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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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마음속에 가두어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마음의 지배를 받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긴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접했을지라도 삶을 통해 그 말씀이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아직까지 마음속에 새겨진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란 삶에 대한 말씀의 적용이요, 말씀에 의한 바른 선택을 의미합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끊임없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인간인가, 진정한 신앙인인가 아닌가가 분별됩니다. 바른 선택은 언제나 말씀의 적용으로만 가능합니다. 말씀의 적용이 배제될 때 인간의 선택이란 언제나, 자신의 추한 감정과 이기심 그리고 욕망의 굴레를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마음속에 가두어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마음의 지배를 받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긴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접했을지라도 삶을 통해 그 말씀이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아직까지 마음속에 새겨진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란 삶에 대한 말씀의 적용이요, 말씀에 의한 바른 선택을 의미합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끊임없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인간인가, 진정한 신앙인인가 아닌가가 분별됩니다. 바른 선택은 언제나 말씀의 적용으로만 가능합니다. 말씀의 적용이 배제될 때 인간의 선택이란 언제나, 자신의 추한 감정과 이기심 그리고 욕망의 굴레를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과 더불어 - 두 번째 산책 (1. 친히 주신 것이 아니요 -종교개혁주일 (요한복음 4:1~2))
크리스천은 학습을 거쳐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그저 외적 형식을 위한 통과절차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영적 예식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2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건넜던 홍해 사건에 비유하여 세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입니다. 마음이 돌변한 이집트의 바로 왕이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그 무서운 이집트의 전차부대가 쫓아옵니다. 독 안에 든 쥐, 이스라엘 백성은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뒤 홍해가 원래대로 다시 합쳐졌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집트로 되돌아갈 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옛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좇아 주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바른 진리의 길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것이 참된 세례의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출애굽 1세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건넜던 홍해가 다시 합쳐져 이집트로 되돌아갈 지리적 길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이집트로 향한 대로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도외시했고, 당연한 결과로 진리의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자기 욕망에 집착했던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세례’라는 엄청난 은총을 얻고서도 단지 그것을 외적 자랑거리고 삼았을 뿐, 하나님 말씀의 적용과 바른 선택을 위한 영적 세례가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갔습니다. 물론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등장 이후, 세례 요한을 에워쌌던 인파가 이번에는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받겠다며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음은 이미 요한복음 3장 26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2)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받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정작 세례를 베푼 이는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통해서만 세례를 베풀었을 뿐 직접 세례를 주신 일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시다가 오늘 본문에서부터 제자들을 내세워 세례를 주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등 중요한 논제가 아닙니다. 언제부터 주님께서 세례를 주지 않으셨느냐가 아니라 왜 주님께서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몰려갔던 그들이 누구인지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몰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의 니고데모처럼, 단지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몰려든 자들이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분, 사람이라면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표적을 행하시는 분, 그분이 베푸시는 세례가 세례 요한의 세례보다 훨씬 멋지고 아름답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례를 외적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누구에게 세례 받았는지를 더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친히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의 능력은 집례자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며, 세례의 목적은 외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의 말씀에 의한 바른 적용과 선택에 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000년 전 사마리아 땅 수가라는 이름의 성에 대단히 논리적이면서 오만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낮, 물을 길러 우물에 나갔다가 마침 그 동네를 지나시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 우물곁에서 잠시 쉬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긷는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이거늘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인 내게 물을 구하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깊은 지역감정의 골이 패어 있어 서로 상종치도 않았고,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에 아예 발을 들여 넣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탁을 더욱 오만하게 잘라 버린 이유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생수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오만한 여인이여, 그대가 오만한 자리를 벗어나 내게 구하면 내가 그대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수인 성령으로 채워 주리라.―이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에 여인의 오만함은 더 거세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11)
“이 우물은 한없이 깊은데 반해 당신은 두레박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생수를 주겠다니, 대체 어떻게 이 생수를 퍼 올린다는 말입니까?”―참으로 논리 정연한 지적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인은 지금 자신이 물을 긷고 있는 우물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물려준 것임을 과시하면서, 주님과 야곱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주님을 공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불행히도 이 여인은 자신의 상식과 이성만을 신봉하는 자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도, 깨달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만의 결과로 이 여인의 관심은 오직 육체가 마시는 우물물에 묶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성령님과 함께하는 자는 결코 그 영혼이 갈한 법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 영혼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시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얼핏 보면 여인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백 퍼센트 수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의 반어법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한 번 먹고 평생 목마르지 않을 물이 어디 있담? 그런 물이 있다면 어디 한번 보여 주기나 하시지!―이런 의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요, 모독이었습니다. 자신의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님께서 그 여인과 함께 계셔도 그 여인에게 주님은 주님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느닷없어 보이는 주님의 명령에 여인은 자기에게는 남편이 없노라고 잡아떼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하~18)
오만하기 짝이 없던 그녀는 실은 비참하고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결혼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지만,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모두 죽은 것인지, 아니면 여인의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다섯 남편으로부터 차례대로 버림받은 것인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여인과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녀는 가정을 가진 남자의 정부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라고 해서 어찌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았겠습니까? 새 남편을 만날 때마다 이번만은, 이번만은 행복하리라고 입술을 깨물며 왜 결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정을 가진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겨우 생존해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숨기고 싶은 과거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왜 이 여인의 아픈 과거와 수치스런 현실을 이렇듯 공개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인을 놀리기 위함입니까? 여인의 오만한 비아냥거림에 보복하기 위해서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을 사랑하신 까닭에, 그녀가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깨닫도록 도와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여인이여! 그대가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일평생 노력한 결과가 무엇인가? 행복을 움켜쥐려 그토록 몸부림친 대가는 과연 무엇인가? 밤낮 열망하던 행복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다섯 명의 남편이 차례로 그대 곁을 떠날 때 남편을 위해, 아니 그대 자신을 위해 그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았는가? 사실이 이처럼 명확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까지 그대 자신을 신봉하려는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그 여인은 더 이상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백 퍼센트 동의, 굴복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넝마조각 같은 자신의 인생, 더러운 걸레조각처럼 악취를 풍기는 자기 영혼의 실상을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계속하여 말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
자기 자신에게 믿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즉시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형편없는 자신의 실상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를 향한 믿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여인 앞에 서 계시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26)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삶은 전혀 새로워졌습니다. 그녀의 삶엔 기쁨과 평강 그리고 새 생명이 차고 넘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비천한 이 여인으로 인해 그녀가 살던 수가 성이 송두리째 새로워졌음을 39절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비천하고 처참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했을 때, 주님께서 생수와 같은 성령님을 그녀의 심령 속에 부어 주시매 그녀가 성령님의 도구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바르게 응답함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했던 여인은 가장 고귀한 성령님의 사람이 되어 새 생명의 삶을 마음껏 누렸던 것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님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우리의 실상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이 여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인간 스스로는 참된 행복도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은 이 여인보다 낫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을 업신여기면서 자기는 작은 물방울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큰 물방울이든 작은 물방울이든 순식간에 사라지는 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듯, 능력이 크든 작든 간에 자신을 신봉하는 자의 종착역은 허망한 공동묘지 이외일 수 없다는 면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요한과 더불어 - 두 번째 산책 (2. 내가 그로라 (요한복음 4:3~19, 25~26))
성령님께서 지금 충만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을 우리 마음속으로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저처럼 미련한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수가 성의 여인처럼 지혜로운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성령님께서 곁에 계시는 것만을 만족하며 36년을 허비하는 자가 되시겠습니까, 성령님을 마음속에 당장 모시어 그분의 지배 아래에서 새 생명의 삶을 구가한 수가 성 여인이 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아내가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남편이 거듭나기를 간구합니다. 여러분의 영향을 받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진리를 호흡하고 진리를 누리는 진리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사회가 바로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탓에 이 나라에 거룩하고 진실된 크리스천들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를 신봉하는 오만한 자리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요망합니다. 헛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자신을 의탁키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사랑 앞에 온전히 굴복하십시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어, 진리 안에서 여러분의 생을 전혀 새롭게 빚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 곧 하나님의 영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 이 시간 나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갈가리 찢어진 나의 인생, 넝마조각 같은 내 영혼의 실체를 확인했사오니, 나 자신을 신봉하던 오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낮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해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는 겸손한 크리스천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지혜로운 수가 성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나의 주인 되셔서 내 삶을 친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 안에서 새로워진 나의 삶이, 내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사회를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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