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Show me your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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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모돼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새하얗게 됐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다 초막 셋을 만들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서론:
2025년 온누리교회 표어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다.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시카고온누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영광의 주님 뵈옵기를 갈망하는가?
주 얼굴 볼때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더 갈망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그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그분의 영광의 본체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던, 제자들은 어찌나 그 경험이 강렬했는지
베드로와 요한은 베드로후서 1 장과 요한복음 1 장에 각각 기록되고 있다.
예배는 바로 그 영광의 주님을 보는 것이다.
그 영광의 주님을 볼때까지 갈망을 멈추지 말라.
결코 만족하지 말라.
1)주님의 영광보기를 갈망하라
그리고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오직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변화산이 어느 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과 가까운 헐몬산(헤르몬산)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산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암시성이다.
구약성경에서 산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를 주시는 장소였다.
특히 본문의 등장인물들(모세와 엘리야)을 고려할때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일을 떠 올릴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이 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목적이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술한다(눅 9 : 28)
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특별히 이들 세명은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르셨고 항상 가까이 데리고 다니셨던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분명 12명의 제자들을 콜링하셨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 3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누리지 못한 특권들을 누린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특권,
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다시 살리시는 그 기적의 현장에 수제자들만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주께서 잡히시기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할때에도 수제자 3명만을 데리고 가셨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그 중에 특별히 12제자들을 콜링하셨고,
그 중에서도 3명의 수제자들은 더 큰 주님의 영광과 일하심을 본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어떤 제자들이었는가?
바로 ‘갈망’ 하던 자들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고자 했던 갈망이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열정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주를 향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처럼 인류 최초로 물위를 걷는 경험을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영광 중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요청한다.
동기가 어찌되었든간에 남다른 갈망이 있던 제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자들은 갈망함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주님의 놀라운 영광과 역사하심을 보게된다.
신앙은 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종교생활만 할 수도 있다. 형식적인 믿음생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갈망’이다.
예수님은 갈망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리고 갈망하는 자들을 가까이 하신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갈망해야 한다. 그 영광의 주님 보기를 갈망하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때, 주님의 임재 안에 설때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 열정, 비전등이 타오르게 된다.
갈망은 갈망을 낳는다.
갈망할수록 더 주님을 갈망하게 된다.
그분을 향한 목마름은 더욱 깊어진다.
“주님 이전보다 더 큰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시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갈망하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나는 시카고에서 이런 예배를 꿈꾼다.
갈망하는 예배자들이 모여 그 갈망이 함께 더해져 용광로처럼 뜨겁게 드려지는 예배말이다.
그러한 25년이 되기를 바란다.
2)그분의 영광을 본 자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2-3절을 함께 읽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모돼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새하얗게 됐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에서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를 체험했던 인물들이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예언)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즉, 구원사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이제는 이들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무대의 중심에 남으셔야 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어야 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사를 완성하실 것임을 뜻한다.
할렐루야?
그렇다. 예수그리스도 바로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다.
그분은 거짓 선지자가 아니며, 자칭 메시야가 아니며, ‘진리 그 자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우리가 맛 본 복음은 무엇인가?
신화인가? 이론인가? 지식인가?
아니면 ‘참 진리’인가? 그렇다면 멈출 수 없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사그러져 간다면, 주님의 영광을 구하라.
주님의 영광을 맛볼때 흔들리지 않는다.
제자들은 그분의 영광을 맛보았다.
어떻게? ‘갈망함’으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경험한 제자들은, 멈추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때까지 끝까지 달려간다.
베드로와 요한은 후에 이 경험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분이 오실 것에 대해 여러분에게 알게 한 것은 교묘히 꾸며 낸 신화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크신 위엄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큰 영광 가운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기뻐한다”라는 음성이 자기에게 들릴 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직접 그 영광을 보았다는 것이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 영광을 직접 경험하는 세대가 되기를 바란다.
욥의 고백처럼 ’귀로만’ 전해듣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진리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눈’으로 보는 세대가 되기를 바란다.
사도요한의 증거를 보자.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니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증언한다.
우리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보니 ‘이것은 참 진리다’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은혜’가 충만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의 그 영광..
우리가 드리는 시카고온누리교회 예배 가운데 가득하길 기도한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예배하는 자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한다.
뿐만 아니라 매순간 드리는 삶의 예배속에서도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길 원한다 할렐루야!.
그분의 영광을 본 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왜? 바로 그분이 진리시기 때에,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기 때문에
3)그분의 영광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한다.
이제 사명을 완수하는 자리로 나아가라
4-5절을 함께 읽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다 초막 셋을 만들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는 지금 그가 경험하고 있는 주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완전히 도취되어버렸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지어서, 여기에서 계속 머무르자고 이야기한다.
베드로의 이러한 소원은 그가 경험한 천국의 임재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반영한다.
한편 병행하는 마가복음에서는 그가 몹시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서 무슨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영광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경외(존경과 두려움)하는 마음과 동시에 천국과 같은 기쁨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5절을 보니 이 때 빛난 구름이 와서 이들을 덮었다.
이것은 출애굽기 40 장에서 구름이 모세의 성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졌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때 들려진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 첨가되어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속에서 다시 한번 분명한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확증해주시는 장면이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때론 청년의 때에 헷갈릴때도 있다.
‘내가 너무 교회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가 진짜 맞나?’
우리가 왜 주님의 영광 보기를 갈망해야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5절)
예수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분의 영광을 본 자들은 헷갈리지 않는다. 끝까지 달려간다.
예배는 바로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고백하며,
그분께 합당한 경배와 예배,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 예수님에 대한 앎은 우리자신에 대한 앎과도 연결되어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자는 자신이 또한 누구인지도 안다.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앎은 곧 나에 대한 정체성이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새생명을 주셨다.
이것을 아는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 반석되신 예수그리스도 위에 서길 바란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자는 그분께 최고의 가치를 드리며 예배한다.
예배는 관람하는 것이 아니다.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받기 합당한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자리다.
예배에서 무언가를 받는다고만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보다 우선적인 것은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최고의 가치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온 맘다해, 온 힘다해, 온 정성다해 그분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럴때 우리를 붙잡고 있던 문제들로부터도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볼때, 그 영광을 바라볼때 어둠의 결박이 풀어지며, 달려갈 새 힘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수동적인 관람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옆사람의 눈치를 볼 것도 없다.
다윗은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돌아올때,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췄다.
그때에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을 보고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앞에서만 예배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할렐루야!
예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다윗처럼 주님을 갈망하며, 그분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이 받기 합당한 예배와 경배를 드리는 것.
바로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끝까지 달려간다. 헷갈리지 않는다. 할렐루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전심으로 예배했다면, 이제 사명을 완수하는 자리로 나아가라.
베드로는 그 영광의 임재의 자리가 좋아서 초막 셋을 짓고 계속 있기를 원했다(4절).
그러나 우리가 변화산에서 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각자의 자리로 주님께서 부르심은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로 부르심은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증언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신 자리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다.
선교란 무엇인가?
한 학자분의 정의를 들었는데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선교란..
예배하지 않는 땅에 예배가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분의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영광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기쁨을..
우리만 누릴 수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를 위해 살 길을 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보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그분의 영광을 맛보았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대위임령의 미션을 감당하기 위해 나아가자
찬양: 주님의 임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