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를 맞이하라(미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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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맞이하라(미 5:2-5)
요 몇 일 본문을 묵상하면서, 2절 한 절 말씀을 헤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사랑; 당신의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지옥 끝까지 내려가셨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사랑과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직접 사람이 되셔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라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한 왕이시며, 겸손한 자의 구주이십니다.
본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한 왕이시며, 겸손한 자의 구주시라」고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2上)
하나님은 선지자 미가의 입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미가는 이 베들레헴이 유다 족속 중에 작다고 하였는데, 고고학자들은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를 1000명 미만으로 추산합니다.
이 마을이 얼마나 작은 마을이었는지 여호수아 때에 유다 지파에 기업으로 분배된 도성들 이름에서 빠져 있을 정도였습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동네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가치에 의하면, 더 이상 나빠질 것 없는 초라하고 누추한 것이 예수님의 탄생이었습니다.
태어나신 곳도 번듯한 집이 아니라, 짐승들을 키우는 「우리 한 켠」에서 나셔서 「구유」에 누여 지셨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보통은 왕궁의 화려한 곳에서 태어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도 가장 먼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왕궁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화려한 예루살렘의 왕궁, 혹은 당시에 세상을 압도하던 로마의 황궁이 아닌, 그처럼 작은 촌락 베들레헴에서 그토록 비천하게 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류 구원을 위해 지존이시고 지고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시청각적 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2下)
“상고”(올람)와 “영원”(믹케템)은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 ‘아주 오랜 옛날’ ‘영원 전’ 이라는 뜻입니다. 2절 하반절을 요한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그리스도의 근본이 상고와 영원;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예수 = 그리스도 =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신 것;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그 자체가 지나친 낮아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스스로 낮아지신 것을 「그리스도의 비하(卑下)」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는께서 율법의 제한을 받는,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참함을 대신 겪으시고, 죄로 인한 수난과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빌 2:8)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것도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 공의의 선고에 의하여 사망에 이르셨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저와 여러분이, 인간이 마땅히 처해야 할 죽음의 자리, 무덤; 지옥에 까지 내려가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비하; 겸손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겸손은 비천한 자들의 미덕’이었습니다. 사실, 비천한 자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래 그 비천은 본래 인간의 몫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여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는 결코 죄인도 아니며, 혹여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죽을 만큼은 아니라고 끊임없이 교만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불러(딤전 1:15)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또한 죄로 인한 부패와 죽음을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존해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2024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죄인인 나의 실체를 바로 알고,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겸손하게 나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슬픔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맞이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슬픔을 생명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2上)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역설적 이게도, 이 말씀을 신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인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냐?」고 물었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미가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마 2:4-6).
그런데 미가는 그냥 「베들레헴」이라 말하지 않고, 베들레헴의 옛 이름인 「에브라다」(창 35:19; 48:7)를 뒤에 붙여서 “베들레헴 에브라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가는 왜? 「베들레헴」과 옛 지명인 「에브라다」를 함께 표기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슬픔의 역사가 깃들어 있던 에브라다와 같은 우리 인생이,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 기쁨의 역사로 바꾸게 될 것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브라다는 슬픈 기억을 가진 지명입니다. 그곳은 야곱이 사랑한 아내, 라헬이 죽은 곳입니다.
라헬은 난산 끝에 야곱의 12번째 막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드리웠습니다.
혼이 떠나려 하는 그때, 라헬은 통곡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막내아들을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총애하는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 에브라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슬픔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울리는 ‘라헬의 통곡’을, ‘이스라엘의 비극’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렘 31:15)
‘라마’는 유다와 베냐민 땅의 경계, 베들레헴과 인접해 있고, 라헬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라마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 갈 때(렘 31),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 갈 때(렘 40), 포로들이 대기하는 중간 기착지였습니다.
그곳은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포로들이 그리고 130여 년 후 남 유다의 포로들이, 쇠사슬에 묶여, 적국으로 끌려가며 슬픔을 노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에브라다는 사랑하는 아들을 계속 안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어미 라헬의 슬픔을 기억하는 장소, 그리고 남과 북 이스라엘 포로들이 통곡해야 하는 슬픔과 아픔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 에브라다에서, 인류 구원자; 메시야(그리스도)가 탄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슬퍼하던 통곡의 땅이, 이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실 메시야가 오는 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다의 슬픔을 기억하며 애곡했던 예레미야도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6)
의역하면, ‘네 통곡을 멈추어라, 네 삯(죄 값)을 다 치르고 나면, 그 포로지에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약속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하는 미가의 메시지와 똑같습니다.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3)
“남은 자(예테르)”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신한 댓가로 고난을 격고 돌아온 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했으나, 그 댓가로 우리가 받을 받을 고난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격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는 은혜의 선포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3:5-6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삯을, 메시아;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담당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가는 죽음과 슬픔의 장소 에브라다에서, 메시야; 그리스도가 나신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곳이 베들레헴; 기쁨과 생명의 떡집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 생명과 소망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과 가정, 직장과 사업장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슬픔과 죽음의 그림자가 떠나가고, 기쁨과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죄의 저주와 연약하여 좌절만 있는 우리 삶의 자리에, 저주가 바뀌어 복이 되고 우리의 좌절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바뀌게 해야합니다.
바라기는 또 한번의 성탄절을 맞이하며, 메시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주인으로 맞이함으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시 30:11)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