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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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설교 후에 이런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설교가 힘들다.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는 본문과 오늘의 현실이 겹치는 지점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을 거라 예상을 합니다. 또한 성경의 말씀이 굳이 오늘의 현실과 연결시키는 것이 설교자의의도로 너무 힘이 들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한 주의 피곤한 삶이 교회라는 곳에서 위로 받고 평안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예배를 참석하는데 느닷없는 질책과 같은 말씀이 마음에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공의로움심을 들어야 할까요? 그리고 예배는 정말로 우리의 평안을 추구하는 곳일까요? 아마도 그건 아니지만 힘든건 맞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부모 세대를 꼰대 세대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 조차 아이들에게 이건 잘못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육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이야기해야 할 타임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설교 조차도 성도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오해하지 않고 ‘어떤 사실’을 전하고 싶다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요구하는 것이 일종의 가벼운 예의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말조차도 또 혼나는 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 젊은 목사는 교인들에게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소요리 문답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장로가 4주즘 되어 몇 번을 들은 건데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에 결국 설교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는데 저는 한 주만에 설교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꽤 기억에 남을만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마침 미가서를 중심한 12선지서는 그렇게 시작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시작을 합니다.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1장에서 살펴 보았듯 성전에서 말씀이 나오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별도의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으려는 우리부터 시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과는 어디일가요? 이미 경험을 했습니다. 교회에 가도 힘을 얻지 못하고 얕고 감정을 즐겁게 해주는 위안의 말들을 좋아하는 세계관에 나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3:1–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대함 같이’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1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연약하기에 ‘어린아이처럼’ 대해 준다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감정을 어루만져주고 시쳇말로 우쭈쭈해주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년 반 동안을 요한복음을 들었고 신앙의 기본이 어떠한지를 경험했다면 도전해보아야 합니다. 시작 후 한 두어달이 힘든 것입니다. 힘들다면 미가서를 포기해야 하고 미가서를 포기하면 구약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수요일에 전해 드리는 ‘시편 한장’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매운 맛을 경험하면 우유처럼 달달한 것이 필요하듯 시편의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것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가족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가족의 아픔을 겪었고 이를 지혜롭게 잘 보냈습니다. 어느 광고 카피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가족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지만 앞으로 나이든 우리 가족에게는 더 흔하게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연로해지는 부모님 그리고 나 자신과 성장하는 아이들의 밝지만은 않은 미래가 그것입니다. 굳이 오늘의 한국 현실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그만큼 잠재된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피한다고 피해지면 굳이 우리가 왜 종교가 필요하고 신앙이 필요할가요?
막상 내가 그런 일이 닥친다면 과연 정신차리고 살 수 있을가요? 지금이야 아닌 것처럼 말할 수는 있어도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붙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붙들려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지금 그나마 들을 수 있을 때 기분은 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를 붙잡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예언’은 마치 은행의 ‘예금’처럼 선지자에게 말씀을 맡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면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에 노출 될지라도 생명보다 앞서신 하나님을 의지할 힘을 얻게 됩니다.
수요일에 전달 드린 63편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이야기 한 기도자는 시편 63:4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다윗은 왕국에서 가장 좋을 때 고백한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내몰리고 쫓겨날 때 여전히 원수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 가운데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위해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셨습니다. 남 유다를 향해서 너 봤지 북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하다가 망했는지? 이제 너도 그렇게 될 거야’라고 경고했다면 경고를 받은 남 유다는 어찌해야 할가요? 굳이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는 어찌해야 할가요?’라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달리던 차가 갑자기 정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어보나마나 잘 잡고 있더라도 몸은 관성에 의해 앞으로 튕겨 나갈 것이고 잘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넘어지고 말것입니다.
이렇게 하던 힘의 반대로 작용되는 것을 ‘관성’이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힘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력 아시죠? 전자기력? 자기장 같은 힘이죠. 그래서 과학적으로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라고 정의를 한 것입니다. 그럼 관성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느끼는 힘 때문에 그렇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튕겨나가니 실제한다고 말하고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그렇습니다. 움직이는 힘이 어떤 의도된 힘에 의해 정지되었을 때 계속해서 움직이고자 하는 힘에 의해 대상인 나 또는 대상물이 관성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해 중력에 의해 태양을 향해 끌려가지만 반대적으로 거대하지만 둥근 태양에 의해 궤도를 그리는 모양을 갖추듯 이는 달도 마찬가지이자 태양 역시 우리 은하 중심을 여전히 돌고 있는 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아담이래 하나님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없는 힘, 존재하지 않는 힘의 실제를 느끼며 있다고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는 ‘아니라’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아니요 있어요’라고 말하면 있는 것으로 믿어 버리는 범죄한 자아가 끈임없이 충돌하는 현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힘들게 했습니다. 너무나 쉬운 예를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도 그랬지만 난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는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면 아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모의 품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흔한 쇼츠의 영상에 아기들은 물 속에서 눈을 뜨고 입과 코를 막고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으로 수영아닌 수영을 하는 모습을 자주 시청하지 않습니까? 어느 수영 교사가 생존 수영을 위해 초등학생들을 인솔하면 수영장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몇몇 학생은 식은 땀을 흘리며 물에 대해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것이 유아 풀처럼 낮은대도 말입니다.
범죄자들이 경찰을 보고 두려운 것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오히려 일반인들조차도 경찰서에서는 주눅이 들고 경찰이 찾아온다면 그야 말로 기겁을 하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해 검찰에서,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는 보이스 피싱이야말로 가장 잘 먹히는 단골 소재이니 말입니다. 반면 범죄자들은 어떻습니까? 아니 범을 좀 안다는 청소년은 자신의 범죄에도 나이가 안되면 처벌되지 않는다고 경찰을 놀리는 형태나 법 위에서 군림하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2장 말씀 역시 계속해서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라고 미가는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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