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청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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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11:12-26(신약 74쪽)
설교제목: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청결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마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시고 선한 분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사뭇다른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셔서 무화과나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게 앞으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말라죽게 되었습니다. 곁에 이를 지켜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하신다는 것이 평소 알던 예수님의 모습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더욱이 무화과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무화과가 생각을 하지 않지만요. 만약 생각이 있었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사에 사용될 재물을 팔던 사람들과 그것을 사기 위해 환전을 해주는 이들의 상을 뒤엎은 일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신 사건입니다. 아무리 좋게 표현하려고 해도 예수님께 행하신 일을 놓고 좋은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고 난동이라고 일컬을 만한 종류의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일을 벌이셨을까요? 평소에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라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동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 자료를 통해 성경을 연구해 본 것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죽게 된 것은 어떤 상징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서 또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는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자신이 벗을 것을 알고 몸을 가리잖아요. 그때 몸을 가린 잎이 무화과 잎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선악과가 무화과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이는 하나님의 명령 또는 율법 그리고 신앙과 경건함을 상징하는 나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하는 것이 돼요. 다시 말하면,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게 된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벌인 일을 제가 난동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흔히 성전청결 또는 청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또한 상징적인 행위였어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통해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죠. 그래서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을 직접 가지고 오든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든지 해야했어요. 그런데 제물을 집에서 가져오다보면 제물로 드릴 동물이 상할 수 있잖아요. 흠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요. 그러니 보통은 제물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요. 그리고 그것을 사려면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돈을 써야했어요. 그러니 환전상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과 희생제물을 파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었어요. 여기서 제물을 사지 못하면 일단 제사를 못하니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고 상을 뒤엎음을 통해 무화과나무 때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상인들을 내쫓은 일이 단지 교회에서는 기도만 해야지 물건팔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행하신 일이라기보다는요.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을 예고하셨던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믿기로 선하고 좋으신 예수님 또는 하나님께서 심판과 같은 무서운 일을 왜 행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심판만 놓고 보면, 마치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만 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요. 사실 하나님은 심판 자체에 목적을 두시지 않고 심판을 통한 회복에 목적을 두시는 분이세요. 노아 때 홍수 심판 후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심판 이전의 하나님 창조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런데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라고요. 성전의 원래의 기능은 변질되고 무너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전의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이죠. 달리 보면, 이 경고를 잘 받아들였다면, 성전이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심판이 임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심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회복에 있는 거예요.
저는 김소민 자매의 간증을 통해서 세상에 그렇게 끔찍한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이라고 해서 보통 CRPS라고 불리는 병이 있는데요. 흔히 저주받은 질병이라고 불린다고 해요. 왜냐하면, 통증지수라는 것이 있어요. 0부터 10까지로해서 통증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인데요. 보통 출산을 통증지수로는 7정도로 나타낸다고 해요. 그런데 이 CRPS의 통증지수는 9-10정도라고해요. 그러니 가장 심한 통증을 겪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이 얘기를 듣고 이 통증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 자매가 그래요. 씻으려고 물을 몸에 맡으면 물이 몸에 닿을 때 쇠구슬이 떨어지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멀쩡한 피부를 면도날로 상처를 내고 그 쓰라림의 통증으로 물이 몸에 닿는 통증을 조금 잊어보려 했다는 거예요. 눈꺼플을 깜빡이는 것이 고통이고 누워 있는 것 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해요. 울고 싶어도 몸을 들썩이는 충격에 통증이 심해져서 울지도 못한다고 하고요. 그러다보니 처음에 이 병을 진단받았을 때, 의사가 이런 얘기를 했데요. ‘절대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치료를 받으세요.’ 왜냐하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자매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은 다행히도 매우 힘든 수술을 통해 몸이 전보다 좋아졌는데요.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이 고통을 다시 선택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할거라고 해요. 왜냐하면, 통증은 너무 괴롭고 매일 죽고 싶을만 힘들지만요. 이 통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해요.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 원망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떠날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자매가 통증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부여잡게 되었다고 해요.
성경을 읽는 일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경험하게 되었고요. 또 그 과정에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데요. 정말로 하나님을 원망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는데 지나온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있음을 경험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비록 저주받은 질병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에 비견되지 못할 것이라는 거예요.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깨닫게 돼요.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잔인하게 행하신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 자매에게 하나님이 통증을 주신 것은 아니겠지만, 그 자매의 병을 충분히 속히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인데도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또 우리의 삶에서도 그와 같은 고난이 찾아 올 때 하나님을 원망하게 돼죠.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이 그러셔요. ‘고난이 복이된다’고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는데요. 이 자매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저는 오늘 성경 이야기를 통해서도 생각하는데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왜 심판을 하시나 또 그것이 하나님다운 모습인지를 놓고 생각하다가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회복이라는 깨달음을 얻어요. 심판은 회복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고난이 복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시간을 넘어서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어렵게 힘들게 얻은 것들은 소중하게 잘 지키려고 하는데요. 쉽게 얻은 것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우리 성도님들의 삶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 찾아올 수 있고요. 또 지금 그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과정을 통과하여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하세요. 그러니 고난 앞에서 넘어지거나 주저 앉지 마시고 회복에 이르도록 앞을 향해 나아가면 좋겠어요.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이를 놓고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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