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평강 기원 (에베소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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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 기원 (에베소서 1:1-2)
오늘부터는 주일 예배 시간에 에베소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리고 영의 눈이 새롭게 뜨여져서 새로운 영의 세계를 바라보는 체험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에베소서는 기독교의 복음과 복음의 의미를 간결하게 잘 요약한 책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를 13년, 에베소서를 13년 연속으로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도저희 그의 열정과 충성심을 흉내 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생기는 질문은 다른 성경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로마서이고 에베소서일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잘 정리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만 제대로 읽고 이해를 해도 어떤 거짓된 교훈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깊이 있는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서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미테이지 로빈슨(Armitage Robinson)은 '바울서신들 중의 왕관'이라고 하였고,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서신들의 여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 존 멕케이(John Mackay)는 에베소서를 보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나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체험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나는 소생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로마 옥중에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를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지도를 보시는 바와 같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고린도라고 부를 정도로 세속적으로 타락항 한구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은 아데미를 숭배하고 음란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큰 부흥을 일으켰을 때, 마술하는 자들이 마술책을 다 불태우고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일도 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2년 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 인근의 도시에 목회자나 전도자로 파송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교회와 비슷한 문제가 다른 교회에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아직 교파 분열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에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나 문화적 풍습들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왜 이방인 교인들을 용납해야 하는지, 이방인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왜 유대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는지 분명히 깨달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끼리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이 믿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고 높으신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믿지 않는 자들과의 생활 방식의 차이였습니다. 그 당시 믿지 않는 자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음란하고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술 취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난 후에 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해도 우리 안에는 죄짓고 싶은 마음이 있고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타락에 살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에게는 무서운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이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와 같이 세속적이면서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사탄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어야 하고, 영적 고지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이단도 많고, 미신도 많습니다. 이런 곳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내가 이것을 하고 싶어한다’ 든지 혹은 ‘나는 이런 것을 죽어도 싫어한다’는 식으로 나 중심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장점은 오늘 이 시대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풀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2025년을 맞이하면서 풀어야 할 자신들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놓고, 자신의 학업과 취업을 놓고, 또 자신의 일터에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복잡한 시대에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답을 찾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는 성경의 많은 서신들 중에서 가장 깊이가 있으면서도 실제적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통해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꾸어 질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서신의 인사말인데 짧지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으며, 둘째는 수신자가 누구인지 대해서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을 통해 성도에게 내리는 사도의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모든 것의 답을 찾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 모순을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 된 바울’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도저히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평생을 다니면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감옥 생활에 굉장히 답답해 하기도 했을 것이며, 감옥 안의 부당한 일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체념적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즉 자신이 이런 형편에 있는 것에 대해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라는 식으로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감옥 안에서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이라는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우리 신자들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을 캐내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얼마나 영광된 집단이며 공동체이며, 복받는 공동체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황무지에서 성의 아름다움이 잘 보이고 들판에 있기 때문에 성 안의 등불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감옥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더 잘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2024년도 그러했지만, 이 새해에 더욱 그 뜻을 찾기 위해 결단하셨을 것입니다. 마치 금을 캐는 사람이 사람이 금덩이를 찾아 땅 여기저기를 파헤치듯이, 왜 우리가 여기에 살아야 하며, 하나님은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데나 파헤친다고 다 금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속사람을 하나님의 영적 복으로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금덩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금덩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들이 모인 교회가 영원히 빛나는 시온성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확신과 자의식이 분명하였습니다. 다른 서신들에서도 바울의 확신은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오 오직 …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골), "우리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딤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딤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딛)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갈1:1) 그리스도의 직임을 받은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소명감입니다. 바울은 이 소명의식에 투철합니다. 바울의 소명은 생명보다도 중요했고 그의 삶의 전부였고 그를 지탱해 주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어떤 일에 우릴 부르셨던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목적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소명의식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使徒)라고 부릅니다. 누가 불러 준 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부릅니다. [사도]는 [아델포스]라는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뜻은 '파견하다, 보낸다'는 뜻입니다. 어떤 특수임무를 띄고 파송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국가 용어로는 대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파송한 대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신감이요 사명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 아니고 오직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사도라고 자신 있게 소개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바른말인 복음을 증거 해왔고, 복음을 위해 살았고,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000은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명의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에베소의 성도들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에베소와 성도는 잘 어울리지 않는 실체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라는 도시는 그 당시에 가장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술집이 많고, 마술하는 사람들이 많고, 음란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크리스천들이 ‘성도’, 즉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하는 에베소에 사는 교인들에게’라고 하든지, 아니면 ‘도저히 그런 곳에서 어떻게 아직까지 견디고 있습니까? 에베소 교인들에게’ 라고 할 것 같은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살든지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을 성도라고 불렀다고 죄가 조금도 없는 완전한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세상의 습관이 남아 있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도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당장 세상적 모든 습관을 다 내려놓고 하루아침에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 죄의 습관이 있고 죄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짓는 행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이 죄가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거의 질식시킬 정도로 답답하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 토해 내기 전까지는 성령의 기쁨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쁘고 성령 충만하다가도 혈기를 부리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한순간에 이 기쁨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내 속에는 성령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회복하려면 죄지은 이상으로 고백해야 하고 눈물을 짜내야 합니다. 그러면 겨우 예전의 그 기쁨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하기 때문에 성도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인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말씀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은 그리스도 안과 그리스도 밖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고 인격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밖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결국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인 것입니다. 신실한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자, 다른 하나는 우리 번역처럼 신실한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faithful 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자인데, 결국 우리 신앙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자들 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들이 다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 사람들과 영원히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신실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변덕이 심했고, 이기적이었으며,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믿음이 우리를 보석같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실한 자들’ 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쇠붙이들은 강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녹슬어 버립니다. 그러나 보석은 아무리 오래가도 그 찬란한 빛이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을 때 보석같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대단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참된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인사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사하는 것이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며, 그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서로 대하여 좋은 생각만 가져도 그대로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이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는 더 잘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많은 인사가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와 평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혜라는 개념은 언제나 중요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도 모르게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기 위에는 오존층이 있어 몸에 해로운 방사선이 들어오면 차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혹은 운석이 떨어지면 대기가 태워 버려서 우리를 안전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쿠션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위기로부터 보호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보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지혜를 주어 위기를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울은 은혜가 에베소 교회에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평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강은 소극적으로 내면적 갈등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평강이 없다는 것은 갈등 가운데 있고 내면적 분쟁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바이러스가 들어오게 되면 몸은 그것을 막아내느라고 아프게 됩니다. 열이 나기도 하고 콧물이 흐르기도 하고 몸에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이 그 바이러스를 이겼을 때에는 온몸이 상쾌하고 정신도 맑아지고 아주 힘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주 우리에게 정신적 독을 주사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우리를 영적 침체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 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아주 강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페니실린 주사를 맏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같은 아주 강한 주사를 맞으면 아무리 독한 사탄의 바이러스라고 하더라도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체념하고 참는다고 해서 평강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이해시켜 주셔야 합니다. 즉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길을 처음 갈 때 굉장히 마음이 불안합니다. 때로는 식구들끼리 다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원하던 표지판이 나오면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많은 성도가 어려움 가운데서 말씀을 듣고 굉장히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적어도 자신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에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풍성한 평강이 바로 우리 교회 여러분들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의 소명의식을 본받아서 신실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일부터 신년축복 특별새벽기도회가 오전 6시에 시작됩니다. 오늘 이후의 말씀으로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기원처럼 은혜를 충만히 받아 심령의 평안을 얻어 행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합니다.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를 은혜와 풍성한 평강으로 채워 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새군포교회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 소명을 붙들고,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사명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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