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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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6:1-11
“안식일의 주인”
2025. 1. 1
조 정 수
할렐루야. 2025년 첫 수요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놓고 “안식일의 주인”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한 단락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다 큰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사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셨었어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 오전에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죠. 또 바로 그날 안식일 오후에는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셨어요. 이러한 일들은 안식일에는 하면 안 돼요. 귀신을 내쫓는 일, 병을 치유하는 일 모두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다행히도 그때는 바리새인들이 현장에 없었어요.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가고는 있었지만, 아직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볼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바리새인들도 분명히 예수님의 소문을 이전부터 듣기는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소문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번 세번, 계속해서 들려오니까 신경이 거슬렸겠죠. 그러다가 마침내 누가복음 5장 15절에서,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게 되었을 때, 예수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4장 15절 바로 밑에 17절에서 바리새인이 누가복음에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거죠. 자, 누가복음 5장 15절부터 17절까지 한 화면으로 봐 볼까요? (ppt)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화면을 보면 15절에서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 17절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어요. ‘도대체 예수가 누군가 보자’ 하고 엉덩이를 떼고 온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두 사람 모인 게 아니에요.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굉장히 많은 수가 몰려왔어요.
갈릴리의 각 마을, 여기서 ‘각 마을’이라는 것은 헬라어 의미상 ‘모든 마을’이라는 말입니다. 갈릴리의 모든 마을, 갈릴리의 모든 마을에서 바리새인들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갈릴리에 마을이 한두 갭니까?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는 약 204개의 마을이 있었어요. 한 마을에서 바리새인이 한 사람씩만 몰려와도 204명이나 돼요.
그런데 갈릴리에서만 204명이고, 여기다가 유대에서 온 바리새인,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다 더하면, 아무리 못해도 최소 300명 이상 모였으리라고 봐야될 겁니다.
물론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몇 명이나 모였는지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어요. 진짜로 갈릴리의 204개나 되는 마을에서 바리새인들이 다 오지는 않았겠죠. 어떤 마을에서는 오고, 어떤 마을에서는 안 왔을 수 있어요. 다만 갈릴리의 모든 마을에서 왔다고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진짜로 모든 마을에서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적지 않은 수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그 날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셨는데, 그냥 병만 고치신 게 아니라 그의 죄를 사해주셨어요.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이 하나님 행세를 한 겁니다. 신성모독이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첫인상이 너무 안 좋게 박혀버렸어요. 그래서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바리새인들이 따라와요. 스토커처럼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꼬투리를 잡는 겁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뒤에는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거든요. 그래서 마태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큰 잔치를 벌였어요. 이때 동료 세리들도 많이 오고, 죄인들도 많이 와서 같이 음식을 먹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꼬투리를 잡았죠.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하나 걸고 넘어닙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의 시간과 수고를 들여가면서 끝까지 따라와요.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안식일에 예수님을 따라와서 ‘예수가 뭘 하는가 보자’, 하고 지켜보고 있다가 껀수를 잡은 겁니다. 자, 어떤 껀수를 잡았는가,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1절, 시작,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시던 중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상황이 됐어요. 왜 갑자기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됐는지, 아무런 배경설명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밀밭을 가로질러서 가시게 됐어요.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비어 먹었어요. 바로 이 행동이 문제가 됐습니다. 여기서 먹은 것은 문제가 아니에요. 왜 남의 것을 함부로 먹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명기 23장 25절에 의하면, 남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이 허용됩니다.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해서 구제사역의 일환으로서, 자기 밭을 개방해주게 되어 있어요. 다만 손으로만 잘라야 하고 절대로 낫으로 잘라서는 안 됩니다. 적당히 허기를 달랠 정도로만 잘라야지, 낫으로 대량수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은 율법대로 손으로 잘라서 먹었어요. 밀밭을 지나가는 동안에 손에 잡히는 이삭 줄기 몇 개를 잘라서 먹은 겁니다. 이것만 보면 문제 될 게 없죠. 만약에 이 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그러나 이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볐어요. 두 가지 일을 한 거죠. 이삭을 잘라서 수확하고, 손으로 비벼서 탈곡을 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추수행위에 해당합니다. 밀 이삭 몇 개 자른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엄연히 추수행위에요.
안식일에는 당연히 추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4 장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34장 21절에,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안식일에는 밭을 갈 수도 없고, 곡식을 거둘 수도 없어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것을 어긴 겁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왜 안식일 규례를 어기고 이삭을 잘라 먹었을까요? 분명히 오늘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제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삭을 자르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왜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서 먹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가서 보면,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비난을 하거든요.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오늘 본문 3절,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절 4절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아멘.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은 예수님은 과거 다윗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그 일화는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에요. 어떤 내용이냐면, 다윗이 자기 부하들과 함께 사울을 피해 도망을 치던 중에 놉 땅에 이르러 거기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이때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죠. 사울을 피해 도망치고 있으면서도, 내가 지금 사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왔다, 라고 거짓말을 해요. 안 그러면 아히멜렉이 경찰에 신고할 수 있으니까 거짓말을 한 거죠.
그러면서 다윗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합니다. 도망을 다니다 보니까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너무 배가 고팠거든요. 그래서 수중에 뭐가 있든지 뭐라도 좀 달라고 요청을 해요.
그때 아히멜렉에게 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떡이 일반인은 먹을 수 없는 거룩한 떡이었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그 떡을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요.
진설병은 성막 안에 있는 떡상 위에 항상 올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새 진설병으로 교체를 해야 돼요. 너무 오래 놔두면 썩어버리니까. 이때 교체한 진설병은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제사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히멜렉에게 교체한지 얼마 안 된 진설병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히멜렉이 놀랍게도 이것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건데, 주겠다는 거예요. 다만 조건이 있었어요.
자, 사무엘상 21장 4절을 봐 볼까요? 무슨 조건이 있었는가?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조건이 뭡니까?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죠. 여자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관계만 하지 않았으면 주겠다는 거예요. 레위기15 장 18절에 의하면, 남녀가 동침하면 둘 다 저녁까지 부정합니다. 부정한 자는 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아히멜렉이 일반인은 먹어서는 안 되는 거룩한 떡을 내어주는 것은 제사장으로서 재량을 발휘한 거예요. 본래는 안 되는데, 다윗과 부하들이 딱 봐도 많은 고생을 한 행색이고, 배도 많이 고파보이니까 긴급재난지원의 일환으로서 이번에만 특별히 율법을 어기고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윗과 부하들이 부정한 자들이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사장이 재량을 발휘하는 것에도 선이라는 게 있거든요. 똑같이 신호를 어기더라도 차가 한 대도 없는 새벽에 조심조심 신호를 어기는 것하고, 출퇴근 길에 차가 막 달려오는데 위험하게 신호를 어기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둘 다 불법이지만, 심각성이 달라요.
마찬가지로 아히멜렉이 거룩한 떡을 정결한 사람에게 주는 것과 부정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심각성이 달라요. 그래서 조건을 건 겁니다.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다행히 다윗과 부하들이 도피생활을 하느라 여자를 코빼기도 못 봤죠. 그래서 거룩한 떡을 받아서 부하들과 나눠 먹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화를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주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왜 이 일화를 들려주신 걸까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과 다윗이 거룩한 떡을 먹은 것,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죠.
그것은 둘 다 불법을 행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을 어겼고, 다윗은 제사장을 속이고 금지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다윗의 공통점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고픔이에요. 다윗이 왜 제사장을 속이고 거룩한 떡을 먹었어요?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죠. 그래서 평상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은 거짓말을 하고,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먹은 겁니다.
제자들도 그랬을 거예요. 평상시라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짓은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들이 너무나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밀밭을 지나가는 그 틈에 이삭을 잘라서 먹은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의 행동이 설명이 안 돼요. 어떻게 감히 안식일에, 그것도 스승이 함께 있는데 그런 불법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까?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잠시 이성을 잃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걸린 것이죠.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여러분,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법이 지켜져야 질서가 바로 서고, 나라가 안정됩니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법을 어겨야 하는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앰뷸런스가 환자를 싣고 빨리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 신호를 어기고 제한속도를 어기고 달리는 경우가 있죠. 만약에 앰뷸런스가 지킬 신호 다 지키고, 안전운전을 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앰뷸런스 안에서 죽고 말 겁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법을 어기는 경우가 있어요.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는 것, 규칙을 준수하는 것, 다 중요해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는 사랑해야 돼요. 우리가 법을 지킬 때, 거기에는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통법규를 지킵니까?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죠. 그러면 왜 사고가 일어나면 안 됩니까? 누군가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죠. 그러면 왜 누군가가 다치면 안 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법을 지켜야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아멘.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두번 반복하시면서 강조하셨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냐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기반으로 법을 지켜야 돼요. 만약에 사랑이 없이 법만 강조하게 되면, 바리새인처럼 되는 겁니다.
아히멜렉이 율법을 무조건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과연 다윗에게 거룩한 떡을 내주었을까요? 굶어죽든 말든 율법에만 신경을 썼겠죠. 그러나 그러게 하지 않고, 굶주려 있는 사람에 대하여 긍휼을 가지고, 기꺼이 자신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도 자기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기면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아시면서도 배고픔을 달랠 수 있도록 묵인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전에도 안식일을 종종 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두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열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귀신과 열병으로 며칠 동안 고통 받았으면,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안식일 다음날에 했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기다렸다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사람이 죽는다니까요? 골든타임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미룰 수가 없는 거예요. 비록 그 일이 율법을 어기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 할지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엄격하게 율법의 잣대를 대지 말고, 교회 안에서 너무 질서를 지키는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사랑으로 너그럽게 용납하고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셨어요. 안식일의 주인.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이 바로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이 안식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어요. 안식일의 규례를 예수님 마음대로 뜯어고치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새로운 규례를 주십니다. 그것은 규례를 지킴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예배하는 날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함께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의 핵심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해야 돼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그것을 정확히 말씀하고 있어요.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에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해요.
따라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 때는 동시에 이웃 사랑도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하나님 사랑이 아닌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실천할 거면, 온전히 실천하라는 거예요. 이웃 사랑도 함께. 그것이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가서 보면,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직접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이셔요. 회당에 들어가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자, 6절 같이 봐 볼까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밀밭을 지날 때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바로 다음 주 안식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거기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사람을 그냥 “한쪽 손 마른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오른손이라고 안 해요. 그런데 누가는 정확하게 오른손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의 신경이나 근육이 마비되어서 손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른손이 말랐으니까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가 어려웠겠죠. 유대사회는 오른손을 정결한 손으로 여기기 때문에, 밥을 먹어도 오른손으로 먹고, 비즈니스를 해도 오른손으로 해야 돼요. 그런데 이 사람은 오른손을 못 쓰니까 정상적으로 뭘 할 수가 없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죠. 사회생활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왼손이 멀쩡하니까 생존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도 아니니까 지금 당장 치료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만 기다렸다가 내일 치료해주셔도 돼요.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안 되고, 내일 내가 치료해줄게’ 그러면 이 사람이 왜 못 기다리겠어요? 기다릴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히려 못 기다리셔요.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바로 치료해주십니다.
지금 회당에 바리새인들도 같이 있거든요. 이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치료하신다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 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하십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어요. 그 뒤에 예수님이 곧바로 치료하시지 않고,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9절인데요. 9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님이 두 가지의 선택지를 주시면서 이 중에 무엇을 택하는 것이 옳으냐고 하셨어요. 이 질문은 사실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본래는 뭐라고 질문하셔야 하냐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중에 무엇이 옳으냐”고 하셔야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무엇이 옳으냐”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곧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치료받은 자를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것이 곧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야고보서 4장 17절에 보면, 야고보가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아멘.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나쁜 짓을 해야만 죄가 아니에요.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도울 수 있으면서 방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어요.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돼요.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내일이 아니라 오늘 고치시는 이유는, 지금 눈앞에 고칠 자가 있고, 예수님은 능히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능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능력이 되면 당연히 사랑을 실천해야 돼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어느 것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이냐?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안식일을 핑계 대고, 시간을 핑계 대고, 환경을 핑계 대다 보면, 우리는 결국에 타이밍을 놓치고 맙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가 있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거룩한 떡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자유케 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담대히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2025년 한 해를 사랑이 가득한 한 해로 충만케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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