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가 되십시오.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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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9:33-37(신약 70쪽)
설교제목: 꼴찌가 되십시오.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합니다.’
# 축복후
📷
이 사진은 2014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에 있는 제일초등학교의 가을운동회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그 당시에 이 사진이 여러 언론사에서 주목을 받았는데요.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처음 이 사진은 “초등학생한테도 배울 것이 있더군요”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상에 올라왔습니다. 사진을 올린 글쓴이는 사진에 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6학년 5명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맨 오른쪽 아이는 항상 꼴찌만 하는 아이였다. 또래 애들보다 작고 뚱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머지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다가 30m 정도 앞서 가더니 멈춰서 꼴찌로 달려오던 친구의 손을 잡고 같이 뛰었다. 6년 동안 항상 꼴찌를 하던 그 친구를 위해 나머지 4명이 미리 계획한 것이었다. 오른쪽 꼬마는 고마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결승선까지 다 같이 들어와 모두가 1등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야기가 온라인 상에 퍼지면서 여러 언론사에서 이를 관심하게 됩니다. 이 사진과 글이 화제가 되자 이 사진 속 꼬마의 큰 누나는 인터넷 상에 동생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동생은 ‘연골무형성증’을 앓는 지체장애 6급이다. 쉽게 말하면 키가 작은 사람이다. 매년 동생에게 상처가 되는 날이 생긴다. 특히 달리기가 그랬다. 한 번은 운동회 당일 아침에 가기 싫다고 하는데 그게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지난해 가을운동회에는 담임선생님이 혼자 남아 달리고 있는 동생과 함께 같이 뛰어줘 저희 가족은 울음바다가 됐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김대열씨는 뉴스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5학년 때는 아들 기국이가 달리기를 안하면 안 되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지금부터 포기하는 것을 배우면 나중에 사춘기도 겪고 할 텐데 그런 것들을 이겨낼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국이에게 포기하는 것보다 열심히 달려서 지는 게 낫다는 얘기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4명의 아이가 달리기하다가 기국이를 기다리고 있어서 많이 놀랐다.’라고 했습니다.
또 기국이 담임선생님이 인터뷰에서 4명의 친구들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왜 그렇게 감동을 받고 그러는지 의야하다’고요. ‘그냥 친구와 함께 했던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라고요. 이 이야기는 ‘꼴지없는 운동회’라는 제목으로 회자가 되었고요. 이 소식을 접한 이들은 ‘훈훈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운동회다, 눈물 나게 고마운 사진’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경쟁이 난무하고 1등이 강요되는 세상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먼저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대견스럽다는 것이었고요. 반대로 어른들이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경쟁을 심화시킨 사회로 만들어 놓은 것에 반성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끝으로 1등도 없고 꼴지도 없는 세상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세상이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쟁과 서열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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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독문학과 김누리 교수님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이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세미나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우리 아이들이 학창시절을 전쟁터로 기억하고 있고 우리 교육이 승자와 패자로 나눠 전교 1등 승자에겐 오만함과 미성숙함이 형성되고 패자에게는 열등감과 모멸감, 패배감과 무력감, 좌절감과 절망감을 내면화하고 있다’고요. 쉽게 말해서 한국의 교육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경쟁하도록 부추겨온 교육의 결과가 미성숙한 인간을 길러냈다는 겁니다.
한 예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에서 1000명당 의사 수가 2.6명에 불과한데요. 이는 OECD 최하위에 속합니다. 그런데 의사를 조금 늘려하니 ‘전교 1등이 아닌 실력 없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으냐’고 협박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미성숙한 엘리트들이 특권의식과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요. 사람들 위에 함부로 군림하는 나라라는 것이죠. 이러한 사람들을 키워온 것이 우리 사회의 경쟁교육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최근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이라는 반민주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의 행태를 보았습니다. 그는 서울대 출신에 검찰총장을 지냈고 대통령이 된 이른바 엘리트입니다. 그런 그가 국민정서와는 동떨어진 판단과 행보를 보이는 것은요. 아마도 김누리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교육에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비단 이번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에게서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공부를 잘했고 그 결과로 사회 지도층의 자리에 꿰차고 있는 이들의 민낯이 이와 같다면요. 과연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면서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경쟁교육을 탈피해야 함을 얘기합니다. 1970년 독일은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사상이 교육 개혁의 모토가 되어서 54년 동안 경쟁교육을 탈피하였습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 학살과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20세기 최악의 범죄국 독일이 21세기 최고의 모범국가가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경쟁교육을 탈피함을 통해 더 성숙한 인간을 길러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김누리 교수님은 자신이 독일 유학을 하면서 느꼈던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만난 독일 사람은 열등감 없었다고 해요. 이른바 사무실에서 일하는 화이트 칼라이든지 현장에서 일하는 블루 칼라이든지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반대로 열등감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열등감이 더 높지요. 그래서 한국인은 늘 자기 위에 누가 있고 자기 밑에 누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요. 이는 어릴 때부터 경쟁 교육을 통한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독일인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데요. 그 이유는 경쟁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등수, 석차 이런 걸 매기지 않으니까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차이를 배우지 우열관계를 배우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결과로 이기적이고 오만한 엘리트들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을 키워내게 되었다고 해요.
저는 이러한 생각이 오늘 성경 이야기가 주는 교훈과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져요. 마가복음 9장 35절을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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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35(신약 70쪽)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는데요. 저는 그것을 오늘 설교제목인 ‘꼴지가 되십시오’라는 것으로 표현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9장 30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8장 31절 이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황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긴가민가 했을 겁니다. 그런데 또 다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에 그들이 보인 반응은 서열 다툼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음에 관해 얘기를 하셨는데, 제자들은 누가 높은지를 놓고 다투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예수님이 정말로 돌아가시면 이 조직을 어떻게 해야하냐는 고민이 생겨났을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생업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겠죠.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 예수님 부재시에 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논쟁이라는 다툼으로 번진 것을 보면 각자가 자신의 우위를 주장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음을 아시고 이에 관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가 되려면 끝 곧 꼴찌가 되라고 말입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이 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1등이 되고자 경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오히려 꼴찌가 되어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또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경쟁이 아니라 섬김 또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 독보적인 1등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더욱이 가장 낮아져서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죠.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계급이 나눠지고 줄 세우기 하는 세상에서는 차별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요. 예수님은 그 차별을 없애시고 사랑으로 모두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경쟁과 서열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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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람보쌤으로 알려진 이보람 강사님이란 분입니다. 이른바 일타강사로 이름을 날리는 분인데요. 이 분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변화된 삶을 살게 된 얘기를 들었습니다.
초창기에 재개발 지역에서 강사로 활동했던 때가 있었답니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은 그랬답니다. 부모님 때문에 쫓기듯이 학원에 오긴 했는데, 공부할 의욕이 없는 아이들로 수업시간에 누워있고 선생님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더랍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대가 다 있어하면서 하루만에 그만 두려고 했는데요. 이상하게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이 비춰보이더랍니다.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느라 집을 비우고 어른의 자리가 부재가 되어 있어서 외로운 시간을 견뎌냈던 자신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방법입니다. 아이들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여성성을 포기하고 살신성인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갑니다. 춤도 추고 심지어 코딱지도 파고 먹고 방귀도 뀌면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답니다. 그 결과로 아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공부에서는 소외되지 말자’는 진정성이 아이들을 움직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잘 나서 당시 이른바 일찐 중에서도 짱이라는 녀석이 학원에 등록했다고 합니다. 또 그와 같은 열심과 노력에 힘입어서 어느 순간 1타 강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1등이 주는 불안감이 있더랍니다. 2등이 되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더랍니다. 그것이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졌답니다. 그러다가 학원에서 어떤 신실할 강사 분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처음에는 평일에도 교회를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본인도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교회는 주일에만 가면 되는 것이지 평일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나 광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신실한 강사 분이 평소보다 밝은 표정을 하고 나타나서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가 이번에 믿음여행을 했다고요. 내용인 즉슨 이렇습니다. 돈 없이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움직인 여행이었답니다. 평소 같았으면, 미쳤다고 생각했을텐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답니다. 자기는 일타강사로 잘난체하며 살고 있지만, 사실은 매일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데요. 그는 하나님만으로 평안을 이루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자기 삶을 돌이키면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 이런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내려 놓고 인터넷 무료 강의를 시작하라고요. 하나님께서 갑자기 왜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거에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나중에 무료강의를 할 것이라고 했던 장면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더랍니다. 이에 큰 결심을 하고 하던 일을 내려놓았답니다.
그런데 일을 그만두자 마자 놀랍게도 자신에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 오더랍니다. ‘너 죽어!’라는 생각이 계속 자기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답니다. 훗날에 이런 증상이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을 처방받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매일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또 자기가 알아본 바로는 이 병은 완치가 없고 계속 안고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살 자신이 없더랍니다. 삶에 소망도 없고 치료에 대한 방법도 없다고 생각해서요. 기도원에가서 그런 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차마 스스로 죽을 수는 없으니깐 하나님께 내가 평안에 이르도록 나를 죽여 달라고요.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분이지 죽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답니다. 원래 엄마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엄마도 자신과 같은 나이에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받았던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먹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답니다. ‘나를 살려달라고요.’ 그러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성경읽고 기도하고 찬양을 했답니다. 그러다 이 말씀을 마주하고 마음에 새기게 되었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을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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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11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처음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자신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길로 나아왔는데,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것인지하고요. 그리고 이 말씀을 마주하면서 깨닫게 되었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시키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말입니다. 아마 자신이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무료강의를 했더라면, 또 자신의 의에 사로잡혔을 것 같다고요.
그런데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다시 학생들을 만나고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이 일을 감당하게 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데요. 자신이 일타강사라는 성공을 이룬 것은 자신의 열심에 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일을 겪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현재는 어떻게하면 다음 세대를 살릴까를 관심하며 계속해서 강의와 교육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분 얘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먼저는 1등도 괴로움이 있구나하는 것이요. 1등과는 거리가 멀었던 저로써는 1등이 무슨 괴로움이 있을까 했는데요. 1등이라는 자리를 지키는 일이 보통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부름받은 인생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훈련받은 시간이 필요하구나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일사천리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는데요. 내가 충분히 깎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아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게 됨을 깨닫게 돼요.
그러면서 생각하는데요. 꼴찌가 되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겠다는 생각을 해요.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했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내는 일 말이지요.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등이 되려면 꼴찌가 되라고 하셨는지를 이렇게 이해하게 돼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그것을 유지할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삶과 평안이 있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제 얘기를 하나 하고 마치려 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되는 것은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돈을 모으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통장잔고가 바닥이 나는 경험도 해보았고, 1년이 넘도록 200만원을 모으는 것이 힘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제 씀씀이가 헤픈 것인지는 몰라도요. 뒤늦게 안 것이지만 저는 최저임금 이하의 사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사정이 나아졌다곤 해도 미래에 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꼭 부자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가계 곤란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고 목회자로써 감당해야할 삶의 몫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면서 경제적인 문제 따른 삶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살았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러한 현실인식으로 결혼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것 같다는 불운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야 목회를 하고자 목사가 되었고 어려운 상황들 예상하면서 그것을 감수하려고 하지만요. 배우자가 같은 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나는 결혼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의 사건을 통해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제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앞으로는 모르지만 현재까지 아내는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답니다. 저는 부족한 것이 많은 남편이지만 아내는 다행히도 아직까진 저와 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둘째로 담임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경제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일전에 몇 차례 최근 이뤄지고 있는 청년 모임을 소개했습니다. 아시는 바대로 그 모임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한 길을 소개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돈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을 다스릴 신앙에 관한 얘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생소했고, 이것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에 관해 호기심 반 의구심 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임을 거듭할수록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 동안 우리가 돈에 관하여 얼마나 무지하게 살았던 것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앞으로 가난해 질 것이고, 은퇴 후에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닥칠텐데 믿음으로 이겨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과 함께 공부하고 상담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문제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막혀진 생각을 통해서는 당연히 길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왜 그리도 붙들고자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미리 포기하고 겁먹고 했던 것인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담임목사님이 부자되는 법을 알려주거나 돈버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신앙인으로써 돈에 노예가 되어 살지 않는 길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이는 저와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방향을 모른채 인생을 낭비하며 달려가는 열심에서 벗어나 돈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줍니다. 실천적인 방법이 포함되기도 하지만요.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오해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조금더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이전보다 돈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막연히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결국은 가난한 노년을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살아냄을 통해서 조금 더 안전한 미래를 조금 더 자유로운 미래를 꿈꿔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난 이유를 생각해보니까요. 제 안에 있던 생각을 비우게 되면서인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생각에 사로잡히면, 될 것도 안 될 수 있지만요. 나를 비우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안 될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꼴찌가 되라고 명하신 이야기의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경쟁을 피하고 꼴지가 되어야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요. 꼴찌가 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비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자기비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놀라웁게 채우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우리 성도님들께서 비움의 영성을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비울 때,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 생각이 이끄는 방향으로 내 힘과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피폐하게 망가트리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을 담으십시오. 이러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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