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9 주일오후예배: 요한복음 17:21-23; 요한1서 3:16-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6장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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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7:21-23; 요한1 3:16-18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21–23 NKRV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1서 3:16–18 NKRV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을 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6장 1항입니다. 제가 제목 읽으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제26장 성도의 교제
1.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연합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분과 교제한다. 또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도 연합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서로 교제한다. 이들은 공사(公私) 간에 속사람으로나 겉사람으로도 다른 지체들의 선에 서로 이바지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2024년 마지막 오후예배에 나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오후예배는 2024년 마지막 오후예배이자 저의 이 주제교리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설교가 될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부족한 저를 통하여 함께 교회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살필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오늘도 부족하지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탄이 교회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그보다 더 지난 시간에는 교회 직분자의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우리가 말씀을 살피면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며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금도 교회에서 일하고 계시는지를 함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 살피고자 합니다.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성도의 교제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떻게서든지 적어도 한번쯤은 성도 간의 교제를 하게 되어 있고, 반드시 하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도의 교제를 예배와 뗴어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예배의 순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성찬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기도 하지만, 성도 간의 교제를 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만찬의 자리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으며 교제합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함께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이야기하고, 또 함께 다른 좋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끈끈해짐으로 교제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시고 하나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성도의 교제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신 구속 사역으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주셨고, 우리를 자신 안에서 어떻게 하나되게 만드셨는지를 먼저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하나님과의 교제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교제에서 우리가 얻는 유익들이 무엇인지를 알아갑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와 교제하시는 방식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약속들을 생각나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야기하며 말씀을 나누며 교제합니다.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성도의 교제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 한계점은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우리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역은 무엇인지 잘 알겠는데 오늘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한계가 있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잊어버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의 교제는 우리 힘으로 유지되는 것 같고, 우리가 행하는 교제를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우리에게 뚝떨어진 것으로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교제할 수 있고, 교제를 유지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특별히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제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의 교제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로를 이어주시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 함께 살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사역의 최절정인 십자가를 향해 가시기 전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통해 세워질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21 을 보시면
요한복음 17:21 NKRV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제일 먼저 삼위 하나님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서로와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되어 계시다는 겁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기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십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듯이 예수님은 교회도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하나된 교회를 통해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연합된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리하자면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구원의 계시라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가 하나됨에 대한 독특한 방식이 있는데요. 교회는 그저 “우리 하나되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서의 하나됨이 아닙니다. 17장 앞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됨을 어떻게 구현하고 계시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나이신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17장 1절에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런데 2절부터 4절까지 보시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눠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에게 영광을 주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됨을 구현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우시고, 아들은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하나이신 하나님꼐서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하나됨을 구현하고 계시기에 교회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세워주며, 상호 복종을 통해 그 하나됨을 구현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나머지 본문들에서도 하나됨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22절, 23절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22절에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 23절에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제가 오늘 성도의 교제라는 주제를 잡았으면서 왜 하나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교제의 출발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라는 일체라는 것이 우리의 하나됨의 기원이 됩니다. 먼저 우리는 누구와 하나가 되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은 곧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 내 안에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결별상태였습니다. 결별을 넘어서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계시는 그 독점적인 하나됨,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께서 독점적으로 누리고 계시던 그 하나됨을 하나님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삼위 안에서만 누리실 수 있는 독특한 하나됨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능하심, 전지하심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렸고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정체성과 신분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성부와 성자만이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우리를 양자 삼으심으로 우리에게 열어주셨고, 그리스도와 우리는 왕과 백성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시고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더 나아가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도 서로를 세우며 피차 복종하는 서로 복종하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교제하게 하시고 우리를 서로와 서로를 그리스도께서 이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오늘 본문인 17장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이 17장에서만 그리스도께서 한번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시는 중보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17장의 기도는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기도이며,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도의 교제도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성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공동체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진정한 교제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하나됨이 아니라 고립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아시다시피 이미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공동체로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공동체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시고, 하와를 주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형성된 아담과 하와라는 그 공동체는 고립이 아니라 한몸, 즉 하나됨의 공동체였습니다. 하와를 본 아담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너가 나에게 이런 것들을 해주면 좋겠어. 나를 위해 해줄 것들이 있어.”라는 자기 중심적인 반응이 아니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면서 하와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바로 나라는 존재를 인지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외부로 향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서로 나를 내어주고 남을 생각하는 하나됨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완전히 다른 공동체로서의 성격으로 변합니다. 바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공동체로 변하게 됩니다. 여전히 공동체이긴 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고립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마치 독서실에 가면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지 않습니까? 서로의 공부와 독서에 방해되지 않고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가 있습니다. 그거처럼 하나의 독서실 안에는 모두가 같이 있으나 각자가 고립되어 있는 공동체로 변한 것이 바로 아담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에게로 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담의 공동체는 그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립입니다. 오로지 “나”만 있는 공동체가 아담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에 있지만 고독을 느낍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고, 내 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있지만 모두가 타인에게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존하려는 본성을 지녔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줬으면 좋겠지 내가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모든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는 성향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는데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분단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이 전쟁하는 이유는 타인이 나에게 맞춰줬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안 해주기 때문에 전쟁을 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이유 때문 아닙니까? 직장 동료와 싸우고, 부부끼리 싸우고, 친구끼리 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이해 해주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해도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죄로 인해 공동체가 고립이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이 아담의 공동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가정, 회사, 동창회, 동호회, 동아리, 사회복지단체 등등 수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합니다. 각자 나름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서 끝없이 자주 분리됩니다. 그 안에서 고독감을 우리는 느낍니다.
더 나아가 타인을 자신을 위해서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바로 나봇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아합이 통치할 때였습니다. 그때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곳이 아합의 궁전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아합은 이 나봇의 포도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궁전과 가까운 이 포도원을 자신에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그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거나 그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나봇은 이 포도원은 자신의 조상의 유산이기에 여호와께서 금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나봇의 말을 들은 아합은 근심하며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보게 된 왕비인 이세벨은 무슨 일인지 묻고 아합은 나봇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근심하는 아합의 근심을 해결해주고자 권모술수를 써서 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을 퍼뜨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봇이 죽게 만들고 그 포도원을 아합이 차지하게 너무나도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 악한 일을 저지른 아합의 죄를 지적하시고 저주를 내리십니다. 이 아합은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이 나봇을 희생시켰습니다. 이 아합의 예시가 극단적일 수는 있으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항상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려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공동체는 항상 타인을 희생시키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 나타나셨을 때 아담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와가 죄를 짓게 만들었다면서 하와를 희생시키고, 심지어 하나님께 책임을 물어 하나님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아담의 공동체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의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되지 않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형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를 하려고 한다고 해도 그 교제는 철저히 자기 중심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 상대방을 희생시키려는 교제입니다.
모두가 각자 고립된 이 아담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제2의 아담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담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철저하게 죄로부터 분리되어 죄인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십니다. 특히 그분은 항상 성부와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로 계시고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 항상 고립이 아니라 연합되어 계시고 하나로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아담의 공동체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립되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그분을 시기 질투하였습니다. 그분이 아담의 공동체로 들어오셔서 스스로 고립되신 이유는 바로 이 아담의 공동체를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담의 공동체를 파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파괴된 아담의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시고 우리를 자신 안에서 연합되게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서로를 고립시키는 아담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시고 고립시키심으로 자신 안에 우리를 편입시키셔서 하나되게 만드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만드시고, 그 다음 성도들을 하나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사이를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이어주고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립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이어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 사이에 서 계셔서 지금도 손과 손을 잡으심으로 우리의 사이를 이어주고 계십니다. 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될 수 없으며 결코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 피차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교제를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교제가 가능한 겁니다. 우리와 우리 사이를 그리스도께서 이어주고 계시고 하나되게 만드시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연합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과 영광 안에서 그분과 교제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고난, 죽음, 부활과 영광 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것을 효과적으로 만드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합니다. “또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도 연합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서로 교제한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된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교제합니다. 교제의 방법에 대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요한일서는 아주 직접적이고도 날카롭게 이야기합니다. 요한일서 3:16-18입니다.
요한1서 3:16–18 NKRV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 요한은 성도 간의 교제를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 말합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17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바로 형제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형제를 위해 나의 전인격, 내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형제를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말하는데,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형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형제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18절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것을 우리에게 툭 주어져서 우리가 행하고, 우리가 이루는 것이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시고 서로를 이어주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고립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제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제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시는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입으로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랑하는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와 우리 사이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이어주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제를 보십시오. 그러면 죄인된 나의 시각으로 형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 시선으로 형제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형제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일 것이고, 나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게 될 겁니다. 친구 사이,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등등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제를 할 때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 교제가 가능한 것은 내가 교제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의 교제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그 교제를 바탕으로하고 있는 성도의 교제가 되어서 이 땅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가 천국 잔치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 사이를 이어주시는 그리스도께 감사함으로 성도의 교제를 기쁨으로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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