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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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2)
룻기 1장 1-14절
우리는 지난주에 룻기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에 일어난 한 집안의 이야기를 기록한 룻기는 그 집안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그러한 내용들에 대해서 차근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라고 시대적 배경을 밝힌 후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베들레헴에 사는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고 그의 아내는 나오미 그의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여기에서 알려주는 인물들의 이름과 지명의 이름이 알려주는 의미가 존재합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에는 왕이 없어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러한 중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정말 필요한 신앙고백을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기쁨, 희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에는 논쟁이 있기 때문에 설명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베들레헴 에브랏이라고 부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떡집”이라는 말입니다. 에브랏은“열매를 맺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베들레헴 에브랏이라고 부르면, 열매를 맺는 떡집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사는 지역은 참으로 풍요로운 곳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흉년이 약 10년 동안 지속된 것을 보면 이 흉년이 자연적인 흉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28장 20-24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고 불순종을 하였을 때, 이스라엘이 받을 저주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이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고, 그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엘리멜렉 곧,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극심한 흉년의 상황도 나의 왕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그분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이 마음을 돌이켜서 해야 할 행동을 역대하 7장 13-1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역대하의 말씀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시니 그 앞에 엎드려 인애 곧, 사랑을 베푸시기를 간절히 바라라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그 땅에 흉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전혀 그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그 흉년을 피해서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압은 적국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모압왕인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고, 결국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음행의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있기에 이스라엘과 모압은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흉년이 들자, 그 흉년을 피해서 모압으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물론 1절 마지막에 거류하기 위해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머물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찾아왔을 때, 지금 누리는 부유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약의 땅을 떠나 우상의 땅인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어떠한 말로도 하나님 앞에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우리의 신앙에 어떠한 문제가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가 무엇이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신앙의 눈으로 지금의 문제를 보기보다는 육신의 눈으로 판단했습니다. 흉년이 왔을 때, 왕이신 하나님께 눈을 향했어야 했는데, 모압을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엘리멜렉은 그저 이름만 그럴싸한 신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문제와 계속 반복되는 실수를 보게 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두 아들은 흉년 앞에서 우선 살고 보자는 자세로 약속의 땅을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문제가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주님의 명령과 우리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찾기보다는 우선 살고 보자는 식으로 타협하고,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가 되더라도 일단 내가 살고 보자는 식으로 그러한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려는 태도가 우리들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이름뿐인 신자인 것처럼, 우리들도 어떠한 위험과 고난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로 한 채 일단 문제를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행동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한 태도를 가졌다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여서 투옥당하고, 고문당하면서 신앙을 지켰던 주기철, 손양원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일단 살고 보자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생각이 앞섰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면, 예수님에게서도 이 부분의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에 사단이 찾아와서 시험을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시험한 것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필요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예수님께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돌이 떡덩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일단 살고 보자는 식이었다면, 굶주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질서가 어떠하든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능력을 행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육신적인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러한 태도가 바로 시험을 직면했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엘리멜렉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게다가 잠시 거류하기 위해서 갔던 모압에서 10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 사이에 엘리멜렉은 죽게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의 여인들에게 장가보냅니다.
이 부분에서도 불신앙적인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사실 모압에서 이스라엘까지는 그리 먼 곳이 아닙니다.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오미는 두 아들을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부인이 될 여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합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오미나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기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은 불신앙에 기초한 행동들이고, 그 결과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은 모압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자녀도 없이 죽게 됩니다. 풍요를 누리려고 모압으로 이주했는데, 기근과 가난을 피해서 도망쳤는데, 그곳에서는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주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고난이 찾아온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사망이 찾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품에서 겪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 밖에 고난을 겪는다면 누가 우리를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에서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을 마주한다면 주님의 품으로 도망가십시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은 것처럼 육신의 사망도 있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영원한 사망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신자는 고난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앞을 떠나는 미련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흉년과 언약을 버리고 떠난 가정의 이야기로 출발을 해서 곧 사망이라는 암울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돌보았다는 말은 “파카드”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방문하다”, “관심을 보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의 징계를 받은 백성을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10년간 계속되어서 마치 영원한 죽음으로 방치된 듯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히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식이 모압 지방에 있는 나오미에게도 들립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7절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돌아오다는 단어는 종종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단어는 회개라는 용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남편의 사후에, 두 아들을 모압 여인에게 장가를 보내는 잘못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10년간 죄악에 빠졌던 나오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범죄의 자리를 떠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오미의 처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의 처지에서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압 지방에서 사는 것이나, 이스라엘에서 사는 것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모압에서 힘겹게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어쩌면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들으면서 사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을 회개와 관련된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나오미가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신앙으로 돌이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엘리멜렉을 따라서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모압에 도착해서 정착하며 지낼만큼 돈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오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인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생각해 내고 실천에 옮긴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압에서 풍요롭게 잘 지내다가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했던 엘리멜렉의 판단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철저히 무너집니다. 남편과 두 아들까지 죽음으로 떨어지게 된 나오미가 절망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베들레헴에 은혜 베푸심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다시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룻기 초반부를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의 과정을 일부분 엿보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잘 나가고, 나름대로 훌륭한 판단과 결단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리심 앞에 우리의 연약함은 분명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빈털터리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택함을 받은 신자는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나오미가 돌이켜 돌아온 것처럼,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처럼 이름뿐인 신자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이름만 신자이고, 이름만 교회인 것은 정말 저주스러운 일입니다. 끔찍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나오미를 다시 돌이켜 베들레헴으로 오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고 이끄신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큰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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