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09 겨울 수련회 2일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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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5:1–5 NKRV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예수님을 몇번 불렀는가? 예수님을 몇 번 생각했는가?
어느때 예수님을 부르고 찾았는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찾았을 때 주시는 마음이 있었는가?
있었으면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예수님과 친밀한 하루를 보냈는가?
우리가 이번 수련회에서 반드시 알고 가야 하는것, 얻어가야 하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과 친밀함이다.
1600년대, 프랑스 파리 까르멜 수도원의 로렌스 형제(수사)는 겉으로는 행복할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행복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하는 일은 날마다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 일들이 전혀 힘들거나 지겹지 않았다.
그는 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에 접시를 닦는 일 역시 그에게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로렌스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종일 노래했고, 늘 기도하는 심정으로 살아갔다. 감사와 기쁨이 넘쳤다.
로렌스 수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늘 경험하며 살았을까?
로렌스 수사는 그의 글을 엮어 만든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늘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그분을 더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특별한 것을 보여주며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보이는 주님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쉬면 같이 쉬면 되고, 예수님이 식사하면 같이 식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중에 제자들에게 나에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이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런 가르침이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때 제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빠지게 될 지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지휘관으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은 병사처럼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고민하고 애를 쓰다가 결국 좌절하고 낙심하여 지치고 두려움에 염려로 가득 차게 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요 제자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이 깊고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랑에 의해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은 친구보다, 부모 자녀 사이보다, 부부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인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내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과 함께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자기 스스로 햇빛과 공기를 얻고,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나무에 붙어 있어 그와 하나 되기만 하면 열매가 맺힙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행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낙심하거나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소홀히 여길 때 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번아웃이 올 때가 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 하다 번아웃이 올 수 있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싱앙생활을 하다가 번아웃이 오는 사람은 대부분 열심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은 사람은 번아웃이 오지도 않는다.
그러니깐 번아웃이 왔을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만큼 열심을 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대부분 번아웃이 오는 상황은
농부가 나무를 가꾼다. 농부가 나무를 가꾸는 유일한 이유는 열매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버린다는 말씀도 있다.
농부가 나무를 가꾸는 이유는 관상용이 아니다. 나무 그늘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바로 열매이다. 오직 열매이다. 그러기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열매는 가지 끝에 열린다. 그러기 때문에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가 맺어지는 가지 끝에 있다.
그런데 사실은 열매는 가지 끝에 매달리지만,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쉽다. 스스로 열매 맺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너무나도 잘 알다싶이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역 할 수록 번아웃이 되는 이유는 나의 모든 관심이 가지 끝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게 하는 가지 끝에 관심을 갖으면 안된다.
진짜 열매는 가지에서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나무에서 얻어지는 영향분으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지는 나무에 잘 붙어만 있으면 열매는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매를 맺는 가지 끝만을 본다. 거기만 신경을 쓴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가지가 붙어있어야 할 그곳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가지는 점점 매말라지고 결국에는 열매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열매가 맺어지는 가지 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기만 하면 그 안으로부터 풍성한 은혜가 쏟아져 나와 우리 안에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다.
열매를 맺어지게 노력하지 않았는데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한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뭔가?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온유, 절제, 충성, 자비, 양선
몇번씩 이야기 했듯이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 하였는가? 이것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저절로 드러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그러면 저절로 이러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나서 마르다는 열심이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혼자 바쁘게 준비하는것이 화나 나서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 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분주하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옆에 있기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을 잊고 일에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모든 수고와 몸부림을 그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성실은 늘 시선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단 하나님의 칭찬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과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에 집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마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 할 수 밖에 없는 자리가 목회자의 자리 일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설교를 하고 찬양을 하고나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찬양 하는데 예수님이 덩실덩실 춤추시는 이미지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다는 것과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군대 차량을 보면 ‘저 차가 과연 굴러가기는 할까?’ 걱정될 정도인데 잘 움직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차량부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이유는 매일 기름 치고 닦고 조이기 때문입니다.
군대 막사도 창고 수준입니다. 물론 지금은 좋지만 그러나 사람이 매일 자고 살고 청소하며 지내니 훌륭한 숙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빈집으로 내버려두면 금방 흉가가 됩니다.
어떤 집이든지 사람이 항상 살아야 최상의 상태가 유지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항상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안에 계시면 우리를 변화 시키십니다.
우리의 삶이 정돈되고 아릅답고 빛이 납니다. 우리가 죄와 싸울 때에도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도인의 종교가 아니다. 개신교는 성자 개념이 없다. 카톨릭에서는 성자 개념이 있다. 그래서 아주 성자같은 분이 있고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이해하는데
어느순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은 특별한 분이고 대부분의 신앙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니깐 실제로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것이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주님과 친밀하게 만들어주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는가?
예배당 기도실에서 만나는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다. 이미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셨다.
고린도 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자니라”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내가 그 안에 그나 내안에 있는것”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다.
마음이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면, 더이상 내가 예수님을 찾아서 마음의 방황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마음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오늘 주일 예배에 올 때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거나 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신경쓰고 온다. 얼굴이나 옷에 신경을 쓴다.
집에서 외출을 할 때 신경을 안쓸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외모를 신경쓰는 것 만큼, 우리의 마음도 신경썼는가?
성경을 읽어보면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우리는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다.
전혀 관리 안한다. 미움, 절망, 시기, 음란한 생각, 욕심, 자살하고 싶은 마음…. 이루 말 할 수 가 없다.
마음은 이렇게 엉망인데 거울보고 외모만 괜찮으면 그냥 나온다. 예배하러도 나온다.
착하게 생긴것과 착한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요한복음 13:2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귀가 생각을 넣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어뚱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생각에 왜 그럴까?
우리는 그럴때마다 대적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에 견고함이 생긴다.
부부사이에도 말 못하는 부모자녀사이에도 말 못하는 그런 생각이 있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이게 왜 이렇게 된것인지.
우리는 우리 마음이 중요한지 잘 모른다. 하지만 마귀는 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는 굉장히 경건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42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사도행전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4절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마귀가 주는 생각을 마음에 품어버리는 것이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 품는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을 지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 우리의 마음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13:3–9 (NKRV)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18–23 (NKRV)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길가와 같은 밭 - 마귀가 왕노릇 하고 있기에 말씀을 듣지도 않는다. 말씀들으러 오지도 않고 들어도 금방 나간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두가지경우를 말씀하셨는데
그중의 하나는 돌밭, 그리고 가시덩굴 같은 밭 이다.
돌밭은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고난을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가시덩굴은 말씀대로 살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질까봐 염려에 가득한 사람이다.
이런 두가지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이경우에는 은혜는 받는데 말씀의 역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정말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가 생기면 빨리 해결해야 한다.
이것보다 더 큰 걱정이 어디있겠는가? 두려움과 염려가 있으면 어떤 말씀을 들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두려움과 염려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려움과 염려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어떻게 보면 큰 문제가 아닌것 같다. 살인죄도 아니고 강도죄도 아니고 음란죄도 아니니 이것이 두려움과 염려가 있는게 무슨 큰 죄인가?
아니다. 이 컵에 담긴 물을 마신다고 하면 그리고 내려놓으면 이게 큰 문제는 안된다. 그런데 강의하는 내내 이렇게 들고 있는다고 하면 여러분이 힘들것이다.
이렇게 물을 계속 들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팔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하루종일 컵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저녁이면 어깨에 큰 무리가 올 것이다.
이 작은 컵하나 하루동안 들고다니는 것도 이정도로 몸에 무리가 가고 어렵다면,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를 한달 두달 을 품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것 절대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 품고 사니 우리가 못 견디는 것이다.
예수님 바라보자 항상 주님 생각하자 그것이 무슨 큰일인가 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계속 내 마음에 주님을 생각하면서 한달을 살고 반년을 살고 1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인생이 안바뀌겠는가?
우리에게 세상이 뒤바뀌는 큰 체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체험 때문에 오히려 망가진 사람이 많다. (금가루 목사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복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항상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내 삶속에 어려움이 생길지라도 늘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완벽한 은혜인 것이다.
우리는 음식 까다롭게 먹는다. 국에 바퀴벌레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바퀴벌레를 들어서 국물 하나라도 다 털어서 바퀴벌레만 빼고 국을 맛있게 먹습니까?
그런 사람 한명도 없다. 바퀴벌레가 들어가 있는 국통 전체를 버리지 않겠는가?
집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겠는가? 우리가 집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신발은 벗지도 않고 안방에 떡하니 담배를 피고 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인데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녕하세요~! 담배 피고 계시네요! 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음식보다 집보다 비교할 수도 없는 우리 마음에 온갖 쓰레기 같은거 다 들어와있고 혹여나 몸에 아무거나 다 받아들리고 아무거다 다 품는다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다 품는다면 몸은 못 견딜 것이다.
진짜 무서운것이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아있는데도 그것을 내 쫓을 생각을 안한다. 그냥 괴롭기만하다. 그러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 했다는 것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에 누가 들어왔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가?
결혼할때 그 자매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루종일 그 자매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애를 낳고 보니 애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니 매순간순간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맞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늘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가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가 하는 일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얼마나 밝을까?
지금 이곳이 등으로 환하다. 그런데 손바닥으로 눈만 가려보면 깜깜해진다.
우리 마음의 심령의 상태이다. 마귀가 우리 마음만 혼미하게 해버리면,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알고 살 수 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 마음안에 분별을 잘 해야 한다. 마귀에 의해서 눈이 가려진 것은 아닌가?
마귀의 목적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나머지는 다해도 된다.
목회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설교를 하면서도 찬양인도를 하면서도 예배드리는 내내 입으로는 주님을 전하면서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을 다해 목회를 한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마귀는 쨈의 명수다)
주님과 함께 하는것에 눈이 안떠진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귀의 목적은 주님만 보지 못하게 하는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매일 지킬 수 있는가?
어느 목사님이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 교회 새신자가 있는데 자신이 투시의 은사를 받아서 사람들을 보면 속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일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그래서 교회가 떠들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분별을 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섭다는 것이다. 분별을 하기로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딱 보고 목사님은 무슨생각을 하고 막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엉터리 같다.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은 안 무섭고, 내 속을 들여다 본다는 사람은 무섭고 이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집열쇠를 제가 다 가지고 있어서, 다들 여기에 계시고 제가 잠깐 갔다 온다고 생각을 하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데 미리 심방할거라도 이야기를 하면 그랬다면 아무리 아침에 바빠도 정리할것 정리하지 않겠는가?
누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하니깐 정리를 하지 않는가?
내가 마음을 열겠다고 하니깐 내 마음을 이렇게 두면 안되겠다 그러는 것이다.
이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남편 마음 아내마음, 부모마음, 집사마음,목사 마음으로 주님 뜻대로 살 수 없다.
주님 마음으로 살아야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다.
그러려면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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