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야 할 2025년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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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지만 그리 거창한 목표가 아닙니다. 어쩌면 바램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올 해 세우신 작은 바램들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해 11월 부터 우리 교회가 2025년은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기도하며 준비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였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이따적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은 사실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2024년 연초에 “푯대를 향해”라는 표어를 가지고 한 해를 함께 하자고 다짐하며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푯대 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보고 달려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 왔다면 옳은 것, 바른 길이 무엇이고 어디인지 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왜 푯대 보다 세상을 더 많이 봤을까요? 관심이 세상에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요?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안내견 훈련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본적이 있습니다. 안내견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혈통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혈통 관리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안내견이 가져야할 능력들을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안내견의 가장 마지막 훈련이 “유혹 참기”였습니다. 다른 모든 과정에서 합격을 한 친구도 이 “유혹 참기”과정에서 탈락하면 안내견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훈련을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에서 하는 거예요. 노점상이 즐비하게 늘어선 그 통로를 안내견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안내견이 음식 냄새에 반응을 해서 가던 길에서 기웃기웃하면서 멈추거나 방향을 틀면 탈락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민감한 것에 유혹 당하지 않는 것이 안내견에게 가장 큰 훈련이었습니다. 오로지 주인만 바라보고 길을 안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내견 합격률이 30%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린다고 하면서 세상에 기웃기웃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관심이 거기에 있었거든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지만 내 생각이 걸림돌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넘어질 수 밖에 없었고 곁길에 들어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다시 방향을 수정하면 됩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뭐라할 수 있지만 벗어난 길에서 바른 길로 들어서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오히려 박수치고 격려 해 줄 일이지요.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지는 출발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약속하신대로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불의 혀같이 성령이 임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의 각국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여정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믿음이 교회에 그리고 내 안에 훈련 되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43절과 44절에 “사람마다” “믿는 사람”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3절에 사람마다 라고 언급 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놀란 주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44절에 언급한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두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세상 안에 있고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일을 겪었지만 완전히 다르게 분류 되어지고 있습니다.
43절의 사람들은 놀라는 것 그 이상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4절의 믿는 사람들은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첫 번째로 모든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두 번째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판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재산이 아니라 일부분, 다시 말씀드리면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는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이 일로 인해 부흥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교인들의 변화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2025년 우리 교회가 주안점을 두어야 할 세가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나눌 것인가? 제가 1년 반동안 우리 성도님들을 보았을 때 이 나눔을 사실 정말 잘하십니다. 교회 오실 때 뭐라도 가져오셔서 주시려고 없으면 만들어서라고 나누려고 하시는 그 마음에 사실 감동했었습니다. 2025년도부터는 그 나눔과 함께 우리의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고 물건을 나누면서 단지 먹는 것에 중점을 두었겠습니까? 물건을 나눌 때 “나한테 필요 없고 오래 되서 쓸모가 없어”그러면서 주었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매개체였습니다. 무엇을 위한 매개체였을까? 삶을 나누기 위한 매개체였습니다. 떡을 함께 떼어 먹으면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신 기적의 체험을 나누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삶을 나누는 나눔이 공동체 안에 새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함께 친교 할수 있는 것도 역시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 생활이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알고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여러분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지금 나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몰라요. 왜요? 나눔이 없거든요. 2025년도부터는 우리가 함께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올해 셀을 편성했습니다. 추후에 발표를 합니다. 이 셀 모임에서 성경의 말씀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을 나누시고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2절에 보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말씀합니다. 네, 셀모임에서 은혜를 나누시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마음을 갖고 모이는가는 그 모임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교회 구성원이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교회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같은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마음입니다.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 매우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떠나 있을 때 고린도 교회안에 몇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글로에 있는 집 사람들로 부터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 중에 하나가 분열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한 마디로 마음이 나뉘어진 것이었습니다. 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 이런 분파로 인해 교회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급하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같은 말”은 성도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이 통일되고 조화로워야 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일치된 입장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복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이 복음안에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벗어난 말이 우리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취하는 내적 태도와 마음 가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해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를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섬김의 태도가 함께 수반 되어져야 같은 마음을 갖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같은 마음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는 ‘생각하다, 태도를 유지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감정적 상태를 뛰어 넘어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태도가 유지 될 수 있도록 수고와 노력이 수반 되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과 맞지 않는 것이 있을 때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하고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 흩어졌던 마음이 하나로 뭉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 내에서의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2:5 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같은 마음"은 겸손과 섬김, 순종의 태도가 포함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이의 유익을 생각하며 서로 섬기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 "같은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내에 11가지의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뜻을 품고 분열과 갈등을 넘어 공동의 비전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린도 교회가 파벌과 분쟁에 빠졌던 이유는 각자의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대두분의 문제가 여기서 출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얄팍한 꾀를 내면서부터 문제는 발생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어오면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고 왔는지 질문을 드립니다. 냉정하게 생각 내 자신에게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올해 우리가 집중할 것은 시각화 입니다. 요즘 시대 전도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뉴저지 올라가시면 마트 앞에서 전도하는 분들을 종종 보셨을텐데요. 그렇게 열심히 전도해도 거기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는 노방 전도라는 것으로 복음을 많이 전했습니다. 저도 버스 안에서 소리소리 치면서 복음을 전했던 적도 있었구요. 길거리에서 전도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전도의 방법도 변해 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하는가? 이것은 모든 목사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고민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날마다 사람들이 더해지게 되었을까? 말씀을 자세히 보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집을 오픈하고 나눔을 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46-47절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매일 성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오픈 한 것을 보고 있구요.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단 한번도 코끼리를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눈을 가리고 코끼리의 한 부분부분만을 만져보게 하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냐 물었습니다. 꼬끼리 다리만 만진 친구는 꼬끼리는 굵은 주름진 기둥이예요. 코만을 만진 어린이는 아니야 코끼리는 그렇게 굵지 않아 그리고 구멍이 두개 있는 것이 꼬끼리야. 귀만 만진 친구는 아니야 다 틀렸어. 코끼리는 넓적한 부친개 같은 거야. 코이 어린이들이 말하는 것이 코끼리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코기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코끼리를 보여 주면 정확하게 알겠지요.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전도예요. 우리가 어떻게 모이고 있는지 어떻게 나눔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 속에서 얼마나 큰 은혜가 넘치고 있으며 성도간에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전도는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제 우리의 고민이 생깁니다.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어떻게 은혜와 사랑을 전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기도하며 찾아 가야할 목표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친목하고자 모이지 않았습니다. 40년전 세워진 우리 교회는 오직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세웠던 교회 역시 복음 때문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안에는 사심을 가진 자들, 도덕적 타락, 이단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는 반목하고 나뉘고 다투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어야할 교회가 세상 보다 못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먼저 서로 나눔을 가지십시요. 내가 누구였는지 당신이 누구였는지 마음을 삶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같은 마음, 복음을 향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이는 모습, 즉 오픈 되어 은혜를 나누는 모습, 은혜의 예배의 모습을 보여 주라 말합니다.
여러분! 2025년 교회 다운 모습,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부흥은 더디게 올지 모르겠지만 분명 나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씩 성장해 가는 나를 보며 우리는 함께 이야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변했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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