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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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신다

언약의 한 해를 기억하자. 미가서 시작은 유다의 왕들을 거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무심경하게 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지나고 내가 그때 ‘윤정부’였잖아 하면 다 이해하는 것이죠. 이들 왕의 이름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라고 밝힙니다. 쉬운 연대표기로는 bc 734년부터 bc 686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세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흐름 정도만 이해하면 되고, 당시는 왕정 국가 형태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 왕입니다. 그리고 다윗 이어서 솔로몬까지가 이어지다가 두 개의 나라로 분열합니다. 솔로몬의 신하인 여로보암이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북 이스라엘, 남쪽을 중심으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 유다로 분열하고 남 유다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갖습니다. 차차 살피겠지만 두 나라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다양한 왕들이 세워지면서 왕정 국가로 이어지다가 북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남 유다는 bc586년에 각각 멸망하게 됩니다.
소선지서는 성경에서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말합니다. 총 12권이지만 실제로 한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록 시기도 호세아, 아모스, 미가는 주전 8세기로, 나훔, 스바냐, 하박국은 주전 7세기 이어서 학개와 스가랴가 6세기 그리고 말라기가 5세기로 추정하는데 순서로만 본다면 성경의 위치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의 경우는 년도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 일까요? 성경은 연대를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즉 맥락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선지서가 한 권으로 읽혔고 중요한 ‘주제’가 쉽게 기억되도록 위치하는 구성을 했다는 연구가 학자들의 일치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만 요즘은 핵심부터 살피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읽어야 했을까요? 그 전에 왜 ‘그 왕들의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집중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 어떻게 왕이 세워졌는지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나라의 왕을 보면서 자신들도 왕을 요구하면서 초대 왕 사울을 세우고 왕정국가를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했지만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났고 이어서 다윗 왕은 모든 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까지 하나의 나라를 유지하다가 그 후에 두 개의 나라로 분열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 드린 신하 여로보암이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10개 지파가 속한 북 이스라엘이고 아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2개 지파가 남 유다입니다. 이렇게 분열된 왕국은 각각 bc 722, 586년에 망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위치가 독특한데 이전에는 사무엘처럼 제사장의 신분이 더 중요하고 말씀 선포가 따라가는 형태라면 왕정 시대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경우로 등장합니다. 왕정 시대에 어떤 시기마다 선지자들이 등장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나타나심’입니다. 열왕기상 11:30–31 “30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이 예언은 선지자 아히야가 솔로몬 시대에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라가 분열된다는 예언이죠. 그렇다면 왜 이런 예언을 전했을까요?
솔로몬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열왕기상 11:1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열왕기상 11:7–9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9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못했을 때 책망하고 경고하고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소선지서를 살피면서 ‘어떤 시대였으며’,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피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입니다. 그 핵심을 이렇게 정의하는데 ‘하나님의 공의, 인애, 의’라고 하는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멸망이 결과입니다. 우리 생각에 멸망은 끝이잖아요? 그럴 때 어떤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다시 회복을 시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어떤 이유가 3:16에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우리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절은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라고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들을지어다’ 라고 명령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고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유다의 왕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왕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사마리아’를 말하는 것은 앞서 ‘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결과가 유다 왕국에도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너희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같은 심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신다’는 말씀은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말씀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전에서 나오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은 백성들은 산당이라는 곳에서 분향하는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5:34–35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3절부터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셨다는 표현은 지극히 높은 경외감과 함께 두려운 상황입니다. 모세가 여호와를 만날 때 시내산은 온전히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일정한 경계를 넘어서면 ‘죽음’ 밖에는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책임을 여호와께 돌릴 문제가 아니라 마치 태양을 향해 계속해서 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이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처소에서 나온다는 말씀 그리고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는 말씀은 이어지는 4절의 당연한 결과를 동반합니다.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집니다.
왜 처소에서 나오시나요? 그 이유가 5절에 ‘이는 다 야곱의 허물 때문이고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어지는 질문 형태는 ‘너도 알고 있지’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부모님이 ‘너 잘못한거 알고 있지’하면 바로 수긍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의 허물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자들을 총칭할 때 ‘야곱’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사마리아와 연결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산당이라고 고발합니다. 이는 죄에 대한 고발장에 고발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소에서 나오신다면 반드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선언하고, 그 죄를 사마리아와 유다의 산당이라고 적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한 후 그에 대한 심판을 6절 ‘내가 사마리아를 돌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낸다’는 심판은 말 그대로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 8:28 “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 이스라엘의 심판은 ‘우상 숭배’로 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로 ‘음행의 값’,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니’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세우는 것은 이방인들이 행하던 종교의식입니다. 여기에는 ‘음행의 값’이 따라 붙습니다. 본문에 ‘기생의 값으로 모았다’ 다시 말해서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을 따라함으로 여호와께서 규정하신 방식을 버렸다.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8절부터 ‘내가 애통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여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한다’라고 시작합니다.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은 계속해서 9절에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예수살렘에도 미쳤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심판을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선지 강도를 정확하게 알 길이 없는데 최근 계엄으로 인한 우리나라는 시민들의 일상을 바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뉴스에서 눈을 못 떼고,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뉴스를 찾아보는 일종의 불안 증세를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 덮친 겪으로 제주 항공 참사로 인해 깊은 유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국민들은 다시 불안이 증폭되는 트라우마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슬퍼하기는 커녕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건 도무지 참지 못할 울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도 한 편에서 필요한 것을 보내고 자원 봉사를 하며 고통받는 유가족을 위로하려 동참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심판은 9절에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3절에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는 강력한 심판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이러한 심판이 ‘산당’의 문제, ‘우상의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 ‘음행의 값’이라는 고발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문제로 인한 심판은 예루살렘까지 즉 하나님의 성전까지 닥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11절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이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는 법인데 하나님 심판은 결코 그럴 수 없는 완결성을 의미합니다. 북 왕국은 남 유다에 비해 150여년 앞서 망했습니다. 북 왕국의 멸망은 남 유다에 대한 경고임에도 사람들은 늘 ‘나는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시하고 안일했습니다. 남 유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자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고 했지만 이들도 사마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처럼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 역시 벌거벗은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는 상황이나 여러 성읍들에 구체적으로 들이닥친 재앙을 보여주고 16절에 자녀들이 잡혀가서 머리를 깍아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은 예언은 참혹한 멸망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이사야라는 선지자를 보내서 3년 동안이나 벌거벗은 모습으로 다니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사야 20:1–3 “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그렇게까지 보여 주셨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정도까지 보여주고 현장 학습을 시키면 나는 안 그러겠다고 말은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시즌 2로 돌아온 ‘오징어 게임’은 시즌 1보다 돈을 더 벌겠다는 이들과 그래도 목숨에 가치를 둔 사람의 대립 구조를 보여 줍니다. 안타깝게도 결국은 안 변하더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전 암 환자 1천명을 대상으로 10년을 추적 관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는데 수술 후 2-3년 동안은 운동과 치료를 하면서 보내다가 4년즘 되면 술과 담배 그리고 운동도 안하면서 발병 전과 같은 생활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 갔다고 합니다. 5년이 지나면 그나마 검사도 소홀해지고 이때즘 암은 재발해서 다시 병원을 찾는 사람이 30%즘 되고 결국 10년 동안 운동과 치료를 통해 완치를 받고 삶이 완전하게 변해서 생존한 사람은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래전 결과입니다. 지금은 의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서 더 빠르게 초기의 암을 매우 높은 비율로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1차적인 치료 이후 운동과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은 의학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더 빨리 발견되기 때문에 오히려 오랜 시간 추적 조사와 완치를 위한 운동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방영되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이런 고발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부모가 달라졌어요, 이혼 숙려 프로그램 등 재미로 보는 것 같아도 결국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북 이스라엘은 분열 되자마자 빠른 시간에 변질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면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 곳에 두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12:30–31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고 고발합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외형으로 드러내는 면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몇몇은 아무리 좋더라도 세상과 타협하고 받아 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시작부터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그 중심에 ‘자기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2:26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그렇게 신을 만들고 예배 형식을 이방인이 산당으로 바꾸고 산당을 주변으로 신탁을 빙자한 기생의 값이라는 이방 제사의 유지 방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또 산당을 짓고’ 산당은 철저하게 이방 종교의 방식입니다. 민수기 22:41 “4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부르시고 백성다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한 백성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성전에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며 우리 모두가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며 하나님 백성다움을 드러내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했던 이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올바로 깨닫고 2025년은 예배자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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