의 응답
바디매오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의 간절한 외침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원어로 "타르세이"(θάρσει)로, 이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4:27)라고 말씀하시던 그 따뜻한 음성과 같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22)라고 말씀하시던 그 위로의 음성과 같습니다.
"타르세이", 이 한마디는 단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을 넘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평안과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아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쉼과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바디매오의 필요를 묻는 것을 넘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점검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제목은 주로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단지 이 땅에서의 안락함과 번영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은 이 말씀은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욕심과 세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처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5. "보기를 원하나이다" - 안목을 여는 참된 빛
5. "보기를 원하나이다" - 안목을 여는 참된 빛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간구는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로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적인 눈은 누구보다 밝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만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단지 육신의 시력을 회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력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과 욕망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세상의 헛된 것들에 시선을 빼앗겨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시편 119편 18절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영적인 눈을 열어 예수님을 바로 보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눈을 뜬 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마가복음 10장 52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는 더 이상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빛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예수님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어두움은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시고,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 주십니다.
결론
결론
성탄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사야 9장 2절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흑암과 같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절망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맹목을 치유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을 통해,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하고,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시며, 우리의 삶의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이번 성탄절,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빛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고, 그분의 제자로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가 작은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