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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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봄의 법칙

예수님을 바라보는 한 해
히 12:1-2
고린도전서 11:13절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어느 마을 산마루에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큰 바위에 얽힌 전설이 그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어떤 장군이 나타나서 마을 전체가 소동이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군은 실망을 안겨준 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정치가도, 시인도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나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며 희망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그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그의 모습이 붉은 저녁노을에 비추이자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외쳤습니다.
“어네스트를 보셔요. 저 사람이 바로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바로 마을 토박이인 어네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산마루 바위의 얼굴을 보고 그 바위를 닮은 사람을 기다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그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스토리는 청교도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me)의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사람은 바라보고 듣는데서 굉장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한 해도 시작부터 끝까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우리의 운명과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에 바라봄의 원칙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들에게 물려 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은혜의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았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바라봄의 원칙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해 갈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그를 기다리다가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이 되었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 언어를 닮아 갈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1.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유혹에 강한 사람이라도 유혹을 바라보고 유혹하는 말을 들으면 그 마음이 시험에 듭니다. 늘 세상 소식을 듣고 보면 불안, 초조, 공포, 좌절, 염려, 근심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소식만 들으면 그러한 염려와 절망이 우리 마음에 안개와 같이 덮여서 짜증이 나고 우리의 삶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켜야지 세상이 마음과 생각을 붙들면 우리는 혼돈과 파괴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면 마음이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을 바라보고 늘 생각하면 자연히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죽었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을 갖게 되며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아무리 부귀, 영화가 많아도 마음이 불안하면 행복이 없습니다. 반면에 초가삼간을 짓고 나물을 먹고 살아도 마음이 평안하면 행복해 집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평안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평안하면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다 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좌우편의 강도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때 한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구원을 받고 낙원이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비방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운명에 처했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깨달으므로 죽음에서 자유를 얻고 천국의 영광을 얻었지만, 다른 사람은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한 교인을 찾아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평소에 믿음이 약했던 그 교인은 상태가 위독하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대로 세상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강도처럼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목사님을 쳐다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환경을 보면 불안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람 보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성공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막았습니다. 마귀가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다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걸어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만큼 오해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침 뱉음을 당하셨고, 모욕을 당하셨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일 싫어하는 것이 오해받는 것입니다. 그저 조금만 오해를 받아도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오해하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으셨습니다.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해받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바라보면 긍정적인 꿈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가고 사주팔자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평안을 얻게 되고 내일에 대한 찬란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언어, 행동이 달라지고 나아가 운명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보고 십자가의 사랑 속에서 나를 보면 나의 자화상이 달라집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1장 3-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게 된 것은 창세전에, 하늘과 땅을 짓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나를 택하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좋아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셔서 나를 택하시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값없이 받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이사야 49장 15,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1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의 자화상을 발견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과 역경 중에도 꿈을 잃지 않습니다.
헬렌 켈러는 삼중고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았다고 하나 진정으로 살 수 없는 조건입니다. 이런 조건으로 생을 살라고 하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고 해도 비난하거나 말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나를 왜 이 따위로 만들어놓았습니까? 이렇게 만들어놓고 세상을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당신은 너무 잔인한 분 아닙니까?”
헬런 켈러의 상황은 이렇게 분노하기에 충분할 만큼 암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하고 감격하는 인생을 살았고 오히려 자신을 통해서 가치를 흘러가게 만드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헬런 켈러는 20세에 하버드 대학의 레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헬런 켈러가 대학을 다니던 20세기 초반에는 신흥 재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자 이들은 덜컥 겁을 먹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는 오히려 도덕적입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부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두려움과 함께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네기 같은 사람도 많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헬런 켈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주는 사람에게도 상당한 기쁨과 보람이 됩니다. 그래서 카네기도 헬런 켈러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20세이던 헬런 켈러에게는 원고를 쓰고 받는 일정한 액수의 수입이 있었다고 합니다. 헬런 켈러는 카네기의 장학금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그 장학금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저는 충분한 수입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인생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돈이 있는데도 장학금을 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는 것보다 장학금을 주는 인생이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헬런 켈러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를 통해서 가치가 흘러가게 만드는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자신의 자아상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멋있는 자화상을 주셨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우리가 범사에 잘되기 위해서 저주를 짊어지셨고, 우리가 강건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 주셨으니 우리는 이런 꿈을 꾸고 이런 자화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은 옛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사진틀을 바꾸어 걸어 놓으십시오. 옛날 사진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축복의 사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 된 사진으로 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으로 색칠되어 있는 사진을 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화상을 바로 보게 되고 긍정적인 꿈을 소유하게 됩니다.
3. 예수님을 바라보면 언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하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상을 빚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말에도 강력한 위력이 있습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선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지만,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이기 때문이다. 말은 화살과 같지만 또한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손으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은 쏘아 대는 무서운 상상력을 피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탈무드에서 말의 위력을 소개한 것입니다.
말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마치 한 방울의 향수가 방안 전체의 분위기를 다르게 하듯 사람은 적은 말로도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말에는 쉽게 내뱉는 한 마디에도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위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은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핸들과 같습니다. 자동차의 핸들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듯이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말이 상대방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시골 작은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 때, 신부를 돕던 소년이 실수하여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 소년의 뺨을 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말아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성당과 하나님에 대해서 무섭고 사랑이 없는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 소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라서 결국 유고의 무자비한 독재자 티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성당에서 똑같이 포도주를 엎질렀던 다른 아이는 그 성당 신부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한다며 오히려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 아이는 커서 유명한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풀턴 신부입니다.
이렇듯 말에는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세워주고 살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표현으로 성공한 여자 사업가가 있습니다. 살찐 사람을 대상으로 속옷을 만들어 부자가 된 여자 사업가 오스틴은 표현하는 말의 기술만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처음 사업을 구상하면서 시장조사를 한 결과 뚱뚱한 사람이 속옷을 구매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입을 속옷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뚱뚱한 사람도 예쁜 속옷을 사고 싶어 하는데, 예쁘고 아름다운 속옷은 거의 모두가 날씬하거나 적당히 살찐 사람들을 위해서 제작되고 있어서 이들을 위해서 예쁜 속옷은 제작조차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사실에 착안하여 뚱녀들을 위한 예쁘고 아름다운 속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조사 결과 나타난 두 번째 문제는 뚱뚱한 사람들이 속옷가게에 가서 ‘빅 사이즈’를 보여 달라고 말하는 것을 쑥스러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빅 사이즈’라는 말의 분위기가 구매자로 하여금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예쁘고 아름다운 큰 사이즈의 속옷을 만든다 하더라도 판매가 어려울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오스틴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빅 사이즈’ 라는 말 대신 ‘퀸(Queen) 사이즈’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크고 뚱뚱한 사람들이 입는 속옷’ 이라는 느낌을 주는 ‘빅 사이즈’가 아닌 ‘여왕이 입는 속옷’ 이라는 의미에서 ‘퀸 사이즈’ 라고 표현만 바꾸어 주었습니다. 오스틴은 자신의 회사에서 출시된 속옷을 입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자신이 뚱보가 아니라 여왕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긍정적인 말과 믿음은 그를 큰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사용하는 한 마디의 말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뚱보로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여왕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말도 자연히 달라집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은 곧 입으로 시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분을 닮아 예만 하는 인생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승리하고 축복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유다 왕 여호사밧 때 나라가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여호사밧을 치고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지만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여호사밧 왕이 주님을 바라볼 때 그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찬송하는 자들을 앞세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금년 한 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갈보리 산 십자가의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고 그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하고 기뻐지며 내일에 대한 긍정적 꿈을 갖게 되고 언어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한 해가 되어 축복의 새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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