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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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믿음
오늘은 백창우 시인의 겨울이 오기 전에 시 한편으로 시작해 보려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얘야,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몇 장의 편지를 쓰자
찬물에 머리를 감고
겨울을 나는 법을 이야기 하자
가난한 시인의 새벽 노래 하나쯤 떠올리고
눅눅한 가슴에 꽃씨를 심자
이제 숨을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 보자
큰 것만을 그리느라
소중한 작은 것들을 잃어온 건 아닌지
길은 길과 이어져 서로 만나고
작은 것들의 바로 곁에 큰 것이 서 있는데
우린 바보 같이 먼 데만 바라봤어
사람 하나를 만나는 일이 바로
온 세상을 만나는 일인데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린 참 멍청했어
얘야, 오늘은 우리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자
겨울이 오기 전에
시인은 지금 겨울이 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큰 것만 잡으려고 달리다가 작은 것을 놓치고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소중한 것에 마음을 두고서 살자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을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운 사람들에게 작은 편지라도 써서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1. 떠날 준비를 하면서 쓴 편지
놀랍게도 바로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쓰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기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인데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바울은 사도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언제나 마지막 날을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며 복음을 전했지만, 그의 사역이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별명이 있는데 소위 ‘부활 장’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이 강하게 외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은 지나가고 썩어버린다’라는 사실입니다.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0~52절)
이 15장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다가, 그 결론 부분인 여기서 무엇을 말합니까? 썩을 것, 즉 유한한 것이 있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것이 있고 남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잡으려고 따라다녔던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잊고 사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거나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 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그런 것들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합니까? 언론도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있고, 언론도 수사에 대한 것들이나 또 여러 가지 뉴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또 각 정치인이나 정당마다 최대한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되도록 굉장히 애를 쓰며 거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20년 정도만 지나면 지금 하는 일들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것들이 다 쓸데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중 정말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들은 대개 다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게 될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있고,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함께할 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다가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하면서 지나가면 별 의미 없는 것, 그냥 기억에만 남아 있는 그런 것, 그냥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해 줄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을 붙잡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날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붙들고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2천 년 전 바로 그 길을 가다가 원래 사울이라고 불리던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기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장 귀한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 추구해 왔던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는 다 좋은 것들이었지만 사실은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 영원히 자기와 함께 해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것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추구하게 된 것을 가리켜 그는 오늘 본문에서 각각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두 가지가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안타깝지만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모두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바로 그러한 모습이 강하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냥 봐서는 차이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늘과 땅 차이보다 큽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또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이 둘의 차이는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종말론적 신앙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우리는 대부분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둘, 즉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의 차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만 ‘믿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예수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며, 또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이 많아도 진짜 최고의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것을 놓아두고 그냥 적당히 좋은 것을 선택한다면 그게 얼마나 바보입니까?
영원하신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감격을 잊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일’, 즉 주님의 날입니다. 그 감격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일을 주셨고 예배를 주셨습니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그것을 잊지 말기 위해 하라고 하신 것이 제사였습니다. 즉,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롭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주시고 예배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이 되거나 짐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냥 어릴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다니거나, 또 오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를 빠지면 뭔가 찝찝하고 뭔가 벌 받을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하는 것은 결코 무슨 부담이거나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대로 살게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또 예배는, 주님을 만나 누리게 될 그 감격과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해주시는 은혜의 사건이며 선물입니다.
우리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미리 맛보기’입니다. 무엇을 미리 맛봅니까? 영원한 천국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물론 우리가 혼자서도 예배를 드리지만, 왜 이렇게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 가면 혼자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혼자 따로 가서 예배드리는 게 아닙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중 한 장면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옵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다 같이 모여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찬양하고 경배하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 그것이 천국입니다.
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흰옷을 입은 큰 무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성도들과 함께 여기서 모여 미리 맛보는 것이 공 예배입니다.
그것을 함께 맛보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미리 맛보라고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는 ‘혼자 잘 믿는 신앙생활’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분명히 ‘부활 장’이고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재림에 관하여 알려줍니다. 생명의 시작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생명의 끝을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소위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특징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예배에는 바로 이런 두 가지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또한 앞으로 다시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억하며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두 시점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셨고 이제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했고 또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좋다고 할 때,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 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시작된 것처럼 마지막이 있고, 또 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가에 있습니다. 그것을 정말 아는 사람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으며, 늘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3. 영원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절)
신앙생활은 지금 이 땅에서 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그날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동시에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썩지 아니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또한 새 생명을 허락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훈련과 양육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이 있고 이 세상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정말로 알고 믿으며 훈련할 때 가능해집니다.
제가 조금 전에 우리의 예배는 종말론적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일할 시간, 공부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되면 쉬거나 여유 있게 하거나 놀게 될 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는 날이 다음에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대충하거나 슬쩍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입니다. 그런데 딴짓하거나 빠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는 날입니다. 그런데 대충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 내 인생에서 내 자녀를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는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내 말을 안 들었다고 마구 야단치고 화를 내겠습니까?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서 감당해야 할 일을 대충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자세이며,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 6:34)라고 하셨습니다. 하루하루 감당하라는 이야기인데, 다시 말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하고 또 오늘 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음에 하지 말고 오늘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채 넘어가지 말고 오늘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또한 바로 그것이 58절에서 말씀하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늘 우리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기에만 집중하며 살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시간만 내면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만남을 미룰 것이 아닙니다.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처럼 느슨하게 주님의 일을 할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하지.’라고 할 게 아닙니다. 그 ‘다음’이 없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무 때나’가 아니라 ‘항상’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에 대충 하지 말고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망(죽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끝을 알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승리의 결과를 알고 경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단, 우리가 딴짓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이 길을 갈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4. 오늘은 최선을 다해 달려갈 시간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하게 살다 보면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두 주 정도만 있으면 이 해가 끝납니다. 매년 이때가 되면, 아무리 젊더라도 한 번쯤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 아니다.’라고 하며 거부하고 싶어도, 언젠가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찾아옵니다. 우리 중에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전부 다 죽습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역사를 끝내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고 또 이번이 마지막 대강절과 마지막 성탄절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또 어떻게 살겠습니까? 계속 그렇게 하나도 손해 안 보려 하며 살고, 미워할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모든 일을 오직 ‘나, 나, 나’에게만 집중하며 이기적으로 살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계속 그렇게 이 땅에서 썩어질 것만 따라서 살아가겠습니까, 마지막인데도?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9, 11, 21)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쓰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바울 곁에 사랑하는 누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 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느끼기에 이번 겨울이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를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데, 겨울이 되면 그때 여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말합니다. 지금 게다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라고 하는데, 오래전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질 때 바로 이 마가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마가는 당시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사람인데, 바나바는 ‘다시 한번 기회를 줍시다. 데리고 갑시다.’라고 하고,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이 사람을 데리고 가면 자기도 힘들고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그가 준비된 다음에 데리고 갑시다. 지금은 데리고 가지 맙시다.’라고 하다가 이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마가에 대해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죽을 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이때는 “마가를 데리고 와라. 그가 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마가에 대한 것을 다 풀어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꽁 해서 관계가 계속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다 털어버리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이 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지금 내 모습을 기억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해 주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58절, 새번역)
바로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았던 사도 바울은 삶을 마감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새번역)
바로 이것이 인생을 마감할 때 우리 각 사람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바울과 같은 이 고백을 하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은 힘차게 달려야 할 시간이며,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가 가까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