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모지상주의, 하나님은 마음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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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거룩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가? 보통은 나만 바라봐주는 다정하고 섬세하면서 센스있고 듬직하고 공부도 잘하는 잘생긴 남자인가? 그러나 남자들은 공통적인 이상형이 있다. 어떤 여자인가? 예쁜 여자를 아주 좋아한다. 각자마다 취향이 있겠지만,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자매들은 보통 외모를 안보고 내면적인 것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배우 이나영씨는 잘생긴 남자를 안좋아한다고 말하셨다. 그러나 지금 남편은 원빈이다. 배우 손예진씨도 외모는 정말 안본다고 했으나, 남편이 현빈이다. 배우 고소영씨도 쌍커풀이 있는 남자, 예쁘게 생긴 남자가 싫다고 했지만, 장동건과 결혼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많은 여성들의 이상형이 너드남이었다. 쉽게 말해서 소위 찐따남이라고 불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너드남들에게 희소식이 들리는가 싶었다. 너드남이란, 공부를 잘하는 범생이 혹은 공부벌레, 특정 분야에 몰두해 있는 덕후처럼 어느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빠져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이 바람도 안피우고, 한 여자만 바라봐줄 것 같아서 인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너드남 앞에 수식어가 있다. 바로 “잘생긴” 너드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외모가 어떤가에 따라서 선입견을 가지며 바라보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옆에 사람과 이렇게 축복하기 원한다. 예쁜게 죄라면 당신은 무기징역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지난 주와 동일하게 “베드로서”이다. 베드로서의 특징은 유언이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당시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쓰기 20여년 전에 네로 황제가 로마를 다스리던 시대였다. 로마의 대화제가 일어났을 때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이 벌인 짓이라며 오명을 씌어서 핍박을 했던 황제였다. 그러나 네로와 그의 친구인 티겔리누스의 재산과 집은 멀쩡했다. 네로가 얼마나 심각한 박해를 했는가 하면, 자신의 정원의 불을 밝히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산 채로 횃불로 만들어 불태웠다고 한다. 또 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야생 동물의 먹이로 주는 잔혹한 핍박을 일삼아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죽임을 당하게 된 시대가 우리가 읽은 베드로서가 쓰여졌던 시대이다. 그렇게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고난을 위로함과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불 같은 핍박을 잘 견디도록 교회를 향한 여러 가지 소망의 말로 격려하고 있는 편지이다. 그렇게 오늘 읽었던 본분의 핵심은 ‘거룩’이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성품 중에서 우리와 공유하고 싶은 성품이 있으시다. 거룩의 뜻이 무엇인가? “구별하다, 구분하다”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제사장이나 제물을 다른 것과 분리, 구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엄청나게 높으신 분에게 허접하고 품질 낮은거 드리지 않는 것처럼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장 품질이 좋은 것, 깨끗한 것을 드리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다. 그러면서 후대로 갈수록 점점 거룩의 의미가 정의, 자비, 겸손과 같은 윤리적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약에서는 거룩이라는 의미가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가 된다. 거룩이라는 단어가 구원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거룩이란, 죄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구분되는 삶이 ‘거룩’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시다. 죄가 없으실 뿐더러 죄와 함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렇게 죄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렇다. 말씀에서 모든 행실에, 모든 행동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죄의 뜻은 무엇인가? 죄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화살이 과녁에 들어가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을 죄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그렇다면 거룩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거룩이고 구원이다. 우리가 태평양과 같은 바다에 빠졌다면, 어디로 들어가야 살 수 있는가? 그렇다. 배에 올라타야 살 수 있다. 그러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배에 오를 수 있는가? 그저 바다에 떠내려갈 뿐이다. 누군가가 구조해서 건져올리지 않으면 올라오지 못한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건져내셔야 구원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죽어서 가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우리를 구원을 누리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죄로부터 구원이다. 칼빈 선생님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셨다. “인간은 죄를 찍어내는 공장과 같다”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있었다. 하나님을 선택할 자유와 죄를 지을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을 것을 선택한 이유로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죄 짓는 자유 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죄로부터 자유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거저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의 특징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의 기준, 살아가는 이유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두 번째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가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아무리 똑똑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우주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랑하면 더 알아가고 싶어진다. 학교 공부도 억지로 공부하라고 하면 그것만큼 지옥인 것이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수학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면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것처럼 힘들더라도 사랑하면 공부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도 베드로를 통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왜 거룩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다. 모세가 썼던 구약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야하고, 신구약성경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한다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근거를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백성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였다면 신약에 들어서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발전되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엄청난 절대적인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특징이 부모님을 곧잘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이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어떤 유치원생이 욕을 심각하게 하는 것을 보고 “너 말을 왜 그렇게 하니?”라고 물어보니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하는 말인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자녀들은 부모를 쉽게 따라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통제하기 위해서 거룩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죄와 끊어진 삶,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있어야 안전하고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기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가 힘든 이유는 다른게 없다. 내 안에 죄 때문에 마음 속에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의 거룩은 징벌과 징계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신다. 그래서 거룩하다는 것은 질투, 크고 두려운 것, 영광스럽고 높이 들린 것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마치 멋진 몸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헬스트레이너 선생님이 계시는데, 다이어트를 하고자 하는 회원이 치킨을 먹고오면 더 빡세게 운동을 시켜서 몸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이 행동한대로 보응을 받는 것이다. 만약 트레이너 선생님의 말대로 깨끗한 음식과 좋은 습관을 들이고 살았더라면 운동을 더 빡세게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은 우리 안에 죄를 죽이시는 영이시다. 외모를 보시지 않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심판과 보응을 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이란 마지막 최후에 구원을 받냐 못 받냐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모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 베드로가 말하는 심판이란 하나님의 훈육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혹독한 트레이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누구를 닮게 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치킨 앞에서 헬스 트레이너 선생님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씀에 불순종 앞에서 내가 주인되려는 삶에서 인생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떠올리며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한다. 나그네는 자유롭지만 자유에 따른 책임과 대가가 있는 것처럼, 죄에서 자유롭게 된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여기서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여 나라가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그 이미지가 딱 떠오르게 된다.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니, 이것만큼 쓸모없는게 어딨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성경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돈으로 도저히 값아낼 수 없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은 매일 매일 가치가 바뀐다. 주식을 할 때 가치가 매일 좋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매일마다 가치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떠올릴 때 모세를 통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는 것을 경험하고, 끝내 탈출하지 못할 것 같았던 강대국이었던 문명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바로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 어린양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로 연결지어서 생각하면 유대인들은 소름이 돋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 거룩하게 삽시다. 일단 거룩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 거룩해질 수 없다. 이 말은 즉 왕의 자녀로 인정된 사람이 왕의 자녀로 살 때 그 모습이 인정되는 것이지, 일반 서민이 왕의 모습으로 산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왕의 자녀, 빛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한계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하루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함을 꾸준히 하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가심을 경험하게 된다. 거룩이란 영역의 개념이다.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따로 드리는 것은 거룩의 삶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나온 헌금 또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이기에 하나님께 준비하여 드린 헌금은 거룩한 모습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하나님께 시간을 드려 구별하여 드린 것이기에 거룩한 삶이다. 수련회나 겨울 캠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온전히 24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교제하는 시간이기에 거룩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마음과 물질이 점점 커질수록 죄가 하나도 없는 거룩하신 주님이 여러분의삶을 온전히 다스리시고 도우시는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 줄 믿는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쉬워진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닮아 주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은 마치 남들이 볼 수 없는 문제의 힌트를 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생은 너무나 재밌고 매일이 기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은 절대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도사님은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거룩이 나를 살린다. 거룩이 나를 지킨다. 거룩이 나를 보호한다. 보는 것이 거룩하자. 생각하는 것도 거룩하자. 거룩이 나를 성장시킨다. 거룩이 나를 완전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