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가, 염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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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 후 더 이상 비유로 가르치지 않으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최후의 메시지였습니다.
1. ‘양과 염소 비유’의 문화적 배경 (31~33절)
예수님 당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낮에는 양과 염소가 같이 풀을 뜯게 하다가 밤에는 보통 두 짐승을 따로 떼어 놓았는데, 염소들은 실내를 좋아했던 반면, 양들은 확 트인 곳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에게는 양이 염소보다 더 가치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대개 양들은 목자의 말을 듣는 편이지만, 염소들은 잘 안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는 이유는, 오른편은 선한 쪽을 의미하고 왼편은 나쁜 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던 양과 염소 구분 작업을 통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 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지금은 모든 민족이 함께 섞여서 살고 있지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마지막 심판 날이 되면 구분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 각각 심판하실것 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거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벌과 영생을 가르는 영원한 구분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영원하고 영구적이기 때문에, 일단 최후의 심판이 임한 다음에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기회가 계속 주어지지만, 일단 마지막 날이 오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2.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 (34~46절)
1)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가?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들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누가 양의 편에 들어가고, 누가 염소의 편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까?
31절에서 예수님이 ‘인자’라고 표현되는데, 34절에서는 ‘임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24장과 25장에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실 때 ‘인자’라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31절에서 인자가 영광중에 와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고 하니까, 인자가 곧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시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양(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염소(왼편에 있는 자들)를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35)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42)
*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35) /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2)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 영접하지 아니하였고(43)
*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36) /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43)
*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36) /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3)
*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3)
이렇게 보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기준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었느냐 안 베풀었느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왼편에 있던 자들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된 것은 무슨 악하고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죽여서, 도둑질해서, 간음해서, 사기를 쳐서가 아니라, 단순히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아서 영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단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영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왼편에 있던 자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4절)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그런 환경에 처한 적이 있으셨다고, 그들이 그런 주님을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하시며 영벌에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5-46절)
그러므로 왼편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하지 않은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사랑과 선행이 구원의 조건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또다시 따라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는 기준이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면,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전체 내용을 봐도 그렇고, 성경 전체를 봐도 그렇고,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단지 불쌍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절)
여기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언급하십니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그들에게 분명히 “상속받으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상속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는 자(양)들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 즉 천국을 받는 것은 자기들이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어서 그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는 개념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오히려 자녀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듯이, 그렇게 상속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선행은 결코 구원받는 조건이 될 수가 없는데, 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임금(예수님)은 사랑을 베푸느냐 안 베푸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봄으로써 영생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 즉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그 삶에 이런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인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임금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형제자매들과도 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섬긴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기준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3)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누구를 말하는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영생과 직결되어 있다면, 예수님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40)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도 될 수 있겠지만, 더 구체적으로 보면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그러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곧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돌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시는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도 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를 미워하거나 뒤에서 비난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는 왜 나를 욕하느냐?” “제가요? 아닌데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 형제, 자매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나를 볼 때 과연 주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사람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어느 누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을, 주님은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지 못할 만한 사람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선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회복된다면, 그에 대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양들도 염소들도, 즉 의인들도 악인들도 모두 자기들이 한 행위를 몰랐습니다.
의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사랑을 베풀고 돌봐드렸다는 것을 몰랐습니다(37-39). 악인들도 자기들이 주님께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44). 다시 말해, 사랑을 베풀면서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를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2024년을 마감하고 2025년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스스로 질문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 ‘혹시 나는 염소 같은 양인가, 아니면 정말 양다운 양인가?’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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