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10 겨울 수련회 3일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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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분주하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옆에 있기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을 잊고 일에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모든 수고와 몸부림을 그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성실은 늘 시선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단 하나님의 칭찬이면 충분해야 합니다.
사람의 칭찬과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에 집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마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 할 수 밖에 없는 자리가 목회자의 자리 일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설교를 하고 찬양을 하고나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찬양 하는데 예수님이 덩실덩실 춤추시는 이미지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다는 것과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군대 차량을 보면 ‘저 차가 과연 굴러가기는 할까?’ 걱정될 정도인데 잘 움직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차량부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이유는 매일 기름 치고 닦고 조이기 때문입니다.
군대 막사도 창고 수준입니다. 물론 지금은 좋지만 그러나 사람이 매일 자고 살고 청소하며 지내니 훌륭한 숙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빈집으로 내버려두면 금방 흉가가 됩니다.
어떤 집이든지 사람이 항상 살아야 최상의 상태가 유지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항상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안에 계시면 우리를 변화 시키십니다.
우리의 삶이 정돈되고 아릅답고 빛이 납니다. 우리가 죄와 싸울 때에도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도인의 종교가 아니다. 개신교는 성자 개념이 없다. 카톨릭에서는 성자 개념이 있다. 그래서 아주 성자같은 분이 있고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이해하는데
어느순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은 특별한 분이고 대부분의 신앙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니깐 실제로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것이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주님과 친밀하게 만들어주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는가?
예배당 기도실에서 만나는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다. 이미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셨다.
고린도 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자니라”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내가 그 안에 그나 내안에 있는것”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다.
마음이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면, 더이상 내가 예수님을 찾아서 마음의 방황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마음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오늘 주일 예배에 올 때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거나 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신경쓰고 온다. 얼굴이나 옷에 신경을 쓴다.
집에서 외출을 할 때 신경을 안쓸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외모를 신경쓰는 것 만큼, 우리의 마음도 신경썼는가?
성경을 읽어보면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우리는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다.
전혀 관리 안한다. 미움, 절망, 시기, 음란한 생각, 욕심, 자살하고 싶은 마음…. 이루 말 할 수 가 없다.
마음은 이렇게 엉망인데 거울보고 외모만 괜찮으면 그냥 나온다. 예배하러도 나온다.
착하게 생긴것과 착한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요한복음 13:2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귀가 생각을 넣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어뚱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생각에 왜 그럴까?
우리는 그럴때마다 대적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에 견고함이 생긴다.
부부사이에도 말 못하는 부모자녀사이에도 말 못하는 그런 생각이 있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이게 왜 이렇게 된것인지.
우리는 우리 마음이 중요한지 잘 모른다. 하지만 마귀는 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는 굉장히 경건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42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사도행전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4절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마귀가 주는 생각을 마음에 품어버리는 것이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 품는 것이다.
그렇게 내 마음을 지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 우리의 마음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13:3–9 (NKRV)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18–23 (NKRV)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길가와 같은 밭 - 마귀가 왕노릇 하고 있기에 말씀을 듣지도 않는다. 말씀들으러 오지도 않고 들어도 금방 나간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두가지경우를 말씀하셨는데
그중의 하나는 돌밭, 그리고 가시덩굴 같은 밭 이다.
돌밭은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고난을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가시덩굴은 말씀대로 살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질까봐 염려에 가득한 사람이다.
이런 두가지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이경우에는 은혜는 받는데 말씀의 역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정말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가 생기면 빨리 해결해야 한다.
이것보다 더 큰 걱정이 어디있겠는가? 두려움과 염려가 있으면 어떤 말씀을 들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두려움과 염려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려움과 염려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어떻게 보면 큰 문제가 아닌것 같다. 살인죄도 아니고 강도죄도 아니고 음란죄도 아니니 이것이 두려움과 염려가 있는게 무슨 큰 죄인가?
아니다. 이 컵에 담긴 물을 마신다고 하면 그리고 내려놓으면 이게 큰 문제는 안된다. 그런데 강의하는 내내 이렇게 들고 있는다고 하면 여러분이 힘들것이다.
이렇게 물을 계속 들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팔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하루종일 컵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저녁이면 어깨에 큰 무리가 올 것이다.
이 작은 컵하나 하루동안 들고다니는 것도 이정도로 몸에 무리가 가고 어렵다면,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를 한달 두달 을 품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것 절대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 품고 사니 우리가 못 견디는 것이다.
예수님 바라보자 항상 주님 생각하자 그것이 무슨 큰일인가 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계속 내 마음에 주님을 생각하면서 한달을 살고 반년을 살고 1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인생이 안바뀌겠는가?
우리에게 세상이 뒤바뀌는 큰 체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체험 때문에 오히려 망가진 사람이 많다. (금가루 목사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복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항상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내 삶속에 어려움이 생길지라도 늘 나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완벽한 은혜인 것이다.
우리는 음식 까다롭게 먹는다. 국에 바퀴벌레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바퀴벌레를 들어서 국물 하나라도 다 털어서 바퀴벌레만 빼고 국을 맛있게 먹습니까?
그런 사람 한명도 없다. 바퀴벌레가 들어가 있는 국통 전체를 버리지 않겠는가?
집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겠는가? 우리가 집에 갔는데 모르는 사람이 신발은 벗지도 않고 안방에 떡하니 담배를 피고 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인데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녕하세요~! 담배 피고 계시네요! 라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음식보다 집보다 비교할 수도 없는 우리 마음에 온갖 쓰레기 같은거 다 들어와있고 혹여나 몸에 아무거나 다 받아들리고 아무거다 다 품는다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다 품는다면 몸은 못 견딜 것이다.
진짜 무서운것이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아있는데도 그것을 내 쫓을 생각을 안한다. 그냥 괴롭기만하다. 그러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 했다는 것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에 누가 들어왔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가?
결혼할때 그 자매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루종일 그 자매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애를 낳고 보니 애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러니 매순간순간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맞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늘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가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가 하는 일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얼마나 밝을까?
지금 이곳이 등으로 환하다. 그런데 손바닥으로 눈만 가려보면 깜깜해진다.
우리 마음의 심령의 상태이다. 마귀가 우리 마음만 혼미하게 해버리면,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알고 살 수 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 마음안에 분별을 잘 해야 한다. 마귀에 의해서 눈이 가려진 것은 아닌가?
마귀의 목적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나머지는 다해도 된다.
목회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설교를 하면서도 찬양인도를 하면서도 예배드리는 내내 입으로는 주님을 전하면서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을 다해 목회를 한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마귀는 쨈의 명수다)
주님과 함께 하는것에 눈이 안떠진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귀의 목적은 주님만 보지 못하게 하는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매일 지킬 수 있는가?
어느 목사님이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 교회 새신자가 있는데 자신이 투시의 은사를 받아서 사람들을 보면 속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일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그래서 교회가 떠들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분별을 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섭다는 것이다. 분별을 하기로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딱 보고 목사님은 무슨생각을 하고 막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엉터리 같다.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은 안 무섭고, 내 속을 들여다 본다는 사람은 무섭고 이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집열쇠를 제가 다 가지고 있어서, 다들 여기에 계시고 제가 잠깐 갔다 온다고 생각을 하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데 미리 심방할거라도 이야기를 하면 그랬다면 아무리 아침에 바빠도 정리할것 정리하지 않겠는가?
누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하니깐 정리를 하지 않는가?
내가 마음을 열겠다고 하니깐 내 마음을 이렇게 두면 안되겠다 그러는 것이다.
이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남편 마음 아내마음, 부모마음, 집사마음,목사 마음으로 주님 뜻대로 살 수 없다.
주님 마음으로 살아야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다.
그러려면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09과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
우리는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못할까?
그 이유는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기에 이 문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여야 해결이 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는 질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질그릇같은 존재라는 것이 받아들일 수 만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제 저녁에 사워하고 주무시고 오늘 아침 세수하고 오셨을 텐데 좌절감을 느끼셨는가?
왜 나는 또 씻어야돼? 여자 청년 머리
어제도 씻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매일 씻어야해? 이런 좌절감 없이 샤워하고 또 세수하고 왔다.
그 이유는 우리는 매일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몸은 계속 더러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으니깐 그것가지고 좌절감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질그릇같은 것을 본인이 안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자기 기대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질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기에 문제는 우리 자신이 질그릇 같은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고린도 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정말 보배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믿어지면 내가 질그릇인것은 간증거리가 된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배이신 예수님이 더 들어나니 내가 질그릇같은 것이 더 기쁘다.
집에 보석이나 패물같은것 가지고 계시는가? 보석은 보석답게 보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희안하게도 보배이신 예수님을 질그릇같은 우리안에 두셨다. 이건 기절할만큼 놀랄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안믿으니 문제다.
예수전도단 성령사역자인 ‘짐 다니엘’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10대 때 성령체험을 하고 은사 사역자로 10대때 사역을 했다.
신학교 다니며 사역을 하니 몸이 감당이 안되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몸이 아픈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다.
“하나님이 왜 나의 건강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나는 이렇게 주의 일을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답답한 심령으로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전혀 모르는 자매가 짐 다니엘을 찾아 왔다. 그 자매가 말 하길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가서 말을 전해주래 하면서 왔다.
그 자매가 성경을 읽어 주었다.
골로새서 1: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짐 네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래 그것으로 충분한거야 이 말하래
얼마나 쌩뚱 맞는것인가? 모르는 자매가 와서 하는이야기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서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했더니 “내가 네 안에 있어”라는 강한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또 질문한다. “제 안에 계시다면 왜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나요? 제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내 일을 하느라 애를 쓰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너 자신이야”
“그래도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못해도 돼. 다 내가 하는거야. 너는 그냥 너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이렇게 주님과의 대화가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에 대해서 너무나 답답한 것이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때 깨달아졌다. 내가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구나?! 그래서 그가 병상에 누운채로 찬양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가 이렇게 썼다.
몸은 비록 쇠약해져 있지만 나는 예수님을 경배하였다.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외롭지도, 또한 공허하지도 않음을 깨달았다. 몇일 동안 나는 주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내 위로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먼 곳에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좋은 느낌이었다. 나는 격려를 받고, 용납 받았으며, 사랑받았다. 그분은 내 영을 소생시키시고, 내 구원의 기쁨을 새롭게 하셨다.
짐 다니엘이 자신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신것을 확신하는 시간이었다.
짐 다니엘만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모두가 그런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복음의 비밀이다. 우리가 다 소유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어.
질그릇같은 나만 보고 살아 나만 탓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번은 유기성 목사님 페이스북에 설교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올린 사람이 있었다.
여러사람이 설교가 너무 좋다고 들어보라고 했는데 진짜 정말 못듣겠더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말을 느리게 하느냐? 요즘에는 그렇게 설교를 하면 안된다. 요즘엔 얼마나 템포가 빠르고 카리스마있어야 한다고
그분 말로는 끝까지 들어보려고 애를썼는데 그런데 한편을 끝까지 못듣겠다는 것이다.
그 글밑에 다른 사람들이 댓글들을 달았는데 비교적 목사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다른 설교도 한번 들어보라고도 하고 자기는 좋았다고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느리면 1.5배속으로 들어보라고 하고
사실 기분 좋을리는 없지만 이미 유목사님은 신학교 1학년때 하나님께서 설교 못한다는 깨달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유목사님이 부산 출신이라 사투리가 있다. 사람 앞에 부끄러워하고 어떻게 매주 다른 설교를 할까?가 걱정이었다.
신학교 1학년때 어린이 대상 설교를 해야 하는데 설교를 시작했는데 서울학생이 다 뒤집어진것이다.
한마디 하면 어린이들이 따라하고 따라해서 설교가 도저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부산사투리를 고쳤다. 밤마다 음악방송 들으면서 1년만에 고쳤다. 말이 느린 이유는 부산사투리를 안쓰려고 생각하고 말하고를 반복하다보니 이렇게 말을 느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는 것을 보고 충천도 사람 아니냐고도 한다.
그때 말투는 고쳤는데 마음에 열등감이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라는 것이 속에 세겨져 있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성도가 빙긋이 웃으면 내가 또 잘 못했는가 보구나….생각이 든다.
이건 설교자로써 심각한 문제다.
어느 집회때 여러분이 인도를 하는 집회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앞에 목사님 설교가 죽쑤기를.
그 때 하나님께서 큐티를 통해 말씀해주셨다.
고린도전서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정말 진리라고 믿어지는가?
정말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어지면 우리 자녀가 학교에서 꼴등을 하면 정말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택한 아이다. 멸시받는 사람을 택한다 그랬다.
반대로 1등을 하면 너무 좌절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아이는 버리셨나요?” 금식기도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지 않지 않는가?
말씀은 그렇게 읽지만 실제로 믿기로는 하나님은 실력있는자를 크게 쓰시고 뛰어난자를 크게 쓰신다. 고 생각하진 않는가?
큐티가 적용이 되지 않아 넘어가지지가 않아서 3일동안 고민하다. 이건 믿어지고 안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 믿겠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안고 꼬꾸라져 울었다. 왜 이렇게 우나 할정도로 울었는데 그때 어깨에 멍에같은 것이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열등감의 멍애다.
한국사회는 경쟁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열등감이 생기는 것이다.
목사가되어도 열등감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유명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
마음의 정리가 되니깐 그 다음부터는 설교하기가 편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다음부터 설교를 해달라고 하는곳이 많다.
그 다음페이스북에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
저는 목사님이 천천히 말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는 브라질에서 한국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주님이 목사님의 설교는 다 이해할 수 가 있습니다.
얼마전에 설교를 비판했던 그 분이 글을 남겼는데 “처음에는 설교가 느리다고 생각했느데, 지금 보니 차분하신 순전한 설교시더군요. 성실급한 제가 미흡한 죄입니다. 사과를 드립니다.”
약한것이 아무문제가 안된다. 우리가 질그릇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보배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못 보는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간 끊임없이 자신의 약함만을 보고 좌절하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르게 자라는가?
심리학자가 말하길. 어려서부터 감탄을 먹으며 자라서 그런다.
자기 아이 얼굴을 보며 얼마나 흐믓해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다 그렇게 자랐다.
근데 문제는 이런 감탄을 너무 일찍 끝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온전히 사람답게 자라지 못한다고 심리학자가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남편에게 감탄하셨나요?” 감탄할께 있어야 감탄을 하지…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그분이 티비출연을 해보니 자신은 자격이 없는데 강의를 잘 할 수 없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담당 PD가 교수님은 잘 하실 것이다. 자기가 다 준비해놨다는 것이다.
방송에 나가보니 알바 아줌마들이 십여명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사람들 반응이 얼마나 뜨거운지 웃기도 하고 박수도 하고 그래서 그게 왠일인가? 해서 봤더니 뒤에서 PD 가 손짓하면 박수치고 웃고 하는 것이다. 완전 PD보고 하는지 알겠는데도 반응이 나오니깐 강의가 더 잘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감탄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이런 강의이다.
우리는 억지로 감탄할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로 감탄할 것 천지이다.
남편을 보고 감탄 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남편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 감탄 안 할 수가 없다. 이건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남편을 보며서 매일 기적을 보는 것이다. 어떻게 당신 안에 주님이 계속 계시냐? 볼때마다 기적이다.
아내를 봐도 애들을 봐도 교인들을 봐도 누구를 봐도 감탄하며 살아가는게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 눈이 뜨이면 우리들의 삶이 놀랍게 된 것이다.
연태 - 나뭇가지 할렐루야 -
어느 목사님이 결혼할때 결심한 것이 자기는 아내 눈에 눈물흘리지 않게 하겠다.
어머님은 늘 우는게 일이기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근데 그것이 결심한대로 안된다. 그래서 사모님이 우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싸우고 나서 목사님이 잘 못한것 같아서 마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 아내가 차갑게 외면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당신사과 이제는 받아줄수 없다. 난 이제 더이상 받아줄수 없다”
목사님이 자신이 문제가 있었으니 할 말도 없고 해서 기도하다가 생각나는게 있어서 설겆이 하는 아내 옆에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 하나님 믿소?” 짜증이 확난다. 잘못했다고 빌어도 받아줄까 말까인데. 지금 설교하는거야 뭐야?!?!
그러고 목사님이 이야기 한다. “나를 보면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시겠소? 나를 보고는 용서못해도 하나님 보고 용서해주시구요”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눈이 뜨이지 않으면 사람을 보는 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내 남편, 아내, 아이를 변하시키실 분이 주님이시고 교인 변화시키실 분이 주님이신데, 그런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질그릇같은 우리들의 모습만 보고 서로 소망 다 잊어버린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열등감에 쌓여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믿음으로 반응 하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내가 먼저 살것같고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동행일기를 쓰라는 것은, 목사가 여러분의 삶을 대신 해줄 수 없다. 설교는 할 수 있지만 정말 여러분의 삶을 살아줄 수 없기에 이렇게 동행일기를 써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인 해야 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것은 올인 해야 한다.
유진피터슨 [일상의 부활을 산다]
마귀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과는 바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평신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신도 이것은 비전문가야 라는 사상이 깔려 있는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목회자정도 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나는 평신도인데…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의 문제까지도 전문가에게 맡기려 한다는 점에서 마귀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술을 많이 마시고 방탕하고 온갖 죄를 짓고 음란하게 살게 함으로 우리 영혼을 파괴하려는 복잡한 계략을 짜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는 죄책감에 눌려 지내다가 갑작스로운 회개로 주님께로 극적으로 돌이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그저 “너는 평신도야”라는 생각을 슬쩍 마음속에 밀어 넣습니다. 너는 목사가 아니잖아, 선교사도 아니잖아. 그러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주님과 직접 동행하려 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예수님과 친밀한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모든 성도에게 다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미숙하고 어색해도 주님과 동행해본적이 없기에 그런것이기에 결론적으로 일기를 쓰라는 것이다.
우리가 양치질 배울때 기억나는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런데 지금은 양치질 하는데 전혀 그런 마음은 없다.
예수 동행일기를 쓰게 하는 힘은 주님이 나와 동행해주실 것이라고 믿으니 때로는 안될 때도 있고 좌절도 되지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동행일기를 쓰다가 하루 이틀 빠지면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
주님이 너무 기뻐서 웃으실 것이다.
우리의 자녀가 걸음마 할 때 뭐 붙잡고 일어서다가 넘어지면 부모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넌 기는게 났다. 넌 자세가 안나온다. 너 진짜 실망했다. 어떻게 그렇게 못 걷니? 넌 그냥 기어만 다녀라” 라고 할 사람은 한명도 없다.
쓰러지고 넘어진 아이를 보고 실망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지말라고 달래기는 하지만, 어른들은 다 웃는다.
“애 이제 걷기 시작했다. 걸음마 하는 것 좀 봐”
우리가 그렇게 한다. 예수 동행일기를 쓰다가 하루 이틀 못쓰고 있으면 우리 주님이 똑같이 하신다.
주님은 그린다. 우리가 아이들이 걸음마를 할 때 우리는 이미 뛸 게 될 것을 그린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보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살아갈 그 날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주님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 너는 쓰지 마라, 너도 썼다고 하니 내가 다 창피하다” 이렇게 하실 주님이 아니시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큼 넘어져서 우리가 걷게 되는지 아는가? 3천번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이다.
3천번 넘어지고 일어나 걸은 사람이 무슨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가?
주님이 다 아신다.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할 확신은 “주님이 다 이루실 것이다”라는 확신이다.
전부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다.
미국 영성일기 세미나 후 어느 사모의 영성일기
마지막 세미나가 끝난 후 주님께 기도할 때, 오래 고민해 오던 옛 습관에서 놓여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어제가 광복절임이 기억났습니다. 오늘이 옛 것에서 놓여난 나의 독립기념일인 거 같아서 만세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 만세!’
우리가 할 일은 매일 만세를 부르는 것 밖에 없다.
주님과 동행 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
조급해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주님이 하게 하실 것이다.
미국 기독 출판계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10살될 때까지 바다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10살때 캘리포니아 삼촌네 가서 바다를 처음보고 놀랐다. 그러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계속 파도가 밀려오나?
삼촌이 “맥서 너 아니? 어제 밤새도록 파도가 이렇게 밀려왔다”
“삼촌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랬더니 “너 아니? 천년 전부터 이렇게 파도가 쳐 왔다!”
이 아이는 상상이 안되는 것이다. 어떻게 천년동안 하루도 한시도 빠짐없이 이렇게 파도가 몰려 올 수 있을까?
그랬던 삼촌이 또 이렇게 말한다. “너 아니?! 천년 뒤에도 파도가 이렇게 온다.”
그러고 나서 바다에 들어갔더니 다리에 있던 모래가 다 쓸려 내려갔다. 또또또
그러면서 설교중에 교인들을 이렇게 바라보았다.
성도들이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는가?
삼촌이 했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천번도 넘게 은혜의 파도로 우리의 죄를 씻기시는것”
교인들이 전율을 한다.
그러면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오늘 저 또…. 이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가 와서 씻겨 우리의 죄가 씻겨내려간다.
아니 하나님 도저히 저는…. 천번도 더 넘게 고백하면 있는 그자리에서 은혜의 파도가 우리의 죄를 씻겨내려간다.
은혜는 설명이 되면 더이상 은혜가 아니고 이해가 되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설명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동행이 있으니 우리가 동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좌절도 있고 힘들겠지만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미 우리 안에계신다.”
우리가 예수 동행일기를 잘쓰고 나서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안에 오셨으니 우리안에서 주님이 동행일기를 쓰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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