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불러온 믿음의 순종
Notes
Transcript
믿음이란
믿음이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가슴 속에 늘 떠나지 않고 그들을 움직여 온 꿈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어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살며 종살이할 때도 결코 잊지 못했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하나님의 약속이긴 했지만, 믿음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기도 했습니다.
1.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준비 (1~2절)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째 목표인 여리고 성으로부터 약 13키로 정도 떨어진 싯딤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1). 거기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고 3일 후 돌아온 그들로부터 성의 상황을 보고 받는데,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려 용기 있게 나간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즉시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군 명령을 내려, 싯딤에서 요단강까지 지체하지 않고 이동하게 됩니다. 당시 군대만 60만 명이었으니까, 여성과 아이들까지 다 하면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을 텐데, 그래서 요단강까지 이동하는 데 하루 이상 걸렸을 것이고, 마침내 요단강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거기서 진을 치고 또 3일을 보냅니다.
이 3일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이 3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요단강을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들 중 아무도 강을 건널 수 있는 얕은 곳이 있는지, 강에 이 많은 사람들이 건너갈 다리가 있는지 알아보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때 무엇을 했습니까?
지금 200백만 명이나 되는 이 무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요단강가에서 3일 동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엄청난 물이 흐르는 이 요단강을 건널 수 없다. 그렇다면 이곳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위해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인가?’ 이 3일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굉장히 급합니다. ‘이게 지금 빨리 이루어져야 하고 이 일이 빨리 진행돼야 하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왜 이렇게 안 되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큼 그렇게 급하지 않으신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정말 어떤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얼마나 막막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은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사실은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괴롭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실 얼마나 답답합니까?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기도하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포기합니다. 포기하고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얼마나 오래 기도했습니까? 별로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금방 포기합니다.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합니까?
그 시간은 그냥 보면 인생의 공백기인 것 같고 기도 응답도 안 되니 시간 낭비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최악의 시간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 정말로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부분 굉장히 답답하고 힘든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아름답고 즐거운 게 아닙니다. 답답하고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한 번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서 차지하려고 하는 가나안 땅은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땅입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사실 이스라엘이 그 많은 민족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지금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동쪽에 있으니까 그것을 건너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넘에 있어서 몸만 건너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건너는 것을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응답을 받은 다음에 뭘 할 것인가, 왜 이 기도에 응답받아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지, 이것만 되게 해달라고 해서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요단강을 건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건넌 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지금 요단강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건너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일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다면, 내 시간에 내 방법으로 건너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조금 답답하더라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너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당장 좋을 것 같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때에 되어야만 제대로 될 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명령 (3~13절)
1) 관리들이 백성에게: “언약궤를 따르라” (3-4)
이제 백성의 지도자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3). 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 말이나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여호수아로부터 명령을 받아서 전달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 진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강의 얕은 곳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놓는 것도 아니고, 배를 만들어 타고 건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이상한 명령입니다. 언약궤의 뒤를 따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 언약궤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이 그것을 보고 뒤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단순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언약궤 뒤를 따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곧 하나님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고 계시니까 하나님만 따르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따라야 하지만 2천 규빗의 거리를 두고 따라야 합니다(4).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과 언약궤 사이에 1km의 거리를 두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200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작은 언약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이 앞지르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가 앞서 가는 것을 뒤따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6).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르라고 하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백성 앞에 간다는 것은, 이 진군의 리더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40년 생활 동안 계속 훈련을 받았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는 훈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따라가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서는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따라와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씀을 주셨고 또 이런 언약궤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때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그것을 따라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고 밤에는 그것이 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다 자기 천막을 거두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구름 기둥이 멈추면 이제 다시 천막을 치고 거기 머무는 겁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구름 기둥이 앞서갈 때 따라가고 멈추면 멈추는 것을 배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 대신 언약궤를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광야 생활이 끝났고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언약궤를 따라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성결을 요구하십니다(5).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며 “주님, 주님”, “주여, 주여”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입으로만 ‘주님, 주님.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즉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엉망인 삶을 살게 된다는 뜻도 암시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가 잘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의 뜻으로 살기를 원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주님이시면 나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자기의 일입니다. 그런데 종이 자꾸 ‘제 생각에는 이리로 가야 하고...’라는 식으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가라고 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방향을 따라갑니까? 어디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인지 압니까? 그것을 아는 방법이 바로 이렇게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며,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생각을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굉장히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생각을 좀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단무지과’로, 즉 단순, 무식, 과격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 생각이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일단은 듣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복잡한 생각과 염려와 근심이 싹 씻어지면서 정리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만 구하는 게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간구는 기도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때, 특히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정말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상황은 똑같고 문제도 그대로 있는데, 불안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했더니 하나님이 용기를 주십니다.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생각이 정리된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답답할수록, 더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고 나와야 합니다. 당연히 믿는 사람 예배해야 할 ‘의무’가 있고, 성경 읽으며 기도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숨을 안 쉬고 살 수가 있습니까? 살아 있는 사람인 이상 숨을 안 쉬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당연히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배하는 것이고 당연히 기도하는 것이고 당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는 게 무거운 짐입니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면 당연히 숨 쉬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주일예배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참석하는 의미나 숫자 채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라는 겁니다.
그런 것이 다 나를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또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억지로 무슨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세요.”라고 말하는 게 부담을 주는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나와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나의 복잡한 생각이 단순하게 정리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방향성을 얻게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3)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요단에 들어서라”(8, 12)
지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는 요단강이 당장이라도 그들을 삼킬 듯이 넘실대며 흐르고 있습니다. 홍수가 났을 때 강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엄청나게 물이 불어난 요단강 물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명령입니까?
“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7-8절)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넘치는 강물을 먼저 멈추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을 멈추어주신 다음에 ‘자, 이제 멈췄으니 들어가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엄청나게 흐르는데 “먼저 들어가라.”라고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 물을 밟고 들어가면 물이 멈출 것이라고 하십니다.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1-12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가지고 엄청난 물이 흐르는 강물 속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상황이 좋게 된 것을 보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뛰어들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좋아져서 뛰어든 게 아니라, 뛰어들면 좋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을 믿고 가는 겁니다.
이런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다 확인해보고 ‘아, 이게 될 만하구나.’라고 계산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야, 이것이 나한테 유익이 되는구나.’ 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내 상식과 지식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간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 가운데 우리를 삼킬 듯이 요동 치는 요단강 같은 문제를 얼마나 많이 만납니까? 우리가 가는 길을 떡 막고 있는 요단강들이 우리 삶에 참 많습니다. 어떨 때는 크게 다가오고, 어떨 때는 좀 작지만 그래도 나를 여전히 괴롭힙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요단강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뛰어들지 않는 한, 요단강은 결코 갈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 앞이 막혔고 문제가 있다고 다른 데로 돌아가거나 다른 데를 알아보는 식으로 해서는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실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떤 기적이라도 일으키실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그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순종과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기적을 보여다오. 그럼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많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못 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못 보는 것인데 자꾸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것이 있을 때 기적이 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기는 원하면서 정작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안 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적을 못 보는 것인데,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사실 이것은 황당한 명령인데, 이 명령 앞에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 자기는 모세가 죽고 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주신 이 어려운 명령, 황당한 명령 앞에 여호수아는 놀랍게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9절)
엄청난 위기 상황,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돈이나 권력이나 인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방법부터 찾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본 다음에 그래도 되지 않으면 그제야 ‘기도 좀 해볼까?’ 하거나 ‘기도 좀 해주세요.’ 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나마 낫습니다. 끝까지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금방 올 수 있는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을 가장 마지막에 합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기도하면서 그다음에 나가서 최선을 다하면 놀랍게도 상황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자기가 해보려고 하면 이게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더 힘듭니다. 어려움에 닥칠 때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주님께 나아오시고, 말씀을 들으시고, 예배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시는 자녀라도 한꺼번에 모든 계획을 다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다 알려줬다가 교만할까 봐, 또는 이해를 못 할까 봐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만큼만 알고서 행동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를 말씀하시면 그것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주시면 그것을 받아 또 행하고, 그렇게 한 번에 하나씩 행한 것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라고 한꺼번에 하나님의 계획을 다 듣고 안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그렇고,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다 그랬습니다. 한 번에 하나씩 듣고 행했습니다. 한 번에 하나를 듣고 행하면 하나님이 그다음에 또 알려주십니다. 그럼 그것을 또 하고, 그다음 또 알려주시면 또 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고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3. 요단강 도하 (14~17절)
드디어 역사적인 요단강 건너는 일이 시작됩니다. 2백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건너가는 것 자체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5절)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3~4월 정도입니다. 이스라엘로 치면 겨울이고 우기입니다. 비가 가장 많이 쏟아지는 때입니다. 게다가 요단강의 근원이 되는 헬몬산의 눈이 한참 녹아내리는 때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도 가장 많이 불어나고 그 밑으로 요단강도 물이 한참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폭이 30m도 안 되던 요단강이 이때는 1.6킬로미터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수심도 300미터 이상 깊어지고 물살도 아주 빨라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이 상황은 노인과 어린이와 여자들과 그들이 다 포함된 2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족과 짐승들까지 다 데리고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려운 일은 최선을 다하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능력 밖입니다.
지금은 뒤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엄청난 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때 기적이 벌어집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흐르는 강물 속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진짜로 물이 멈춥니다.
아무리 엄청난 요단강물이라고 하더라도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상황이 얼마나 어려우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무슨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셨나? 아니 어떻게 처녀가 성령으로 임신해서 아이를 낳나? 이게 말이 되나? 또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나? 이게 말이 되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온 우주 만물을 “빛이 있으라. 땅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다 만드신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다른 것은 기적도 아닙니다.
우주의 사진들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해서 아이를 낳는 게 왜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그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기적도 아닙니다. 우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는 바로 그때 하나님이 능력을 보이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포기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제사장들이 발을 요단강물에 담그는 순간 물이 쫙 갈라지며 멈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강 한가운데 서 있어야 했는데, 그들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기뻤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나갈 때 경이로운 표정으로 지나가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로 들어갈 무렵에 영국 BBC 방송에서 여론 조사를 통해 지난 세기 최고의 탐험가 열 명을 선정했습니다. 아문센이나 마르코 폴로 같은 사람들이 선정되었는데, 그중 어네스트 섀클턴도 포함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실패한 탐험가였습니다. 1914년 8월에 27명의 대원을 데리고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다가 배가 좌초되어 얼음덩어리를 타고 표류하다 18개월 만에 간신히 구조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열 명의 탐험가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배 이름인 ‘인듀런스(Endurance)’라는 말처럼 인내하고 견디어내면서 부하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살려서 함께 귀환했기 때문에 거기 포함된 것입니다.
훗날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얼음산을 넘을 때 분명히 세 명이 넘었는데 이상하게 네 명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해서 다른 동료들에게 말하니까 그들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섀클턴은 그때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졌을 때 분명히 세 명이 던져졌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보니까 네 명이 다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이 기적이 섀클턴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요단강이나 얼음산과 같은 장벽이 무엇입니까? 그 앞에서 우리는 외로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느냐입니다. 내가 혼자 알아서 하느냐,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을 신뢰해서 따라가느냐?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음을 실천함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