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21(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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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찾아온 주님의 나심

4복음서는 각자의 전달 메시지의 방향에 따라 예수의 나심을 독특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억해보면 요한복음은 1:1-18절까지 선언적으로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런 분이 ‘자기 땅에 오셨다’라는 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말씀’, ‘빛’, ‘거하심’과 같은 은유를 차용하여 보다 선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경우는 족보로 시작하는데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이야기한 후 끝을 그리스도라고 끝을 맺습니다. 반면 마가는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명사 종결 형태로 제목을 붙이고 세례 요한의 소개 후 예수께서 불연듯 나타나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 합니다.
그에 반해 누가의 경우는 예수 탄생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고 덕분에 예수 탄생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애용하고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누가는 1절에서 4절까지 기록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1–4 NKRV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붓을 든 사람이 많았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 후에 누가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이는 기록을 모으고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는 등 철저한 조사를 한 후 차례로 기록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라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데오빌로 각하’라고 하는 아주 높은 위치의 ‘데오빌로’가 읽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어서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는 표현을 통해 이미 알려진 바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1편과 2편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설마 2편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죠. 사도행전 1:1–2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 1:1–2 NKRV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맞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1,2편으로 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1장5절부터 25절까지 헤롯 왕 시대를 거론하면서 사가랴라는 제사장의 이야기를 합니다. 몇 구절을 살펴보면 누가복음 1:6–7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자식이 없는 즉 불임의 상태와 이제는 나이가 많음으로 폐경이 지나버린 확실하게 임신 가능성이 제로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했다고 합니다. 분향단은 성전 안에서도 성소로 불리는 공간에 좌우에 7촛대와 12 진설병을 쌓아 받치고 중앙에 분향단이 있는 구조인데 분향단 앞으로는 지극히 거룩한 법궤가 놓여 1년 한 번만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 바로 앞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아침에 분향단에 분향을 해야 합니다. 그때 11절 주의 사자가 향단 우편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무서워합니다. 13절에 보니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표현은 해석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위해서 간구는 앞서 ‘나이가 많다’는 것과 상반되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 문제는 그대로 두고 그러한 간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을 할 것과 태어날 아이를 ‘요한’이라고 하라는 수태 고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꽤 길게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사자가 전하지만 막상 18절에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다’라고 말합니다. 사가랴는 믿지 못했고 그로 인해 20절에 ‘이 일이 되는 날가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된다’는 일종의 벌까지 받습니다.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이 26절에 ‘여섯째 달에’ , ‘다윗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가겠다’고 말함으로 연속되고 있는 하나의 사건을 엘리사벳을 통한 세례 요한의 수태 고지와 믿지 못하는 제사장의 상황보다 일은 커집니다.
누구냐하면 ‘정혼한 처녀에게’ 입니다. 앞서 결혼은 했지만 이제는 나이까지 들어 아이를 못갖는 상태와 결혼을 약속한 정혼 상태이지만 처녀가 아이를 갖는 이야기는 마치 A가 가능한 것이라면 B가 가능하다는 논리적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처녀의 상태가 임신이 될 수 없는 상태라고 애둘러 말합니다. 그때 천사는 누가복음 1:36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라고 A가 되었다. 그러니 너도 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37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다른 번역에서도 ‘안되는 일이 없다’ 영어 성경에서도 ‘must be’ 반드시 그렇게 된다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19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여기에 좋은 소식이 우리가 아는 ‘복음’이다. 처녀로 임신을 하게 될 마리아에게도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 여자여!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은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나심 즉 성탄은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입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누가복음 1:32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라고는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진다는 것과 조상 다윗의 왕위는 이를 뒤받침하는 왕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이렇게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살펴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메시아이심’이 우리가 믿음의 내용이라면 1:32절은 여전히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 즉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 NKRV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67절 이하에 제사장 사가랴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고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백성을 돌보사’ 요한복음에서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신 일이죠. ‘속량하시며’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대로 이것이 70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앞선 1장의 거창함은 지나갑니다. ‘그 때에’ 즉 일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합니다. 누가는 오히려 ‘아구스도 황제’의 시기라는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 실제로 일어난 팩트를 기반으로 자세하게 미루어 살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윗 가문에 속했고 그래서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아구스도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등록을 하러 갈 수밖에 없었고 그때 이미 임신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탄생의 일상입니다. 일상이라는 건 누구나 시간과 상황에 따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이겠지요? 보편적으로 정혼을 한 사이라면 곧 결혼을 할 것이고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이 일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못갖는 것도 한편으로는 일상처럼 해석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을 비집고 좋은 소식인 ‘임신 한다’는 소식이나 더 나아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고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천사에게는 ‘기뻐하라’는 좋은 소식임에도 당사자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지난 주일에 우리는 빈 무덤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을 붙잡고 있었던 것도 ‘일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의 제자로 함께 다니며 예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던 모습이라면 오히려 엘리사벳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믿음은 더한 상황에서도 굳게 잡고 가는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한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불이 번지듯 번져 나갑니다. 정치로는 당시의 분봉왕인 헤롯의 왕권을 뒤엎는 사건이로 헤롯 왕은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될 뿐 아니라 별을 보고 연구하던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스라엘만 국한된 예수의 나심이 아니라는 것과 사회적으로는 소외받는 목동들에게 먼저 ‘모든 백성에게 미친다’라는 예수 태어나심의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처럼 과연 예수 태어나심의 ‘복음’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기쁜 소식’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성탄의 슬로건인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땅 위에서는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라는 말씀인데 하늘에서의 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땅 위에서의 평화에 모두가 ‘그렇다’고 동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기뻐하시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11절에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한 것은 1차적으로는 ‘목자들’이겠지만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것’이라고 선포함으로 온 백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평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평화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평화를 이야기 할 때 ‘전쟁’과 비교를 합니다. 가장 극단적이지만 비교가 확실하기 때문이죠. 최근 계엄으로 인한 시위를 보면 아버지 세대의 시위는 돌을 던지거나 심하면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했습니다. 그랬던 시위는 ‘촛불’로 진화하더니 이제 ‘응원봉’으로 거듭해 진화했습니다. 어찌보면 건전지 하나를 넣어 만든 대부분이 메이든 인 차이나로 아이돌의 굿즈 템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팬인 이들에게는 내가 지지하는 아이돌의 응원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돌과는 분명하게 구별 되어지는 것이 응원봉인데 그것은 마치 꺼지지 않는 촛불과 다양성의 연합이라는 의미까지 부여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꺼지지 않는 빛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평화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이 기독교를 심하게 폄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해놓고는 믿으면 지옥에 넣는 무서운 양면성이 물과 기름처럼 양립하는 것은 어거지이자 말도 안되는 논리라고 말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야 이런 저런 논리로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시위의 현장을 보면서 응원봉으로 무장했다는 표현이 어석할 정도로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인위적인 빛 하나에 서로가 의지하는 마음을 담고 연대를 하는 평화의 염원은 그렇지 않은 세력 즉 계엄을 선포한 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야 말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를 보내셨다. 그렇게 구주를 믿고 모여든 자들에게 임할 평화는 그렇지 않은 자들 즉 세상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유아 살해까지 서슴치 않는 헤롯 왕의 탄핵과 세상 정권의 끝판 왕 로마의 멸망이 귀결이듯 ‘땅 위에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이렇듯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탄핵이야 말로 우리가 꿈꾸는 ‘평화’의 종착지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은 여전히 헤롯이 통치하고 헤롯보다 큰 아구스도가 통치하는 로마의 시대라는 일상입니다. 그럼에도 인류에게 평화를 주실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 분주복잡한 일상 가운데 태어나 누울 곳조차 마땅치 않아 구유에 눕혀졌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쐐기’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습니까? 일종의 못처럼 생겼는데 더 크고 굵은 형태의 쇠 조각입니다. 바위를 조깰 때 쪼개려는 방향을 따라 구멍을 뚫고 쐐기를 차례로 꽂아 계속해서 두드리면 거대한 바위가 원하는 방향으로 쪼개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쐐기를 박다/치다’는 표현이 그런 것이죠. 더 나아가 변경할 수 없도록 또는 변화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빗대어 쐐기를 박다라고 합니다. 축구에서 마지막 꼴 즉 승부를 결정내는 골을 쐐기골이라고 하는 표현도 그러한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 쐐기를 꽂아 쪼개는 것입니다. 또한 변할 수 없는 쐐기골을 선언하는 시점인 것이죠. 그럼에도 일상은 호적을 하러 온 어느 가정에 태어난 갓난 아이가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난 장면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쪼개지기 시작한 단단한 세상은 그곳에 동박의 박사들이 찾아와 예물을 드리고 경배를 하고, 목자들이 찾아야 경배를 드리는 진 풍경은 일상을사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일상은 공포로 변해 아이를 모두 죽이는 가운데 예수의 가족은 이집트로 피했지만 헤롯의 병사들이 닥쳐 그때즘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일 때는 이미 쐐기로 인해 갈라지기 시작한 평화의 도래를 위한 심판 역시 필요함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탄을 기념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일상으로는 24년의 12월 25일에 불과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에 대한 내용은 저녁에 무엇을 먹느냐? 오늘 누구와 보내느냐에 더 관심을 가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나심은 저와 여러분 삶에 단단한 바위를 깨뜨릴 쐐기가 될 것입니다.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일 일수도 있고, 늘 실패했던 일에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하신다면 그것이야 말로 각자와 또 각자가 속해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땅에서의 평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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