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2 주일오후예배: 누가복음 2:10-14; 요한복음 16:33; 벨직신앙고백서 2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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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10-14; 요한복음 16:33 입니다. 누가복음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10–14 NKRV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요한복음 16:33 NKRV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벨직 신앙고백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29항 전체가 길어서 오늘 같이 볼 부분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29항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의 차이점
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는 표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수한 복음의 교리가 교회 안에서 설교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죄를 형벌하는 교회의 권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요약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영하고,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교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표지들을 통해 참된 교회는 확실히 알려지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할 권리가 없습니다.
참된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그리스도인의 특징, 즉 믿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주로 영접하고, 죄에서 떠나 의를 추구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육체와 육체의 일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연약함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남은 생애 동안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연약함과 싸웁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음과 고난과 순종을 피난처로 삼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용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정말 기쁜 소식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을 알리는 천사들의 소식입니다. 특별히 천사들은 목자라는 특정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데요.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복음을 뜻하고,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천사가 전하는 복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바로 온 백성이 기뻐한다는 겁니다. 복음은 온 백성을 기뻐하게 하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천사가 이어서 말합니다.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의 정체는 예수님꼐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특징에 대하여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구주, 그리스도, 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다윗의 동네”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베들레헴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천사가 말하는 예수님의 특징들 중에서 이 “다윗의 동네”에 더 집중하고자 합니다. 다윗의 동네라는 것은 2장 4절에서 이미 등장한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전하는 기쁨의 복음은 왕께서 태어나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온 백성이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과연 정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었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유대 땅에 퍼져 하나 같이 기뻐하는 소식으로 들렸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태어나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천사들이 이야기해준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쁜 소식입니다. 왜 그런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 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쁜 소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바로 그 당시의 반응을 살펴볼텐데요. 오늘 본문에는 없고 마태복음에 있는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헤롯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의 반응이 나왔는데요. 헤롯도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성취하셨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왜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자신의 왕좌를 예수님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장 4절에서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동방박사들에게 질문합니다. 여기서 헤롯의 초점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에 헤롯은 꽂혀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께서 태어나셨으니 헤롯은 지금 자신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데, 이 왕께서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다스리게 되진 않을지, 아니면 백성들에 의해 자신이 쫓겨나고 태어나신 이 분이 다스리게 되진 않을지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왕좌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헤롯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그날에 태어난 모든 아기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왕좌를 빼앗기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러한 끔찍한 유아 학살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에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은 적어도 헤롯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두려운 소식이었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헤롯의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뒤에서 함께 살펴보겠지만, 이 유대 땅,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분봉왕 또는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 황제와 같은 육체적인 왕이 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봉왕과 로마 황제와 같은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것은 분봉왕과 로마 황제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고, 군대를 거느리는 그러한 왕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사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헤롯이 차지하고 있는 이 분봉왕의 자리는 쳐다도 안 볼 왕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좌가 더 가치가 있으며 더 영광스러운 왕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헤롯의 생각은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생각과는 다른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착각과 오해 속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헤롯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습니다. 헤롯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은 두려운 소식,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비단 헤롯에게만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이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러한 기쁜 소식이 아니었던 것인데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고,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께서 정말 과거 다윗과 같이 이 이스라엘의 육체적인 왕이 되셔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이스라엘 나라로 만드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헤롯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롯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두려운 소식이었고, 제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긴 했지만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른 기쁜 소식으로서 반응만 달랐을 뿐 헤롯과 제자들 모두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베드로입니다. 제가 저번에 설교했듯이 마태복음 16장에서 천국 열쇠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아주 격동하며 항의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국을 만들어야 하는데 죽는다니 결코 말이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베드로 뿐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오해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마가복음 9장, 누가복음 9장과 22장에서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 아래에서 누가 큰 자인지를 누고 싸웁니다. 또한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가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하나씩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열 명의 제자는 두 제자를 향하여 분노합니다. 이 땅의 왕, 지상의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던 제자들은 앞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높아질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왜 이들이 이러한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하듯이 이것은 제자들의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왕이 되시기 위하여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지만, 다윗보다 훨씬 더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결코 지상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 기쁜 소식은 제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유대 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놀라운 왕국을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왕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하나씩 높은 지위를 받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대한 소식과 기쁜 소식이신 예수님과는 달랐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넘어 온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면서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하였지만, 나중되서는 하나같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분노하며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을 때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칭송하고, 이 분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실 줄 알았지만, 자신들의 기대로 하지 않으시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생각하던 기쁜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모습들과 표적을 보여주셨기에 자신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그 메시야의 모습에 예수님이 끼워맞춰주시길 바랐습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안 나오자 바로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며 메시야가 아니라고 비난한 것이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던 기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기쁨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탄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왕이 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낮아지심을 통해 세상을 이기셨다는 소식입니다.
2. 왕이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모습을 취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마굿간, 그리고 말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태어난다면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왕궁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람들이 우러러 볼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인 마굿간이며 그분의 요람은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요람이 아니라 말이 먹이를 먹는 말 구유였습니다. 아무도 메시야, 그리고 왕께서 이 가축우리에서 발견되실거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 말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이 분이 앞으로 걸어가실 길과 이스라엘 왕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 오늘 읽은 누가복음 2장 12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왕은 지상의 왕이 되어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할 아주 멋지고 화려한 왕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왕께서는 비천하고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앞으로 섬기시겠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50-53에서 마리아가 이렇게 찬송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0–53 NKRV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의 찬송처럼 이스라엘의 왕께서는 가장 비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오심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또한 그분이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기를 출산하듯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그분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어른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으십니다. 그렇게 하여 구속 사역을 충분히 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발적으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기라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 또한 표적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왕은 가장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시겠다는 겁니다.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도 그분의 손으로 보호하시겠다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 속에서 갑의 위치가 아니라 을의 위치가 되어 사람들에게 지배되는 모습은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로부터 핍박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도 체포되시고 심한 고문을 당하셨으며,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너무나 쉽게 지배되는 모습이 과연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힘도 못 쓰는 이런 모습이 과연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패배자이며 세상에게 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고 자발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패배하시고 세상에게 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지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과 함께 읽은 요한복음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33 입니다.
요한복음 16:33 NKRV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세상에서 제자들이 환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담대하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리하셨듯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각과 관점에서는 세상에 대하여 지는 것 같고 패배자의 모습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가장 낮은 모습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기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이 세상을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지상의 왕들이 가지는 모습들 화려하고 강력한 군대를 가지는 것은 역사 속에서 단 한 명의 왕만이 가지지 않고 언제나 왕들은 그런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왕만이 그 어떤 왕들도 하지 못했던 것을 하였습니다. 바로 죽음을 이기는 것. 세상에 만연한 죄와 죽음을 이기셨고, 그 왕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에 있는 죄를 없애시고,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낮은 모습을 취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원어적으로 승리의 소식입니다. 전쟁의 전령이 나라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환호하며 기뻐합니다. 세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승리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는 이 큰 기쁨의 복음을 들은 백성들은 환호하고 기뻐합니다. 다시 누가복음 2장의 말씀을 보십시오. 13-14절에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찬송합니다. 바로 이 천사들의 찬송이 백성들의 찬송이 됩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낮아짐을 통해 세상을 이겨야 한다.
그러니 이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을 취하심으로 세상을 승리하셨으니 교회도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이겨야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헤롯, 제자들, 유대 백성들처럼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그런 왕의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것을 이전에는 기대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큰 기쁨의 복음이 결코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기쁜 소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는 이 기쁜 소식이 우리 안에서 기쁨이 되게 하셨고 지금도 기뻐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을 취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믿고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가장 낮은 모습으로 연약하고 비천한 자들을 섬기는 곳입니다. 환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할 수 있는 곳 교회입니다. 우리의 왕께서 낮아짐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참된 교회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는 표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수한 복음의 교리가 교회 안에서 설교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죄를 형벌하는 교회의 권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요약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경영하고,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교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표지들을 통해 참된 교회는 확실히 알려지며,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할 권리가 없습니다.
참된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그리스도인의 특징, 즉 믿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주로 영접하고, 죄에서 떠나 의를 추구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육체와 육체의 일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연약함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남은 생애 동안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연약함과 싸웁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음과 고난과 순종을 피난처로 삼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용서를 받습니다.
참된 교회의 특징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유일한 왕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참된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육체와 육체의 일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왕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백성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이긴 초월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존재가 아닙니니다! 교회는 가장 낮은 모습을 가지는 존재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보잘 것 없는 취급을 당할지언정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모습입니다. 아까 읽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이 약속을 의지함으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비록 세상에서는 가장 낮은 모습이지만 결코 자존감을 잃지 않습니다.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성탄이 교회에게 주는 기쁜 소식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들을 섬기시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 바로 성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왕을 따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의 이웃을 섬기고 비록 가장 낮은 모습이지만 패배자의 모습이 아닌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우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해 모든 백성들이 이 큰 기쁨을 같이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생길 겁니다.
3일 뒤에 우리는 성탄절을 지내게 될 겁니다. 이 성탄이 교회에게 주는 큰 기쁨을 누리시며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게 지고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 함께 이 시간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을 섬기고 예수님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살아갈지라도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임을 믿고 담대하게 걸어가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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