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Notes
Transcript
고린도전서 12:21-26
“모두의 고통, 모두의 영광”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2024. 12. 30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모두의 고통, 모두의 영광”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자 서로 다른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어 교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각 지체들이 서로를 차별하고, 시기하면 몸에 문제가 생겨요. 발이 손이 되고 싶어하고, 귀가 눈이 되고 싶어하고, 자기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역할을 차지하려 한다면,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와 역할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우리는 충성해야 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남의 것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자, 오늘 본문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지체가 지체를 무시해요.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계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성도가 있고, 중요하지 않은 성도가 있고.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중요합니까? 누가 중요하고 말고가 없죠. 다 중요해요. 소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직분을 막론하고 모든 성도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안타깝게도 성도들 간에 차별이 있었어요. 특별히 어떤 은사를 가졌는가가 차별의 기준이었습니다. 좋은 은사를 가졌으면 대우를 받고, 안 좋은 은사를 가졌으면 대우를 못 받아요. 그리고 아예 은사가 없으면 아주 찬밥 신세였어요.
그런데 여러분, 좋은 은사 안 좋은 은사가 어딨습니까? 다 똑같죠. 교회에 쓸 데 없는 사람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교회는 약한 자를 차별하는 공동체가 아니에요. 오히려 약한 자를 돌보고 존귀하게 여기는 공동쳅니다.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교회는 한 몸입니다. 머리도 한 몸이고, 손도 한 몸이고, 발도 한 몸이에요. 각 지체는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어느 것이라도 하나가 사라지면, 몸에 문제가 생겨요.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지체가 아프면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다같이 아픈 것이 정상입니다. 발가락 하나만 찧어도 온 몸이 아프잖아요. 한 몸이라는 것은 아플 때 같이 아픈 겁니다. 그리고 즐거울 때 같이 즐거운 거예요.
오늘 본문 26절을 다같이 읽어 볼까요? 26절 시작,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아멘.
지체 하나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아요. 이것이 한 몸입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힘들고 지쳐서 낙망하고 고통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도와야 돼요.
그러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영광을 얻으면, 그 역시도 우리 모두의 영광으로 여기고 축하해야 합니다.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처럼, 우리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눠야 돼요.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 아닙니까?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이 다 나의 이웃이에요. 전도하는 것만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 역시도 이웃 사랑이에요.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해마다 감사나눔, 사랑나눔을 실천하고 있잖아요. 나도 형편이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사랑을 전달해요. 누군가는 이 일이 괜한 낭비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본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많은 것을 낭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사마리아인이 자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 물질, 노력, 많은 것을 낭비해야 됩니다. 예수님은요, 자기 목숨까지 낭비하셨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목숨을 낭비했다고 말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 죽음은 진실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거룩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섬김도 마찬가집니다. 남을 위해서 내가 들이는 시간, 물질, 그 모든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을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우리의 이웃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겁니다. 낭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이웃을 돌보십시오. 가족을 돌보시고, 주변의 이웃들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교회의 몸된 지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돌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오랫동안 안 보이는 지체들이 있거든, 오랜만에 안부전화도 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보고, 격려하여서 그들이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도록 여러분의 시간과 수고를 낭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제가 저녁에 혼자 사무실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가 교회에 오더니 2층에서 뭘 열심히 하더라고요. 누군가 하고 봤더니 김수정집사님이 2층에 있는 온수통에서 물을 다 빼고 청소하고 또 새로 물을 부어서 헛개차, 돼지감자차를 끓이더라고요.
새벽에 성도님들이 드시도록 이 저녁에 와서 준비를 한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는 자기 것을 낭비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전체의 즐거움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들 끝나고 가실 때 헛개차랑 돼지감자차 한 잔씩 더 드시고 가십시오. 여러분이 드시고 즐거워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보람이에요. 생각날 때 한 마디 격려해주고 잘 마셨다고 고마워하면, 어깨춤이 나와요.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많은 분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누구는 청소로, 누구는 주차안내로, 누구는 주방봉사로, 각자 받은 은사대로, 각자 받은 직분대로, 자기 자리에서 충성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건강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몸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온 몸이 건강하고 팔팔하게 살아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동제일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