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을 위해 단정한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부제: 장례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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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사랑합니다! 2024년도 마지막 예배에 오신 꿈사땅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행복한 미래가 떠오르는가, 아니면 재앙이 닥칠 것 같은 불안이 찾아오는가? 보통 많은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긍정적인 이미지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왜냐하면 종말에 관한 영화나 작품을 보게 되면 자연재해랄지, 전쟁이랄지, 전염병 등등 인류가 멸망하는 분위기로 연출하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을 듣게 되면 몇 백 년 뒤에는 빙하가 녹아서 나라가 물에 잠긴다는 둥, 이상기후로 인하여 지구의 온도가 높아진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인류가 멸망할 날이 멀지 않는 느낌도 받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왜 종말의 시대인가? 예수님이 이 땅 가운에 오셨을 때부터 종말이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세상이 끝이나기 때문이다. 그 날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성부만 아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신천지라는 이단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성경이다. 신천지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비밀의 책이라며 설교하시는 목사님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신천지가 등장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뭔가 무시무시한 단어들과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읽으면 책에 용이 나타나고 재앙과 심판이 임하는 것, 알 수 없는 단어들로 무슨 말이지 의문을 가지면서 어렵다는 생각과 왠지 모를 두려운 감정이 들게 된다. 먼저 요한계시록이 쓰여졌던 당시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 당시에 도미티안이라고 불리는 로마의 황제가 있었다. 이전의 황제는 네로 황제라고 불리는 카이사르 황제가 있었다. 그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났는데, 화재를 일으킨 주범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누명을 씌어서 박해를 했던 황제였다. 다음의 도미티안이라는 황제는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족족 잡아다가 죽여버리는 악명높은 폭군이었다. 얼마나 악한 왕이었냐면, 길에 있는 기독교인의 어린 아이를 잡아서 부모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하며 황제를 숭배하면 풀어주겠다고 하는 황제였다.
그러한 시대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소망은 무엇이었겠는가? 어서 속히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악한 세상을 물리쳐주시길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터키 지방에 있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사는 소아시아 교회에 밧모 섬에서 갇혀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가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이다. 이 편지는 읽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편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을 어떻게 승리하실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담겨있는 예언의 책이다. 우리가 읽었을 때 어려운 단어와 표현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 에스겔서, 스가랴서 등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록을 읽을 때 무슨 말인지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시선과 생각으로는 계시록을 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숫자 7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렇다. 행운의 숫자 7을 떠올리게 된다. 숫자 4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그렇다. 죽음의 숫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계시록에 나타나는 숫자와 다양한 이미지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경에서 표현하는 그 의미로 바로 깨달으면서 요한계시록을 확실히 드라마틱하게 저자 요한이 쓴 의도를 파악하며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1절부터 하나씩 다뤄보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을 한자로 하면 무엇인가? 그렇다. 신천지이다. 정확한 한자로는 신천신지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했는데,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완전히 온 세상이 불에 타서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고통 중에 신음하면서 썩어짐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이 지구가 완전히 불타서 새롭게 재창조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들으면 그런 뉘양스는 아닌 것 같다. 베드로가 말하는 온 세상이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한 공중 권세를 잡은 악과 악의 무리들이 완전히 소멸될 것을 이야기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우리가 읽은 21장 1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지구가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유한하지 않은가? 그 유한한 것들이 더 이상 썩어지지 않고 영원한 세상이 된다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과 우리의 육체도 썩어지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태로 바뀌게 되는 그때가 올 것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이다.
그러면서 이어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바다’라는 단어를 볼 때 곧바로 노아의 홍수와 출애굽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려고 “땅에서 물러가고 뭍이 드러났다”라고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또 출애굽을 할 때 모세가 무엇을 갈랐는가? 1번 홍해, 2번 가르마.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약속의 땅을 가려고 하는데 가로막는 ‘바다’가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다를 가르셨고,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 반대로 그들을 멸망으로 집어넣으려 했던 이집트의 군대는 모두 바다 속으로 수장되는 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바다’는 주님 다시 오신 후에 영원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환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출애굽하며 홍해를 건넌 백성들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날에 기뻐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을 기대하라는 사도 요한의 편지이다. 이집트의 군대가 홍해바다에 수장되었던 것처럼, 주님 다시 오실 때 사탄과 그의 세력들은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무저갱’이라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전도사님, 그러면 예수님 다시 오시면 바다가 사라져서 바닷가에서 노는 일은 없나요?” 아니다. 바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4절에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핍박받으며 힘겹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는가? 죽음과 아픔과 고통, 전쟁이 왜 있는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서 생겨진 것이다. 자연재해와 동물들의 먹이사슬은 왜 생겼는가? 인간이 지은 죄의 자연세계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그 모든 죄와 죄의 영향아래 있던 것들이 모두 다 사라지게 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절에서 보게 되면 새롭게 될 세상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불려진다. 유대인들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했던 약속을 바로 떠올리며 바벨론 포로에서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역사를 보았다. 그러면서 요한은 현재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죄와 저주로부터의 포로생활에서 해방하게 되어 더 이상 고난당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로 회복될 때를 약속한다. 그러면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거룩한 성과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이 말은 즉 하나님의 구원과 의를 받는 것이 신부와 신랑이 혼인예복을 입고 축하하는 새롭고 긴밀한 결혼 관계와 같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준비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그의 백성을 준비시켰다는 점을 의미한다. 역사 내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의 신부가 되게끔 하려고 빚으셔서 그들이 장차 올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신부된 우리가 거울이 되어 그 영광의 빛이 반사되어서 비추게 하실 것이다. 전도사님이 결혼한 친구가 여럿이 있다. 결혼식 사회도 무려 2번이나 해봤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 준비하는게 정말 빡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로 힘드냐면 결혼 두 번은 절대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 그토록 빡세게 준비한만큼 결혼식이 끝나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다음 손꼽아 기다렸던 신혼여행 때 행복하게 다녀오는 것을 보게 되면서 힘들겠지만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신부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어떻게 되는가? 신부는 결국 어떠한 위험에서도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임재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언약 공동체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실제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섬기는 교회 공동체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여기서 우리는 ‘성막’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봐야한다. 성막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성막뜰까지는 유대인들이 들어가서 번제를 드릴 수 있었고, 성소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지성소는 제사장 중에서 대제사장만 일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성전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킨 대제사장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 성전의 물리적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모든 믿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도 장막을 치시는 하나님의 친근한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누구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요한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을뿐더러 그들이 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성전이 없는 이유는 구약에서 눈에 보였던 성전이 늘 바랬던 최종적이고 영원한 성전의 형태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라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진짜 회복되어야할 성전의 모습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살던 에덴동산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이 다가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동안 이제껏 옛 세상의 어떠한 악과 위협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을 충분히 누리는데 방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첫 번째 창조 때의 에덴에서 사람들에게 임했던 “사망”의 “저주”와 그와 연관된 고통들은 마지막 에덴에서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러면서 이사야에서는 이렇게 요한계시록이 쓰여졌던 700년 전에 그의 예언이 4절과 아주 비슷하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이 계시록의 말씀과 이사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라고 하는 가수의 노래 “장례희망”이 떠올랐다. 이 노래가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천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성경의 이야기를 1인칭으로 해석해서 부른 노래이다. 너무나도 성경에서 예언한 말을 잘 묵상하고 풀어서 넣었다고 생각하는 노래다. 함께 들어보자.
여기 영상 마지막을 보게 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는 이찬혁이 관속에 들어가면서 노래는 점점 페이드아웃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세상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이나 허망함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후의 삶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지도, 누군가 알려주지도 관심도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녀들에게 죽음이란 이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그러니 이찬혁도 장례 후에 하나님의 꿈같은 나라에 입성할 것을 기대하면 기쁨이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음악을 통해 보여준다. 그 모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를 붙잡는 것 밖에 없다. 붙잡는 것은 말씀, 기도, 큐티, 교회에 나와 예배하며 성도들과의 교제, 성경공부와 훈련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명품도 명품에 대해 관심이 있고 알아보고 비교해가면서 점점 그에 대한 가치를 깨달아가는 것처럼, 세상 어느 것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예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세상 누구보다 존귀하게 여기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 은혜들을 날마다 누리시며 특히 졸업하는 고3친구들 청년이 되어서 세상을 따라가면 점점 우리의 영혼은 멸망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소망한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저와 꿈사땅 모든 한 사람, 한 사람되길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