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선한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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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양을 실제로 본 적 있나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의 이미지는 이렇죠
하얗고 귀엽고 뽀송뽀송하고
그런데 사실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뜬금없이
최진규 전도사의 동물 다큐멘터리 시간을
가져보고자합니다.
전도사님이 안 그렇게 생겼어도
동물을 되게 좋아합니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동물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양입니다.
영어성경을 기준으로 거의
500번 이상 양이 언급됩니다.
다른 동물들은 많아야 100번?
130번 정도? 언급되는 수준인데
양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500번 이상 언급이 될 정도로
성경과 친한 동물입니다.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중요하게 다룬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양의 실체에 대해서
한 번 파헤쳐보려고 합니다.
필립켈러라는 기독교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직 목축업자로써
기독교 관련 서적을 많이 남겼어요.
그 중에서 대표작이
‘목자의 마음으로 본 시편 23편’
‘양과 목자’가 있습니다.
필립켈러라는 사람이
진짜로 양을 길러보고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시선으로
성경책을 읽은 다음에 받았던
은혜에 대해서 써내려간 책이에요.
그 책에서 양의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양의 첫 번째 특징은
눈이 굉장히 나쁘다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시력이 1.5, 1.2에요.
원래는 2.0 1.5였는데
스마트폰하고 컴퓨터를 하도 봐서 그런지
조금 떨어졌어요.
그런데
하늘을 나는 매가 시력이
무려 9.0정도 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 얹어서
타조는 시력이 25래요.
이게 어느정도냐면 40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개미의 모습이 보이는 정도에요.
그런데 양은 시력이 -10이랍니다.
시력이 -10이면,
안경에 김이 서린채로
세상을 보는 거랑 똑같아요.
이런 느낌이에요 (사진)
뭐가 뚜렷하게 보이는게 없어서
시력이 있으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죠.
이게 양이 가진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양의 특징은
고집이 참 쎄다는 것입니다.
필립켈러라는 작가의 저서
‘양과 목자’를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양은 습관을 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일 양을 내버려 둔다면 도랑이 파이도록 계속해서 같은 길로만 다닐 것이고, 황폐해질 때까지 같은 언덕에서만 풀을 뜯을 것이며, 질병과 기생충으로 들끓게 될 때까지 땅을 더럽힐 것이다. … 그리고 결국 양들은 야위고 쇠약해지고 병들어 가면서 땅도 주인도 다 망하게 된다.  – 91~93쪽
고집이 워낙 쎄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경험해본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는 것이 양입니다.
자기 고집으로
자기를 망치는 존재라는 점이
양의 두 번째 특징이에요.
세 번째 양의 특징은
참 연약하다는 겁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더러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평생 자기 털도 관리 못하고
살아가는게 양입니다.
이렇게 말이에요.
이 양이 5년만에 발견된 양인가
6년만에 발견된 양인가 기억은 안 나는데
털을 깎고나니까
털 무게만 35킬로그램이었데요.
근데 35킬로그램을
짊어지고 다니면
근성장에 개이득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하체근육에는
엄청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농담입니다.
이 양은 털이 무거운 것도 문제인데
거기에 적응하며 견뎌낼
하체 근육도 딱히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고,
뼈가 다 불균형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털 사이사이에 기생충과
양의 소변, 대변, 나뭇가지,
온갖 쓰레기가 잔뜩했다고 해요.
마치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존재처럼
연약하기 그지 없는 양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그냥 그냥 살아가는게 존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특징처럼
양은 눈이 더럽게 나쁩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시야도 좁아요.
고집은 또 더럽게 쎈데 멍청하고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기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채
미련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양은 깨끗하고 순결하고
귀염귀염하다고 생각했는데,
참 미련하고 부족한 동물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이 가진 부족함과 연약함이
여기 서 있는 저와 꼭 닮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이
이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았습니다.
전도사님은 시야가 좁아서
이 세상은 전도사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어려서부터 친구들이 잘 따라줬고,
어딜가든 제가 하자는대로
친구들이 따라왔어서 그런지
세상이 전도사님 것인 줄 알았어요.
시야가 굉장히 좁았죠.
세상은 넓고 뛰어난 사람은 많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채 제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으니까요
이런 좁은 시야로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묘사한 글이 있어요.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인생이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우쭐대고 걸으며 투덜거리지만 곧바로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 바보 천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아서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지”
- 셰익스피어, ‘맥베스’ 중
무대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우쭐대고 걸으며 투덜거리는데,
실상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건지,
무엇이 바른 것인지 그른 것인지
구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보 천치였던 거죠.
인생이 언제나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전도사님의 인생이었습니다.
뭘 다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미련덩어리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그 다음 양의 두 번째 특징이
고집스럽다는거였죠?
고집스럽다는건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에요.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옳은 것을 좋아해야하는데,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이 좋아하는게
옳은 것이고 바른 것이었어요.
이건 전도사님이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중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옳은 것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삶이 되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살아도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고집스럽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해요.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과거랑 다를 바 없이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가는
제 모습은 양과 똑 닮아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양이 가진 양의 특징을 통해
전도사님의 삶을 돌아보니,
전도사님이
양하고 다를 것 없이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고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새롭게 보이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목자였어요.
이런 보잘것없는 양과 같은 동물을
사랑으로 캐어하고 지키는 존재가
목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잘것 없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의 삶의 길을
선한 길로,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John 10:11 NKSV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목자도 그냥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시고,
그 미련맞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데요.
그리고 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를 바라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그 사랑을 몸소 나타내셨어요.
전도사님이 한때
되게 열심히 찾아봤던
짤이 있습니다.
짤들의 제목은
‘초등학생 시험답안 레전드’였어요.
선생님들이 낸 문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을 했는데,
이상하게 설득력있고
창의적이고 재치있게 들렸던거죠.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가지 짤을 보다가
전도사님을 깊은 은혜의 바다에
푹 담궈버리는 한 답안이 있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답안을 딱 보는 순간
여러 가지 수많은 생각이
전도사님의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쳤어요.
왜 사랑하실까?
전도사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누군가 전도사님한테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물어보면 늘 일관되게 대답합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아들은 글러먹었다.
딸이 맞다.”
사실 아들이라 글러먹은게 아니라
그냥 제가 글러먹은 사람일 수도…
있죠 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그런 글러먹은
저의 인생의 시간을
끝까지 품에 안아주신
부모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이 질문이
더욱 더 깊이
제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막되어먹은 나를
뭐가 좋다고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나한테서 얻는 이득이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해를 봤으면 봤지
이득은 없는거에요.
쳐먹기도 엄청 많이 쳐먹지
뻑하면 사고쳐서 학교에서 전화오지.
집에서 말을 잘 듣나? 그건 또 아니지.
시간도 들여야해 돈도 들여야해
정신노동도 해야해
여러모로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나인데 왜 사랑하실까?
답이 결국 이거였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Numbers 27:16–17 NKSV
“모든 사람에게 영을 주시는 주 하나님, 이 회중 위에 한 사람을 임명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백성 앞에서 나가기도 하고, 백성 앞에서 들어오기도 할 것입니다. 백성을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데리고 들어오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이게 청소년들에게 와닿는 무언가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이런 미련한 우리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다른 것 없다.
Ecclesiastes 5:20 NKSV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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