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나사로

요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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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나사로’
[인사말-도입]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으로 우리를 주님이 부르셨고 우리를 비추셨기에 우리는 빛이 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교독 하겠습니다 [요10: 40—11:16]
40.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서론]
오늘 그리고 마지막주는 11장 나사로와 관련된 설교를 하고 올해 요한복음 강해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장까지는 표적이 나오고 12장부터는 표적이 나오지 않고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표적과 영광의 기록이라고 할 때,11장까지를 표적 그 이후를 영광으로 구분합니다. 오늘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수전절(12/25)과 유월절(4/15)사이 입니다. 장소는 독특한데 요단강 건너 베다니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가 나옵니다.
단락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는데 40-42절은 예수님이 베다니로 이동하신 내용을, 11장 1-6절은 아픈 나사로에 대하여 7절-17절은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등장인물로는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 남매들이 나오고 12제자중에 도마가 처음으로 요한복음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는 표적이 7개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2장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을 통해 물질을 초월하시는 신적 능력의 예수님을 보여주었고, 4장에는 가나에서 가버나움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능력을 행하시는 모습을, 5장 예루살렘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시간을 초월하심, 6장에서는 오병이어를 통해 남자만5,000명을 먹이심으로 분량을 초월하심, 그리고 또 물위를 걸으심으로 자연질서를 초월하심,을 보여 주셨고 9장에서 날때부터 맹인을 고치심으로 불치의 병을 초월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죽음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그 마지막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전절과 세번째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맞이하는 사이에 오늘의 사건이 자리합니다. 마리아 남매는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베다니에 거주하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 때마다 머무셨던 집입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에게 비싼 향유를 부은 것과 나사로의 죽음에 많은 조문객이 왔던 것을 봐서 그렇게 유추해 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들과 교제를 나누었고 이들을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피해 요단 당 건너편으로 베다니로 사역의 장소를 옮깁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집’이라는 뜻이 있고 베다니는 ‘고통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터전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참하고 고통의 마을이 예수님을 환대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스스로 경건하다 하는 교만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이 복음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베다니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예수를 증언했기에 때문입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루살렘의 악한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잠시 쉼을 누리시던 그때 소식이 들려옵니다.
1.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엘리 에셀’의 줄임말 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세번째로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1절 ‘ 어떤 사람이 병들었는데’ (‘ 데 티스 아스떼논’) 여기서 미완료 시제 ’’은 어느 기간 병들어 있음을 암시하기에 그의 병은 갑자기 걸린 것이 아니라 시간이 좀 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2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삽입 구절로 언급합니다. 1절과 3절 사이에 이렇게 삽입구를 넣는 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4절과 6절 사이에 5절 내용도 삽입구로서 저자의 설명이 들어갑니다. 삽입구는 부언 설명을 해줍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후로도 등장하는데 특이한 것은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 부활을 체험했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증언도 남기지 않고 침묵함을 봅니다. 신앙적인 체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체험의 의미를 깨닫고 삶 속에 담아서 세상과 공유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저 자신만의 영적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누이들이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병든 상황을 알렸다.그녀들은 예수님이 오시면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이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는 ‘필레오’를 썼는데 이는 11절 친구라고 사용한 ‘필로스’와 같은 어원입니다. 성경은 ‘아가페’와 ‘필로스’를 구분하지 않고 사랑이라고 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본문에서도 이 부분을 같이 사용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이외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모르는 자도 고쳐 주시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자 나사로의 병을 알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그곳에서 머무십니다.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런데 그 이유를 앞서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세상에서 질병과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난들을 동일하게 겪습니다. 믿기만 하면 가난과 질병과 고난이 없다고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러한 어려움들이 똑 같이 우리에게 경험되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오빠’ 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납니다. 대장암 말기로 고통 당하는 신실한 형제와 혈액암으로 신음하는 자매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그 고난을 해석해 가는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께로 자신의 마음을 돌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특히 약한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절망의 과정에서 믿음은 숙성되고 절망의 종점에서 믿음은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바로 치료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으셨는데 그 첫번째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고 또 다른 이유는 15절에 나옵니다.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보는 것을 누가 믿는다고 하지 않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표적은 예수님의 신적이 능력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분의 부재는 바로 죽음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부재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이 죽음을 찾아 갑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나면 결국 승자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은 20:31에 기록 목적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믿음(피스토스,24)과 생명(조에,13)입니다.
7절부터는 이제 이틀을 더 유하신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과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유대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곳입니다. 위험이 현존하는 곳입니다. 8절에 보면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팔린)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나 제자들은 4절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십니다. 위협이 있지만 하나님 영광을 위한 주님의 길을 그 무엇도 꺽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9-10절,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밤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불빛이 있어도 자신의 발 정도를 비추는 정도이기에 밤길은 매우 위험하고 부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낮을 12시간으로 이해라고 하루를 24시간으로 여기는 당시의 시간관으로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아직 낮이라는 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제자들이 유대에서의 위험을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왜 낮과 빛을 밤과 어둠을 시간을 들어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그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함께 간다. 나와 함께 있으니 안심하고 믿음을 가져라! 제자들의 눈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보다 강하고 자신들보다 수가 많았기 때문에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록을 그들이 안다면 주님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신32:30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이후 주님은 11절,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12절에 잠들었으면 낫겠으니 안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만류합니다. 고대에는 잠과 죽음을 쌍둥이 형제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죽음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잠자는 자를 깨우시듯 죽은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해 못하는 모습에 주님은 14절에서 직접적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밝히십니다. 이후 15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실제로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이 이틀을 더 요단강 건너 베다니 에서 머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리아 자매들은 가슴이 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오라비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그렇지 않은 가요? 정말 절실히 하나님이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에게 기도해도 도무지 응답을 받지 못하고 마음에 평안도 없는 순간들이 있지 않았나요? 우리는 실제로 죽고, 실제로 망하고, 실제로 아파하고, 실제로 슬퍼하고, 실제로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은 더디고 구원의 손길을 짧아 보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속에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차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어려움과 고난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16절 같이 읽겠습니다. 16.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디두모는 도마의 별명인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디두모’는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됩니다. 도마는 12제자중 한사람으로 의심의 대명사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용감하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하시는데 도마는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도를 오해합니다. 용감한 행동 같지만 무모한 행동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도마는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습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과한 행동속에는 자신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행동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일제시대때 많은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했던 과오는 그들이 신앙 속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롭게 사는 삶의 형통과 출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 죽으러 가는 것을 의미 합니다
[결론 및 적용]
말씀을 정리합니다. 나사로의 아픔을 통해서 세상사람들이나 믿는 신자나 질병과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신자의 믿음을 위해 허락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세상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망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지만 믿는 신자는 고난중 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고난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망가져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미워합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 우리는 무엇을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중 제일 마지막 표적은 죽음을 초월하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 후에 곧 예수님의 공생애 세번째 유월절이 다가오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시작됩니다.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비롯 죽었다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기에 완전한 부활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그때로부터 다시 오실 세상까지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이 일어나셔서 그분의 제자들을 데리고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십니다. 주안에서 잠든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새하늘 새땅 새 예루살렘을 이 땅에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읍시다. 그분은 여러분은 이 세상 가운데서 부르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길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삶은 잠깐입니다. 그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2024년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대로 믿읍시다.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속에 말씀속에 계시해 주신 복음을 바로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믿음을 위해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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