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축복의 의미 2024 1230 신3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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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288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신명기 33:1–29 (NKRV)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10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13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20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21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23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 24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의 축복은 개별적이며, 그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진정한 축복은 주가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개별적이며, 그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진정한 축복은 주가 함께하심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축복.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 곧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앞두고 받는 축복의 선언.
그런데 이 축복의 선언이 옛 야곱이 자녀들에게 일일이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각 지파에 따라 다양한 축복의 메시지를 선언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개별적이며, 각자의 특징과 역할에 맞추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지파가 맡은 사명과 은사가 다르듯이,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축복과 소명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유다
유다 지파는 전투와 리더십의 역할을 부여받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인식하게 됩니다.
신명기 33:7 (NKRV)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레위
신명기 33:8 (NKRV)
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 이러한 정체성은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영적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 있다.
각자가 받은 축복이 다 다르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비교’에 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절대적 가치 보다는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 가치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많이 불행을 느낀다. 사회가 고도화 될 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다같이 못살고 힘들고 어려웠을 시기는 비교대상이 없기 때문에, 삶이 고단할 지언정 행복지수가 높았다. 그러나 삶에 여유가 생기고 풍요로워질 수록 상대적 가치 비교에서 오는 좌절감이 현대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성경 이야기가 어디인가? 주인에게로부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이야기가 아닌가. 각자 받은 달란트의 양은 달랐으나, 각자가 받은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이 남들보다 적고 초라해 보여서, 주인에게 혼날까 두려워 그것을 땅에 묻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개별적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관심이 있지, ‘남들 속에서 나’에 대해 관심이 있지 않으시다. 오직 이 세상에 나 한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축복과 삶의 은혜에 대해 묵상하길 원한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전체에서 보인 각 지파를 향한 축복에 관해 요약을 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본문을 연구하면서 좀 더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이 축복의 열거. 누군가에게 축복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축복은 무엇으로부터 시작이 될까?
본문 중 두 가진 단어를 집중해서 보고자 한다.
성경에는 많은 축복의 사건들이 나온다. 당장에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야곱이 이 축복 때문에 우리가 아는 갖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닌가.
신명기 33:3 (NKRV)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축복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사랑한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단 한번만 쓰인 유일한 단어로 표현되었다. 호베브. 깊은 마음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애틋한 부모의 마음과 같은 사랑이리라. 이러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애틋한 마음의 사랑은 에로스적, 필로스적 사랑을 넘은 사랑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종반부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축복을 모세를 통해 주고 계시는데, 이전까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들이 덮어놓고 사랑받을 만한 자들의 모습이었는가? 힘들고 어려운 시험들이 많았고, 그 가운데 목이 뻣뻣한 백성들로 하나님께 징계받고, 저주받는 모습들도 당장에 지난 31, 32장에 등장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축복은 당신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그 사랑이 내 자식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에서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한 번 볼 수 있는 단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애틋한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다. 이 사랑을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축복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한다. 자녀가 부모의 이 진짜 사랑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 자녀를 향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철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을 깨닫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이 나오는 손만 바라보고 있는 아직 철들지 못한 어린아이도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럴 때가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복 주면 행복했다가, 조금만 힘든 일 찾아오면 낙심하고 시험들고. 철든 자녀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의 관계가 우선이다. 부모와 건강한 관계가 형성이 되면,
또 하나 여수룬이라는 말이 있다.
여수룬이 무엇인가? 여수룬은 이스라엘을 말하는 별칭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상적 성격을 묘사하는 상징적인 명칭이다(사 32:15, 신 33:5, 신 33:26, 사 44:2).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사용된 고유명칭이라는 것. 이 단어의 어원은 주로 야샤르에서 왔다고 한다. 야샤르는 곧다. 바른, 직선적인. 거기에서 파생된 정의로운, 공의로운, 정직한, 등의 의미가 있다. 이 야샤르에서 파생된 미쇼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명사는 주로 ‘평평한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리적인 의미도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수룬의 어원 야샤르 거기서 파생된 미쇼르라는 단어는 언던과 대조되는 ‘평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별칭으로 ‘여수룬’이라고 할 때, 곧은, 평평한 곳의 어원을 가졌으면서, 그들의 삶과 그 자리는 전혀 곧거나 평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장에 문자 그대로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 지금의 이스라엘 땅은 평지가 많이 없다.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그렇다. 중앙 산지와 갈릴리의 고원과, 험악한 광야 지형까지. 그들이 사는 땅 자체가 곧거나 바르거나 야샤르한 곳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평탄한 역사가 아니었다. 침략과 수탈의 아픔, 나라 잃은 슬픔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좁혀 보더라도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야샤르한 삶을 사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었다. 예수님마저도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와서 언덕 위 높이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여수룬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한 별칭을 가지면서도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명기 33:29 (NKRV)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동행하심이다. 땅이 평평하지 못하고 세상의 조건이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눈이 그들과 함께 하셔, 이른비와 늦은 비의 은혜로 그 땅을 적시고 소산을 내게 하셨다.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고 형통하지 못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승리, 결국엔 천국 소망을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절대 좌절할 수 없는 이유는, 주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 땅에 진리가 사라지고 구원의 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탄함은 세상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말하는 축복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025년 우리 그렇게 살기 원한다. 여전히 우리의 삶이 저 골짜기의 음침한 모습일지라도 우리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2025년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이 진리를 누리는 진정한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