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논쟁-부활은 새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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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12:18-27(신약 76쪽)
설교제목 : 부활논쟁-부활은 새로운 삶입니다.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요. 사두개인에 관해 이해해야합니다. 그래야 왜 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부활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요. 이를 통해 성경이 부활이 관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두개인은 철수, 영희와 같은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종교인, 의료인, 법조인과 같은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두개인이라는 말은 다윗 왕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사두개인은 사독의 후손 또는 사독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의 사람들인데요. 이들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보다 정확하게는 이스라엘이 식민지배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서 왕조를 세웠던 하스몬 왕조 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집단을 일컫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모세 오경 외에는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바리새인과 달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모세 오경에서는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다가 설명하겠지만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 말씀 속에 나타나는데요. 더욱이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린 성경을 해석하려하지 않았고 기록된 문자 그대로를 믿고 따랐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이들이 초기 하스몬 왕가와 결탁하여 정치적인 세력을 이뤄왔기 때문에요. 훗날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을 때에도 로마의 권력자들과 정치적으로 결탁을 했던 집단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었고요. 내세에 관한 관심은 없고 현세에 출세를 지향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고요.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와 논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등장과 예루살렘 성전을 뒤흔든 사건으로 사두개인들의 텃밭인 예루살렘 성전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관해 논쟁을 하는 까닭은 정말 부활에 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제 나눴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 예수님을 넘어트리기 위해 관심도 없는 부활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이런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죠. 예수님 당시에 ‘형사취수제’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이는 형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경우에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여 자손을 남기도록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런 제도를 토대로 사두개인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일곱 형제가 있는데, 첫째 형이 죽어서 형수가 둘째와 결혼을 했는데 또 둘째가 죽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 일곱째가지 죽었을 때, 부활의 때에 그 사람은 누구의 아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이를 통해 사두개인이 하고 싶은 말은 부활이 이처럼 말이 안되는 얘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시는데요. 24~ 25절을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2:24-25(신약 76쪽)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26~27절을 읽습니다.
마가복음 12:26-27(신약 76쪽)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모세오경 중에서 출애굽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부활을 말하고 있음을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겁니다. 만약 사두개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은 왜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모세에게 소개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영영 사라져 버린 존재를 구지 거론하실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활할 것임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모세오경을 통해서도 부활의 이야기가 증거되고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이를 통해 예수님은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을 증거하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궁금증은 과연 부활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어떤 분이 이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하시더라고요. 혹시 대추야자라는 과일을 드셔보셨나요? 이름을 들어보면, 대추 같은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는 대추와 모양은 비슷해도 맛은 딴 판이에요. 제가 예전에 중동지역으로 선교를 갔던 청년에게서 선물을 받아서 먹어봤는데요. 마치 대추모양의 열매를 꿀에 푹 재워둔 것 같이 단맛이 강한 과일이에요. 이것을 드셔보신 분은 이것이 어떤 맛인지를 아실텐데 그렇지 못한 분은 이것을 전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대추는 다들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모양은 대추같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요. 꿀도 잘 아시잖아요. 맛은 꿀과 같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죠.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부활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서만 부활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식의 설명만 가능하다는 거예요. 우선 부활은 시체가 다시 살아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의 경우로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 부활은 죽지 않고 영원히 장수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아요. 이처럼 현재 우리의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부활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부활의 때에 너희가 장가도 시지도 아니가고 천사와 같다’라고 말이지요.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 부활은 다르다는 거예요. 오히려 그것은 천사와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큰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죠. 천사는 하나님 가까이 있는 존재잖아요. 다시 말해서 부활은 하나님을 가까서 경험하는 상태라는 것이죠.
또 부활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어요. 헬라어로는 ‘아나스타시아’인데요. 이는 부활이라는 뜻과 더불어서 ‘일으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일으킨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부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요. 현세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한 차원이고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다른 한 차원이에요. 결국 부활은 현재에 경험되든 죽음 이후에 경험되든 새로운 삶에 관계되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천사와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고백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몸이 다시 사는 것 곧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에 따른 삶은 어떠할까요? 사도행전 2장 45절 이하에는 최초의 교회 공동체 또는 신앙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해요. 만약 부활이 없다면, 한 번뿐인 이 세상의 삶에서 나의 것을 나누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거나 어리석은 짓일지 몰라요. 나혼자 즐기기에도 짧고 부족한 한평생을 왜 누군가 나눠야 하나요? 내게 주어진 것을 아낌없이 펑펑쓰다가 완전한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이기적으로만 살아야할텐데요. 그러기에도 모자란 시간일텐데요. 그런데 부활을 믿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했던 신앙인들의 삶은 나누고 베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나아갔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계신가요? 오늘 성경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현세의 삶을 즐기기에 또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열심을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신앙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바라건대, 저는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렇게 부활을 믿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삶을 이루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