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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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10)
부제: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 하나님을 대표하는 성품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회와 성도를 대표하는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그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로 해석해도 됩니다.
실제로 교회의 사랑 없는 모습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고, 교회 밖의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걱정이 되곤 합니다.
사랑으로 인해 교회가 상처를 주거나 혹은 걱정 거리가 되는 것은, 성도가 되었든 비그리스도인이 되었든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교회」하면 떠오르고, 「성도」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랑」인 이유는, 사랑의 실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7a)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하나님 아니시면 하실 수 없는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엄중한 하나님의 공의와 자애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충족하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대신 치루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실 뿐만 아니라, 공의와 대치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은 우리 성도는, 다시는 죄의 저주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공의를 사랑으로 받아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용서는 했으나, 여전히 그 죄에 대한 흔적(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과자라는 「주홍글씨」을 씌워줍니다.
피해자는, 용서는 하였으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영원히 피해자로 살고, 가해자도 용서는 받았으나 「용서 받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영원한 가해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다”(7b)고 말합니다. 하나님로부터 난 자 만이 진짜 사랑을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주 강론「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에서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요 1:13下)라고 했습니다.
「낳다γεννάω겐나오」는, 관계에 관련한 단어로서, 단순한 생산의 의미가 아닌 「~의 아버지가 되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간섭하여, 하나님과 가족 관계가 되는, 하나님이 친히 아빠가 되어 주신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교회가 사랑하면 세상이 교회를 통하여 천국을 봅니다. 성도가 사랑하면 비그리스도인들은 성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봅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을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
「사랑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교회」라는 2025 표어대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참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요한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8上)라고 말한 것을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 사랑을 아십니까?’
‘안다γινώσκω기노스코’는, 아주 실제적이고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데서 오는 지식입니다. 요한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上)는 말씀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친밀히 그리고 전인적으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 햄버거 CF 카피에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고 외치는 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이 카피는, 당시 공중파 방송 정서에는 다소 적절치 않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시청자에게 반말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의 질문도 오래 신앙생활을 한 저나, 이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분들에게 불편한 질문입니다.
‘김병기 목사야! 니가 하나님을 진짜로 알아?’라는 질문은,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제게‘네가 진짜 사랑할 줄 알아?’라고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외침을, 단순한 사랑 예찬 정도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솔직히 오늘 강론 제목을 보자마자 속으로 이러셨죠? ‘그래...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해야 맞지.’
저도, 처음 이 말씀을 펴놓고, ‘나도 알고 성도들이 다 아는 얘기를 저보고 어쩌라고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이 말씀을, 아침에 어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면서 ‘오늘도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 엄마의 일상적인 멘트 같이, 영혼의 울림이 없이 듣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선포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했고, 그 구원의 감격이 지금도 뜨거운지, 그리고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지를 확인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한편으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지금까지 가족 형제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안)한 것을 부끄러워 해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큰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제대로 아내 남편 부모 자녀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7-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전체가 나오도록 한 페이지로, 내리지 말고 그대로 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 8)
본문 7-8절에 아주 심하게 반복해서 강조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머죠?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짧은 두절에‘사랑’이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다섯장 밖에 되지않는 짧은 편지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53회 사용합니다.
그중에「4장」은 31회 사용하기 때문에, 「요한일서 4장」을 「요한의 사랑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세 개입니다. 하나님 차원의 아가페, 그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 모두 「아가페 ἀγάπη」입니다. 아가페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사랑은, 우정을 기본으로 하는 필리아, 연인들이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에로스가 아닙니다.
「아가페 ἀγάπη」는 저와 여러분이,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구제 불능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사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 사랑의 신비는, 도저히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도 계산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런 설명 없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고 선언하십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롬 1:13, 14上)
바울은 하나님이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거절하신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야곱을 아가페하셨다」고만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바울이 그리고 요한이, 하나님 사랑을 아가페라고 말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전적인 하나님 사랑 때문에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낭만적인 감정이나 윤리적인 의지 정도로 취급해서 안 됩니다.
이 시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백이 아니라, 식상한 인사치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부부 간에, 딸이나 아들이 엄마 아빠에게, 아빠나 엄마가 아들 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고, 물론 저도 매번 설교마다 최소 3번 이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문제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진심이 없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요한 말하는 아가페는, 하나님의 진심을 담은 사랑입니다. 아니! 전 인격을 담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심과 전인격을 담은 사랑을 “독생자를 통하여 나타내셨다”(9)고 말씀합니다.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신의 외아들을 죽여서, 다른 사람을 살리겠습니까?
세상 어떤 사랑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을 구원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놀라운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요한은 ‘사랑’을 말하다가 ‘독생자’를 말합니다. 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증명된 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여러분 보시오! 그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댓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가페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아가페는, 우리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사랑의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죄 때문에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재물로 쓰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 ἀγάπη는 의미적으로 우리말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모두 ‘생명’으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생명이심이라!
바라기는 독생자의 목숨까지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드림으로, 하나님 자녀의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