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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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도입]
오늘이 2024년의 마지막 청년예배가 되겠습니다. 다음주는 2025년 새해 첫 예배가 됩니다. 마무리는 새로운 시작으로 향하는 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마무리가 중요한 것은 좋은 시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그런 의미를 담아서 서로를 향해 이렇게 격려하며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교독 하겠습니다 [요11: 17—44]
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 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서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이르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 마리아 자매가 나사라의 병들었음을 알리고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르다가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발걸음을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로 출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바로 그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를 만나 대화하시는 장면, 이후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 그리고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입니다. 10장4절 목자가 양을 앞서 가듯이 예수님은 마르다를 이끄시고,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듯이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까지 주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믿습니다. 본문이 길어서 이제 바로 한절 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유대인들의 장례문화는 사람이 죽으면 당일로 씻고 유향을 바른 후에 바로 무덤에 묻고 장사를 합니다.그 후7일간 애도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 기간에 곡하는 사람을 쓰며 조문객을 맞이합니다. 무덤에 있는 지 나흘이라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을 표현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한 절망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유족들을 위로하러 조문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무덤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사건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냅니다. 죽음의 장소 십자가로 올라가신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합니다.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오리는 3km 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도 조문객들이 계속 찾아온 것을 보면 마리아 남매들은 주변에 신망을 많이 얻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 남매는 예수님 에게만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남매들입니다. 잠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잘 맺어져 있으면 이웃과의 관계는 해결되어 집니다.
20.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 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가정법을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마르다는 삶과 죽음이 예수님의 공간적인 동거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가버나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 공간적인 한계에 붙잡혀 있지 않으신 예수님을 압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의 믿음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기초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이 나중에 제자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십니다. 요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어떻게 마르다는 확신할 수 있었을 까요? 수전절 예루살렘의 설교를 마르다도 들었을 것입니다.(요10:30)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마르다가 보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의 가정법에 예수님은 직설법으로 단순미래형으로 선언하십니다.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종말부활 사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인 지식입니다. 나사로가 지금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분적인 지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어설픈 지식은 우리를 기만합니다.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에 우리는 마땅히 알 부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5번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밝히십니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부활과 생명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은 나사로와 살아 있는 마르다에게 동시에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부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는 자는 부활을 믿는 자와 동일시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을 전제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삶이 부활의 인생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살아가면 요한계시록의 기록처럼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으면 그 순간부터 영원까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이 우리 맘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삶은 영원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력이 생기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마지막에 마르다에게 물으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들음에 만족하지 말고 믿음에 이르라는 권면입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지식은 있으나 믿음이 없는 것은 정보의 취득이고 믿음은 있으나 지식이 없는 것은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옙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은 마르다의 신앙고백에 이릅니다.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속 내가 믿나이다 는 완료시제로 표현되어서 과거에도 예수님을 믿었고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연속성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다소 어긋난 대답으로 마르다가 잘 이해를 못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신앙고백이 대단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하여 세가지신앙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첫째, 그리스도(구속적인 사역), 둘째, 하나님의 아들(신적인 신분), 셋째, 세상에 오시는 분(종말의 재림) 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세가지 직분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르다의이 고백은 요한복음서 저자인 요한의 목적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또한,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호칭을 신성모독이라고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요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은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요 20:31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세상에 오시는 이라는 신앙고백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표현됩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안에 계신 생명이 되십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4
첫번째 장면이 끝납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기 위해 오신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면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믿음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28.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자 마리아는 즉시 반응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심을 몰랐었다. 마르다가 은밀히 마리아에게 말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것에 대하여 알고 있는 마르다의 신중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르실 때 마리아와 같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예수님은 동네 밖에서 마리아를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 발에 엎드렸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시각과 동작과 언어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이 모습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 성품이 다름을 봅니다. 마르다는 언어와 지성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마리아는 행동과 감정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특성을 따라 만나주시고 인도하십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동일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우는 마리아에게 마르다에게 해 주신 말씀을 해주시지 않고 다만 통분해 하십니다. 33절 입니다.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통분히 여기다는 헬라어 “엠부리마오마이”로 놀라운 사건이나 현상 앞에 매우 감정이 흥분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사람들의 울음에 왜 통분히 여기셨을까요?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그것을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비애에 대한 분노, 그 사망을 이끌어 온 죄에 대한 안타까움의 공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인류의 고통과 번민을 공감하며 동정 하신 것 입니다.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와서 보시옵소서’는 복음으로 초대할 때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무덤으로 초청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십니다. 칼뱅은 예수님의 조용한 슬픔의 눈물을 인간의 질병과 고통을 자신이 더 아파하신 증거라고 해석합니다. 이어지는 36-37절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 유대인의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기록합니다. 나사로를 사랑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비아냥 거리는 말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가 사랑하는 자를 살릴 수 없었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행할 때 간혹 받게 되는 오해와 사람들의 반응속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됩니다. 분노와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맞서지 않는 것입니다.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나사로의 무덤은 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돌로 봉인되었습니다. 아마도 짐승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공간인 무덤 앞에 가셔서 죽음과 세상의 차단막인 돌을 철거하라고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사람들의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는 일이고 그 다음은 믿음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돌을 치우라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표현입니다. 이때 믿음을 가지고 돌을 옮기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상식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죽어도 살다는 말씀은 상식을 초월한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그것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믿음과 다르게 행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을 박윤선 박사는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너무도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합의가 세상도 움직이고 교회도 조정합니다. 사람의 상식에서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입니다. 상식도 중요하고 논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평상시의 상식과 논리도 그 권위를 접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마르다가 놓친 것은 예수님에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빈자리를 상식과 논리가 차지합니다. 상식과 논리를 활용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처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믿음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박국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돌을 옮겨놓자 예수님이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부름,감사,인지,간구의 4가지 형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첫째,아버지여!(파테르)라고 부르십니다.둘째,내 말을 들으심을 감사 드립니다. 부정 과거 시제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셋째,내 말을 들으심을 알았나이다. 확신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알고 있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는 풍성합니다. 넷째,내가 말합니다.를 통해 간구하심을 표현합니다. 그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간구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성경은 4가지로 말합니다 (1)죄기 있기 때문이고, 시66:18 (2)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고 약4:2 (3)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고 (4)믿음이 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이 항상 아버지께 응답 받으시는 분이라면 그는 죄가 없으시며 늘 아버지께 구하시고 자신의 정욕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과 백성의 구원을 위해 구하실 뿐 아니라 의심없이 완전한 믿음을 가지신 분임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드디어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음과 어둠과 절망에서 생명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살아남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성경에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등 죽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았으나 모두 다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표징일 뿐입니다. 부활은 썩지 않는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형제는 신령한 형체인데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살아난 사람들의 육체는 땅의 육체와 동일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자유롭게 움직이고 인격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나사로를 풀어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정상적인 삶으로 회복을 명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결론 및 적용]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7번째 표적입니다. (1)2장 물을 포도주로,(2)4장에는 가나에서 가버나움의 신하의 아들을,(3)5장 예루살렘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4)6장에서는 오병이어를,(5)또 물위를 걸으심으로,(6)9장에서 날때부터 맹인을 고치심으로(7)나사로를 살리심, 요한은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 모든 책으로도 부족하다고 표현했습니다. 단지 이 7가지 표적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을 표현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표현 ‘에고 에이미’의 7가지중 5가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1)나는 생명의 떡이다. (2)나는 세상의 빛이다 (3)나는 양의 문이다 (4)나는 선한 목자다 (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6)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장 (7)나는 참 포도나무다
요한복음의 총 21장중 전반부 1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12장부터 이후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과정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필사도 하고 열심히 같이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잘 따라와 줘서 감사합니다. 남은 부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여 가까이 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성령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고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처음에 대학청년부 설교 제목이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로 요한일서 4장 7-1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공식적으로 설교를 마무리 하는 지금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전하면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서로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 서로 다시 만나게 될 때는 더욱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제자로 만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 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